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기 2568. 3.20 (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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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래 스님이 서쪽에서 온 까닭은?
전등사에서 만난 줌머인 서래 스님
“두둥~ 둥” 강화 전등사(주지 혜경) 경내에 법고 소리가 울린다.

제8회 삼랑성 역사문화축제를 시작한 10월 4일, 축제를 찾은 대중들로 전등사는 분주했다. 무명을 걷고 자성을 밝히는 울림을 쫓아 종루로 모여든 사람들은 법고를 울리는 외국인 스님을 호기심 가득한 눈빛으로 바라본다.

진나라 아도 화상은 신라에 불법을 전하기에 앞서 382년 전등사를 창건했다. 전등사는 서양세력과 처음 전투를 벌인 ‘병인양요’ 등 외세를 극복한 호국도량이기도 하다. 외국인 승려가 전법을 위해 창건한 현존 최고(最古)의 고찰 전등사에서 천년의 세월을 넘겨 만난 외국인 스님은 전법에서 구법의 대상으로 달라진 한국불교의 위상을 반증하는 것일까?

방글라데시 출신으로 한국에 출가해 전등사에서 수행ㆍ정진 중인 서래 스님을 만났다.


“서래 스님이 서쪽에서 온 까닭은 무엇일까?”
“조사서래의(祖師西來意)와 어떤 관계가 있지 않을까?”

은사 장윤 스님이 “서쪽에서 왔으니 서래라 하자”해서 지어진 ‘서래(西來)’라는 법명이지만 불교를 좀 안다는 사람이면 농 삼아 피우기 쉬운 망상이다. 만나자마자 스님에게 물었다.

“스님, 한국에 오신 까닭이 무엇입니까?”
달마 조사가 살아있다면 자신이 서쪽에서 온 까닭을 가부좌 틀고 고민하는 수행납자들에게 그러했을까? 스님의 대답은 간단했다. 찰나의 멈칫함도 없었다.
“한국에 불교 배우러 왔습니다.”

서래 스님은 스리랑카 유학 중이던 1999년 한국을 찾았다. 방글라데시 동남부 치타공 산악지역 소수민족 줌머(jumma)족 출신인 스님은 1982년 출생해 15살에 방글라데시에서 출가했다. 이슬람 국가인 방글라데시에는 승가교육기관이 없었기에 스님은 불교를 배우기 위해 스리랑카에 유학했다.

스리랑카 강원(virivena)에서 공부하던 스님은 故 원명 스님을 만나면서 한국을 알았다. 성철 스님 상좌로 해외 포교에 주력했던 원명 스님은 강화 연등국제선원을 개원했고, 지금도 선원에는 10여명의 외국인 스님들이 수행 중이다.

원명 스님을 만난 서래 스님은 한국에서 공부하기로 결심했다. “한국을 찾은 이유는 원명 스님의 원력과 함께 한국이라는 나라에 대한 호기심이 컸습니다. 달리 뚜렷하게 무엇 때문이었다고 표현할 수 없는 것을 보면 한국과의 인연이 지중해서 아닐까요?”

당시 스리랑카에서 서래 스님을 비롯해 혜일 스님, 혜광 스님 등 3명의 줌머인들이 한국을 찾았다. 서래 스님을 제외한 혜일?혜광 스님은 원명 스님 상좌다. 혜일 스님은 한국에 귀화해 연등국제선원에서 수행중이며, 혜광 스님은 동국대를 휴학하고 다시 스리랑카로 유학을 떠났다.

한국에서 다시 출가한 서래 스님은 연등국제선원에서 행자생활을 하던 중, 원명 스님과 도반인 장윤 스님(전등사 회주) 상좌가 됐다. 2000년 직지사에서 사미계를, 2005년 송광사서 비구계를 수지해 정식 스님이 됐다. 그 사이 스님은 송광사 강원을 졸업했다.

한국어를 유창하게 구사하는 서래 스님은 처음 한국에 왔을 때 한국말을 하나도 못했다. 연등국제선원에서 행자생활을 하면서 ‘가나다…’부터 배운 스님의 노력이 얼마나 치열했는지는 지금의 유창한 한국어 실력이 증명한다.

“스리랑카에서 공부했다면 빨리어 경전을 보며 쉽게 공부했을 텐데, 한국에 와서 괜한 고생하는 것 아닌가 후회한 적도 많습니다. 한국말도 서툰데다 한문으로 쓰인 경전을 봐야하는 강원생활에 어려움이 많았습니다.”

하지만 스님은 참고 견뎠다. “도반스님들의 배려를 불보살 가피로 여기고 참고 견뎠다”는 스님은 “10여년 한국 생활 가운데 강원이 가장 기억에 남는다”고 회상했다.

서래 스님이 법고를 배운 곳도 강원이었다. 스님은 “선배스님들이 한번 쳐보라고 해서 배웠다. 법고 앞에만 서면 신이 났다”고 말했다. 전등사 템플스테이를 찾은 대중들 사이에 “서래 스님의 법고만큼은 반드시 보라”는 소문이 돌 정도로 스님의 법고 실력은 수준급이다.

2005년부터 장윤 스님을 시봉해 온 스님은 요즘 범패 배우기에 열심이다. 그냥 염불하면 기분이 좋아 혼자 흥얼거리던 서래 스님의 모습을 기특하게 여긴 장윤 스님은 “목소리가 좋다. 염불을 배워보라”고 권유했다. 2년여전부터 서래 스님은 옥천범음대에서 범패강좌를 수강중이다.

“범패 배우기와 병행해 염불수행에 정진하고 있습니다. 그저 좋기도 하지만 염불하면 쉽게 망상이 걷히고 시름이 사라져요.” 어려서 고향을 떠난 서래 스님의 시름은 고향 치타공 걱정이다.

‘차크마’로도 불리는 줌머인들은 ‘벌목과 화전을 일구는 사람들’이라는 뜻을 가진 소수민족이다. 마을마다 불교 사원이 있을 정도로 불심이 깊다. 줌머인들은 1960년대 파키스탄 정부에 의해 10만여명이 인도로 강제 이주되는 등 탄압을 받았다. 파키스탄 정부에 맞서 벵갈리인과 독립운동도 벌였다. 독립 후 자치권을 요구하는 줌머인에게 방글라데시 정부는 “줌머인의 정체성을 버리라”며 탄압을 시작했다.

“2년 전 고향을 찾았을 때 정부의 불교도 탄압이 심해져 마을 사람들이 힘들어하는 모습을 봤습니다. 이슬람 정부의 보호 속에 방글라데시의 98%를 차지하는 벵갈리인들은 살인?약탈?방화를 저지르며 지금도 줌머인을 탄압하고 있습니다.”

줌머인에 대한 국제적 관심과 지원을 호소하는 서래 스님의 눈시울이 젖었다. 스님은 “특히 한국 불교계가 관심을 가졌으면 좋겠다”고 당부했다.

“단지 불교가 좋고, 한국이 좋아 10여년을 지낸 제게, 고향에 한국교회가 들어섰다는 소식은 충격이었습니다. 게다가 한국 내 50여 줌머인 노동자들도 인근 교회의 지원과 관심에 흔들리고 있고요.”

스님의 원력은 방글라데시에 한국 사찰을 짓고, 부처님 가르침을 전하는 것이다. 서래 스님은 “하루라도 빨리 방글라데시에 돌아가 핍박받는 동포들을 도와 포교하려면 불교를 제대로 알아야하지 않겠냐”며 쓴웃음을 지었다. 한시가 아깝다는 생각에 스님은 하루하루 촌각을 다퉈 정진 중이다. 스님은 범패 배우기를 마치면 동국대 등에 진학할 예정이다. 이후 선방도 찾을 계획이다.

스님은 <숫타니파타>를 가장 아낀다. 그 이유를 스님은 “불교는 가장 인간적인 종교다. 특히 1149편 시구로 이어진 <숫타니파타>는 운율 하나하나가 중생을 보듬고 일깨운다”고 설명했다.

<금강경> <육조단경> <서장> 성철 스님의 <백일법문> 등 서래 스님 처소 책장에 빼곡히 꼽힌 불서 가운데 스님이 선택한 <숫타니파타>는 불교 최초의 경전이다. 먼 이국땅에서 출가의 초심을 잃지 않겠다는 뜻과는 별도로, 스님에게 <숫타니파타>는 망향가(望鄕歌)와 같았다.

1700여 년 전 전등사를 창건한 외국인 승려 아도, 그리고 지금 전등사에서 수행하는 외국인 승려 서래. 현존 최고(最古)의 고찰 전등사는 시간의 경계를 넘어 두 외국인 승려를 전법과 구법으로 잇는다.

아도 스님 이후 천년을 기다려 만난 서래 스님의 모습에서 이번 삼랑성 문화축제 슬로건 ‘천년의 기다림 새로운 시작’을 생각한다.
조동섭 기자 | cetana@buddhapia.com
2008-10-16 오후 6:16: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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