설악산 깊은 곳에 조용히 안겨 있는 절, 백담사. 몇 해 전부터 버스가 운행되고 있어 절이 있는 백담계곡은 더 이상 깊은 곳이 아니지만, 왠지 ‘백담사’라는 이름은 늘 깊은 곳에 있다. 설악산은 단풍이 한창이다. 어디에 저런 빛깔들이 숨어있었는지, 울긋불긋 곱게 물든 단풍잎을 따라 백담사로 오른다.
물이 말라 바닥이 드러난 백담계곡에는 크고 작은 적석탑(積石塔)이 셀 수 없이 빽빽하게 서있고, 수심교(修心橋) 위에는 백담사와 설악산을 찾은 불자들과 등산객의 발길로 가득하다.
도량엔 노란 은행잎과 단풍잎으로 가을빛이 완연하고, 양지 바른 마당 한편에는 만해(卍海ㆍ1879~1944) 스님의 흉상이 보내지 아니한 님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말없이 서있다. 차디찬 티끌이 되어서 한숨의 미풍에 날아간 빛나던 옛 맹서와 운명의 지침(指針)을 돌려놓고 뒷걸음쳐서 사라져간 날카로운 첫 키스의 추억은 아직도 푸른 산빛을 깨치고 단풍나무 숲을 향하여 난 적은 길을 걸어서 차마 떨치고 간다.
선원으로 가는 오솔길을 걷는다. 걸음걸음마다 따라오는 낙엽 밟는 소리는 떠날 것을 염려하는 만남처럼, 다시 만날 것을 믿는 떠남처럼, 그렇게 돌이킬 수 없는 시간을 따라서 차마 사라지고, 무설전(無說殿) 앞에서 만난 노란 단풍잎은 제 곡조를 못이기는 사랑의 노래처럼 님의 침묵을 휩싸고 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