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서울 홍익소아과 이종린 원장(54ㆍ普賢)은 병원을 찾는 어린이 환자들에게 관음보살과 같은 포근한 인상으로 편안히 대하며 생활과 수행을 병행하는 보현행자다. 불자라면 참나를 찾고 내안의 불성을 밝히기 위해 참선ㆍ능엄주ㆍ절수행ㆍ염불 등 다양한 수행을 해봤을 것이다. 이 거사는 이렇듯 다양한 수행법의 귀착지가 바로 보현행원(普賢行願)이라고 말한다.
“수행자들은 절에서 절하고 참선하고 공양올리고 나면 정화가 되다가도 집에 오면 도루묵이 된다고들 합니다. 이것은 삶과 수행을 분리해서 그런 거예요.”
보현행원을 널리 알리기 위해 앞장서 온 이 거사는 현재 인터넷 까페 ‘화엄경 보현행원(cafe.daum.net/bohhyun)’ 운영자로 활동 중이다. 조계사ㆍ불광사에서 보현행을 강의했고, <님은 나를 사랑하시어> <세간 속에서 해탈 이루리> <실천 보현행원>등의 저서를 펴냈다.
하지만 이 거사가 처음부터 보현행을 실천한 것은 아니다. 불교집안에서 자라 유년시절부터 불교를 접했고 1974년 서울대 의과대 1학년 재학 중 불교학생회에 가입하면서 본격적으로 불교에 입문했다. 그는 1978년에 보현행원을 처음 만났지만 ''참 말도 안 되는 수행법이다''고 우습게 여겼다고 한다. 위대한 경전인 <화엄경>에서 남을 칭찬하고 참회하는 것이 전부인 행동을 최고의 수행법으로 지목하고 있는 것을 이해하기는 힘들었다. 이후 이 거사는 20년간 운허ㆍ탄허ㆍ월산ㆍ고암ㆍ구산ㆍ청화ㆍ혜암 스님 등 당대 선지식들을 찾아다니며 구도의 길을 걸었다. 먼 길을 돌아갔던 그는 결국 1994년 불혹의 나이에 ‘널리 바치고 섬겨라’는 광수공양(廣修供養)이라는 <화엄경> ‘보현행원품’ 구절을 접하고 감흥을 받았다. 이로써 보현행원 수행을 시작하게 된다.
보현행원의 핵심은 일상생활 자체가 수행임을 아는 것이다. 깨달음을 얻거나 깨달아 부처를 이루겠다는 것이 아니라 오로지 부처님을 기쁘게 하고 부처님을 공경ㆍ찬탄ㆍ공양하는 마음으로 수행하는 것이다. 또한 보현행원은 다른 수행법을 응용ㆍ발전시킨 것이 아닌, 화엄불교의 본래 수행법이다. 보현행원을 할 때 우리는 바로 그 자리에서 부처가 된다. 대개의 가르침이 ‘우리는 부처다’라고 하는 본래불의 선언으로만 그치는 반면, 보현행원은 부처로서 어떻게 행동하고 살아가야 하는지 삶에 대한 구체적 지침을 준다.
보현행원의 수행법은 간단하다. 첫째, 행마다 ‘원(願)’을 세운다. 원이 없으면 제대로 수행이 이어지지 않기 때문에 원은 수행도중 흔들리기 쉬운 목적과 방향을 뚜렷이 잡아준다. 둘째, ‘고맙다, 잘했다, 미안하다, 섬기고 모시겠다(공양)’의 첫 글자를 딴 자칭 ‘고잘미섬공’을 새기며 삶 속에서 실천하는 것이다.
“가족들에게 가장 좋은 쌀로 밥을 지어주세요. 가장 좋은 쌀은 경기미ㆍ이천미도 아닌 ‘고잘미’입니다.”
이 거사가 아이를 데리고 오는 엄마들에게 항상 당부하는 말이다. ‘고잘미’ 운동을 적극적으로 홍보하는 이 거사는 “아이들은 스펀지와 같아서 보고 듣는 즉시 흡수합니다. 밝고 긍정적인 것으로 스펀지를 채우는 책임은 부모의 몫”이라고 강조한다.
이 거사는 보현행원 수행으로 변화된 점이 많다. 부처님을 공경ㆍ찬탄하는 마음으로 수행하다보니 어렵게 느껴졌던 공부가 훨씬 수월해지고 상대를 향한 공경심이 생겼다. 또한 이 세상 모든 이가 부처라는 사실을 알게 된 후 상대를 부처 대하듯 공경하게 됐다.
그는 보현행원 공부를 하는 불자들이 많이 나왔으면 좋겠다는 바람을 갖고 있다. 보현행원 이론을 공부하고, 직접 실천해야만 그 속에 담긴 뜻을 비로소 알 수 있기 때문이다.
이 거사는 삶과 수행을 철저히 하나로 봐야 한다고 강조한다. 머리로 고민하는 기존 불교계의 보현행원 해설은 행원을 단순한 윤리규범 차원으로 해석해 궁극의 진리와 보현행원을 연결시키지 못했다는것. 반면, 이론을 바탕으로 한 실천적 보현행원은 윤리 규범뿐 아니라 궁극의 진리를 설하는 수승한 가르침이라는 것이 이 거사의 주장이다.
어떤 수행, 어떤 가르침과도 대립이 없는 가르침인 보현행원. 생활 속 수행 ‘보현행’을 통해 보현행원 수행법 대중화에 앞장서고 있는 그는 요즘처럼 경제난으로 큰 번뇌가 밀려올 때 감사하게 받으라고 한다.
“번뇌는 물과 얼음에 비유할 수 있습니다. 물을 많이 마시고 싶으면 큰 얼음을 녹여야 하듯, 큰 번뇌를 녹이면 큰 깨달음이 올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