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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불교계 내외에서는 광우병 사태로 촉발된 촛불집회에 참여한 불교계의 행보, 그리고 공직자의 종교편향을 시정하기 위해 개최된 범불교도대회(시청앞 광장)의 의미 및 진로에 대해 말들이 무성하다. 범불교도대회에는 조계종단을 비롯한 다수의 종단이 합세하였으며, 전국 각 사찰의 스님과 신도들이 대거 참여한 한국 현대불교사에서 기념비적인 대회가 되었다. 시청 앞에 모인 20여만 사부대중은 종교를 기독교로 갖고 있는 공무원들의 종교편향을 비판하고, 그런 편향은 헌법에서 보장한 정교분리의 원칙을 심하게 훼손하여 나아가서는 나라의 근간이 흔들릴 수 있다고 보고, 정부에서 자발적으로 해결하라는 경고를 하였다.
그런데 이와 같이 20여만의 사부대중이 모여 그런 대회를 하게 된 저변에는 기독교의 성장, 기독교인의 공직자 진출의 상당함으로부터 불교가 적지 않은 피해를 보고 있으며 추후에는 더욱 많은 피해를 볼 것이라는 인식이 깔려 있다. 그러나 불교계가 어떤 행보를 갈 것인가, 그리고 대회를 강행한 것이 정당하였는가, 다른 방법은 찾을 수 없었는가, 그 대회를 주도한 세력은 누구라고 볼 수 있는가 등등에 대해서는 분석이 다양하다.
이에 대해서는 정부에 제시한 요구가 관철될 때까지 지속적인 대회를 추진해야 한다는 주장이 강력하다. 그러나 일부에서는 적당한 선에서 불교의 의연함을 보여주고 사태를 봉합하자는 목소리도 있다. 불교의 목소리는 다양하고, 그 분석과 해법도 분분하다. 그런데 우리가 더욱 유의할 것은 불교계 내부의 목소리뿐만 아니라, 불교계 외부의 목소리를 경청해야 한다는 것이다. 기독교, 천주교뿐 만이 아니라 종교를 믿지 않는 국민들의 목소리는 참으로 중요하다. 이런 불교계 외부의 목소리는 언론에 잘 노출되지 않고 있음도 간과해서는 안 된다.
이런 점에서 필자는 짧은 이 지면에서 불교계 내외의 진단과 목소리를 전달할 겨를이 없다. 그래서 필자는 근현대 불교를 연구한 당사자로서 이번 사태를 지켜보면서 느낀 소회를 개진하는 선에서 그치려고 한다.
불교 사회화의 등장, 계승, 그 업보
이번 사태가 발발한 것에는 여러 원인이 있다. 공직사회에 불교를 믿는 재가불자들이 기독교인을 능가할 정도로 많았다면 이번 사태는 결코 일어나지 않았을 것이다. 선거가 끝나면 불교계 신문에 불교신자가 청와대, 국회, 행정부에 입성한 사람이 몇 명인지 보도된다. 그 수는 기독교인에 비해 열등한 내용이다. 그러면 왜 공직자에 불교인이 그렇게 적은가? 이는 불교가 본연의 역할을 다하지 못한 결과이다. 불교는 상구보리, 하화중생을 생명과 같은 이념으로 내걸고 있다. 불교는 지난 100여 년 간 불조혜명을 철저히 계승, 구현하였는가? 그리고 중생들이 살고 있는 터전인 국가와 사회의 고통과 모순, 중생들의 삶의 고통을 끌어안고 고뇌하였는가? 이런 지적에 대하여 자신 있게 답을 하는 스님과 불자들은 많지 않을 것이다. 특히 불교는 그간 산중불교의 타성을 완전히 벗어나지 않아서 불교의 사회화, 중생구제, 국가 및 사회의 문제 해결에 동참이라는 측면에서 좋은 성적을 보여주지 못했다.
물론 최근에는 이런 각성을 한 종단, 스님들의 노력 덕분에 과거보다는 진일보한 성과를 보여주고 있다. 그렇지만 다종교 사회에서 급성장하였던 개신교, 천주교의 활동에 비해서는 미약하다. 불교가 내적인 갈등을 보이고, 불교재산을 망실하고, 사법부에서 재판을 벌이고, 폭력을 통해 문제 해결을 할 때에 이웃 종교는 불교를 추월했다. 그리고 삶과 존재 사이의 미로에서 고통을 받았던 다수의 무종교인들은 불교를 찾지 않고, 타종교로 갔음을 직시해야 한다. 그 결과가 최근의 사태를 야기한 원인으로 진단할 수 있는 것이다. 불교의 교리에는 인연법이 있다. 그 인연법을 불교 사상으로만 찾지 말고, 세속의 문제에서도 가늠해야 한다. 부처님 법으로 철저히, 뼈를 깎는 심정으로, 가슴에 손을 얹고 생각해야 한다.
여기에서 지난 100년간 불교가 걸어온 길 중에서 국가와 민족의 문제 해결에 나섰던 흐름도 있었음을 소개하면서 그 흐름이 불교의 주류로 정착되지 못한 원인을 제시하겠다. 개항기의 불교는 서구문명의 도래, 일본불교의 침투 등으로 방향 감각을 찾지 못했다. 산중불교라는 멍에를 벗지 못했고, 그런 결과로 사회의식도 없었다. 더욱이 외세를 등에 업고 침투한 개신교의 위세는 감당도 못하였다. 그러면서 일부 승려들은 문명화된 일본불교의 모방에 급급했다. 그런 현실은 자주적, 자생적인 종단도 유지, 운영하지 못한 결과를 가져 왔다. 종단도 만들지 못한 현실에서 중생구제, 국가와 사회의 문제 해결을 바랄 수도 없었다.
그러다가 나라는 1910년 8월 일제의 식민지로 전락되었다. 나라도 망한 현실에서 불교가 온전한 길을 갈수 있었겠는가. 그래서 한용운은 불교의 체질을 대폭 바꾸어야 한다고 주장하며 <조선불교유신론>을 펴냈다. 당시 그에 대한 반응이 찬성과 비방이 비슷하였다 함은 당시 불교계 내부가 겨우 정신을 차리는 정도였다고 본다. 우리나라를 강탈한 일본은 불교의 호국성, 민중과의 친근성을 차단하기 위해 행정적으로 철저한 통제를 했다. 그래서 나온 것이 사찰령이었다. 그 결과 한국불교는 일제가 패망하는 그날까지 일제의 간악한 구속에 놓여 있었다.
그렇지만 이런 현실에서도 불교 본연의 길을 가기 위한 고투를 전개한 스님들이 다수 있었다. 그들은 식민지 불교체제에 반발하며, 사찰령 철폐를 주장하고, 자주적인 종단을 만들려 노력하고, 사회와 중생의 터전으로 나가기 위한 제도 및 체질 개선을 강력하게 주장하였다. 그러면서 민족운동에도 참여하였다. 3·1운동, 임시정부, 만주 독립군에 참여, 군자금 제공 등이 그 예증이다. 그들의 분투로 1941년에는 조계종의 전신인 조선불교 조계종을 만들었다. 그런데 이들은 일본불교의 영향아래 결혼을 하였다. 그래서 그들에게는 대처승이라는 수식어가 붙게 되었다. 승려의 결혼은 계율에서도 금하였고, 1500여년간 한국불교에서는 불가능한 것으로 인식되어 전통화 되었다. 그럼에도 불교 사회화, 승려 인권의 고양을 이유로 실행에 옮겼다. 그러나 보수적 불교, 관행적 불교에서는 강한 저항을 받았다.
이들의 선택, 노선은 일제하에서는 일본불교와의 공존, 일제의 은근한 후원이 있어 문제가 되지 않았다. 그러나 1945년 8·15해방이 되면서 이들의 노선은 불교계 내부에서 비판받기 시작했다. 그 비판, 반발은 1950~1960년대의 이른바 불교정화운동을 통해 극명하게 노출되었다. 공권력과 일반사회에서의 비판, 수행승인 수좌들의 강력 저항으로 인해 대처승은 제도권 밖으로 구축되었다. 대처승들의 축출은 대처승이 내걸었던 불교 사회화의 몰락을 의미하였다. 바로 이럴 때에 기독교의 성장이 있었다. 대처승들은 태고종을 만들어 자신들이 구현하였던 불교 사회화가 새로운 대승불교운동이라고 주장하였지만, 태고종단을 비롯한 군소종단에서 불교사회화가 잘 실천되었다고 평가하기에는 주저하는 바가 많다.
한편, 일제하 불교에서 승려 결혼을 실천한 승려들을 비판한 세력이 있었으니 그들은 선학원 계열 수좌들이었다. 그들은 자신들이 정통수도승이라고 자부하고, 불법과 전통불교의 관점에서 불교를 수호하겠다는 의지를 피력했다. 그들은 일제하의 주류불교는 아니었지만 정체성, 전통성을 지킨 것은 의미가 있다. 그러나 그들은 불교 사회화, 혹은 국가와 민족의 문제에 대해서는 관심이 없었다. 불조혜명 계승만이 그들의 목적이었다. 그러다가 이 계열의 수좌들은 1950년대 불교정화운동을 통하여 조계종단의 주류가 되었다. 그 결과 그들은 종단을 재건하고, 요직을 맡고, 사찰 주지도 맡았다. 그러나 정화운동 과정에서 폭력, 사법부 송사, 재산망실, 후계 승려에 대한 교육 및 수행의 미실시 등의 문제로 업보를 잉태하였다. 바로 이 업보가 1970년대의 수많은 갈등, 재판, 명리 추구임은 보편화된 상식이고, 그로 인해 10·27법난의 요인도 제공했다.
이에 대한 비판과 각성은 1980년대에 불교계 내부에서 치열하게 일어났다. 해인사승려대회, 민중불교, 실천승가회, 선우도량 등의 대두가 그것이다. 그 결과 1994년 이른바 ‘종단개혁’이라는 불교 내부의 새로운 흐름이 분출되었다. 1994년 종단개혁은 다양한 목표를 내걸었지만 실제는 제도적인 측면에 머물렀다. 교육 분야를 비롯한 일부 성과는 있었지만 당초 주체세력이 내건 목표는 한계가 있었다. 그 한계는 1998·1999년 내홍에서 결정적으로 노출되었다. 이는 1980~1990년대 개혁의 흐름으로도 불교가 가야할 길을 가지는 못했음을 말하는 것이다.
이처럼, 1950~1990년대의 조계종단을 비롯한 불교계 행보는 ‘상구보리 하화중생’이라는 이념 구현에 미진했다. 달리 말하면 국가, 사회, 중생, 대중을 위한 불교역할을 다하지 못하였다. 이런 역사에서 최근의 사태를 바라볼 수 있다.
과거 현재 미래 종합 고찰하며 인재 양성해야
이번 사태를 치유하고, 불교발전을 이루는 길은 불교의 근본이 어디에 있는가를 살피고, 그 연후에 불교 사회화를 달성하기 위한 다양한 방법의 강구이다. 이런 입론 하에서는 불교계 외부에 불교의 치부를 드러내는 행태는 과감하게 청산해야 한다. 문중 문도의 갈등, 명리추구를 위한 내적 소비, 반불교적인 정서 청산은 당연하다. 이런 구도 하에서 교학, 종학, 불교사, 응용불교를 아우르는 수준 높은 연구소를 시급히 만들고, 운영해야 한다.
한국의 민족문화를 대변하고, 민족불교임을 강조하고, 1등 종교임을 주장하면서 그에 걸맞은 연구소, 종단의 과거 현재 미래를 폭넓게 연구해 정도를 모색하는 종합연구소 하나 운영하지 못하고서야 무슨 주장을 하겠는가? 이런 연구소에서는 불교 이념, 불교 사회화를 실천하기 위한 내적 방향, 각론을 생산해야 한다. 이런 것이 갖추어지게 된 후에는 인재 양성에 나서야 한다. 그러면 불교인재들이 성장하여 사회의 구석구석에 포진하게 될 것이다. 그럴 때만이 종교편향이 없어지고, 불교가 민족불교가 되고, 1등 종교가 된다. 문제는 이를 자각하고, 실천하는 것이다. 오동잎 떨어지는 것을 보고 세상의 변화를 가늠하는 곳이 우리 불교였는데, 요즈음은 오동잎을 찾지도 않으니 참으로 답답한 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