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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오천축국전(往五天竺國傳)> 저자인 혜초(慧超, 704~787) 스님이 열반한 건원보리사로 추정되는 보리암을 지도상에서 발견해, 유지로 여겨지는 몇 곳을 답사했습니다.”
혜초 스님을 가슴에 품고 스님의 발자취를 따라 20여년 동안 8차에 걸쳐 10여개국을 돌아다녔던 티베트불교 연구가 다정 김규현 티베트문화연구소장이 <불교평론> 36집에 기고한 ‘혜초의 후반기 생애에 대한 고찰’을 통해 혜초 스님 열반지를 찾았다고 주장하고 나서 눈길을 끈다.
김 소장은 2005년 본지 인터넷 뉴스판인 ‘붓다뉴스(www.buddhanews.com)’에 연재한 <역 ‘왕오천축국전’ 별곡-혜초 따라 5만리>란 기고문에서는 “혜초 스님이 <천발대교왕경>을 번역, 서문을 쓰고 여생을 보낸 것으로 알려진 오대산 건원보리사(乾元菩提寺)는 금각사의 별칭일 개연성이 높다”고 주장했었다.
김규현 소장은 “찾을 수 없던 보리사가 실체를 드러나 스스로 결론을 수정한다”면서, 지도상 발견된 건원보리사와 그 터로 추정된 몇 곳을 답사해 정리했다.
# 천축 다녀온 혜초 스님 번역에 전념해
김 소장은 혜초 스님의 열반지를 찾기 위해 스님의 후반기 연보에 주목했다. 김규현 소장은 혜초 스님의 704년 출생설을 전제로, “스님이 천축국 순례를 마치고 728년 제2의 고향 장안성에 돌아왔을 때는 25세였다”고 말했다.
장안성은 현재 시안이다. 베이징(北京), 난징(南京), 뤄양(洛陽)과 함께 4대 고도(古都)‘로 손꼽히는 시안은 산시성(陝西省) 중심지로 현재도 인구 300여만의 대도시지만, 당나라 때는 인구 150만 이상이었다.
김 소장은 “혜초 스님이 장안 도착 후 만년에 오대산으로 들어가기 전가지 50여년을 밀교승으로 활동했다”고 말했다. 김규현 소장은 “궁중 원찰 내도장에서 중책을 맡았고, <왕오천축국전>에서 쓰인 단어들이 혜림에 의해 <일체경음의>란 용어집에 수록됐을 정도로 위상이 높았다고 소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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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 소장은 서역에서 돌아온 혜초 스님이 여장을 풀었을 장소로 천복사(薦福寺)를 지목했다. 천복사는 혜초 스님이 천축 순례를 떠나기 전 인연을 맺었던 중국 밀교의 태두인 금강지와 불공삼장이 주석하던 곳이다. 김규현 소장은 천복사에서 금강지, 불공삼장을 모시고 8년간 불경을 번역했다는 <대종조 사공대변정광지삼장화상 표제집>을 통해 “천축에서 돌아와 집도 절도 없던 혜초를 전문번역가가 필요했던 금강지와 불공삼장 등 두 스승이 반갑게 맞았을 것”이라 추정했다.
엔닌(圓仁, 794~864)의 <입당구법순례행기>를 통해서는 “금강지와 불공만큼 혜초 화상도 중요한 역할을 했다”고 강조했다.
# 오대산에서의 회향
김 소장은 “774년 불공삼장 입적 후 혜초 화상은 문득 무상을 느낀 것이 오대산으로 향한 계기가 됐을 것”이라 말했다.
오대산은 높이 3058m로 중국 북동쪽에 위치했다. 다섯 봉우리로 이뤄져 오대산이라 불린다. 당나라 때는 법화, 화엄, 천태, 정토 등 종파와 신흥 밀교 고승들이 사원을 개창해, <화엄경>에서는 문수보살이 거처한 청량산과 동일하게 인식했다. 신라 선덕여왕 13년(644년) 자장율사는 청량사에서 47일 기도 후 문수보살로부터 불사리와 금란가사를 받고 귀국해 설악산 봉정암 사리탑을 조성했다는 설화도 있다.
혜초 스님은 780년 4월 15일 오대산 건원보리사에 도착해 다시 번역에 착수했다. 김규현 소장은 “혜초 스님이 스승 금강지로부터 전수받은 <대승유가금강성해만주실리천비천발대교왕경(大乘瑜伽金剛性海曼珠實利千臂千鉢大敎王經, 이하 천발경)>을 50년 세월동안 참구했다”고 말했다. 만주실리(曼珠實利)는 문수보살이다.
김 소장은 “혜초 스님은 목욕재계하고 깨끗한 옷으로 갈아입고 흰 사자를 타고 남대봉가지 친히 마중 나온 문수보살의 손을 잡고 열반에 들었다”며 혜초 스님의 열반 당시를 설명했다.
건원보리사가 혜초 스님 열반지라는 사실은 <천발경 서>에서 밝혀졌다. 김규현 소장은 780년 4월 5일 오대산 건원보리사에 도착한 혜초 스님이 기록한 문헌(至唐建中元 年四月十五日 到 ‘五臺山 乾元菩提寺’ 至五月五日 ‘沙門慧 超’ 首再錄)에 주목했다.
하지만 건원보리사를 찾기는 쉽지 않았다. 김규현 소장도 “건원보리사는 금각사의 별칭”이라 했을 정도였다.
# 건원보리암 비밀 간직한 ‘오대산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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혜초 스님 열반지인 건원보리암은 돈황 막고굴 제61호 벽화인 ‘오대산도’와 돈황연구원이 편찬한 <돈황석굴예술>의 ‘막고굴 제61굴’ 책자 부록에서 우연히 발견됐다.
김규현 소장은 “그렇게 찾아 헤매던 곳이 책자에 쓰인 보리지암(菩提之菴)이란 이름에 있었다”고 회고했다.
‘보리지암’ 네 글자를 단서로 건원보리사를 찾아 나선 김 소장은 먼저 지도상에서 ‘보리암’과 유사한 지명 및 사원을 찾아 분석하고 현지를 답사했다. 유일한 단서는 ‘오대산도’뿐이었다.
‘오대산도’는 13m*3.4m 크기의 장방형으로 막고굴 중 가장 큰 벽화로 꼽힌다. ‘오대산도’는 중국에서 가장 오래된 목조건물인 불광사를 비롯해 수많은 사찰 지명과 설화들이 명기돼있다.
김규현 소장은 ‘오대산도’ 방제 순서에서 보리암을 유추했고, 금각사가 아닌 청량사 인근에 있었다는 사실을 밝혀냈다. 하지만 의문은 계속됐다. 금각사는 불공삼장-금각함광-(보리)-혜초로 이어진 밀교 도량이었지만, 청량사는 화엄종 종찰이었기 때문이었다.
김 소장은 최정삼이 엮은 <오대산육십팔사>에서 의문을 풀었다. “불공삼장이 대력 원년(766년) 황제에게 주청해 청량사를 중수했다. 이로 인해 청량사는 선종 총림과 정토 도량에서 밀종 도량으로 변했다”는 기록이었다.
김규현 소장은 불공삼장의 행장을 담은 <불공표제집> 등을 인용해 “당나라 대종 때 여러 선종사찰들이 밀종화됐다”고 뒷받침했다.
# 여전한 의문점들
김 소장은 “혜초 스님이 열반한 건원보리사는 보리지암이며 청량사 인근에 위치했다”는 자신의 가설에 풀지 못한 의문점을 제시했다. 수많은 오대산 관련 자료에서 왜 보리암이 빠졌는지가 그 중 하나다. 김규현 소장은 <대정신수대장경>과 <불공표제집> 등에서 불공, 함광, 혜초 등의 기록량이 다르다는데 주목하고, 선종과 밀종의 파워게임으로 기록에서 누락됐을 가능성을 제시했다.
김규현 소장은 “‘오대산도’는 사방 500리나 되는 광대한 오대산의 수백개 대상체를 한 장의 평면구도에 축약해 표기했다는 점을 감안하면 반드시 건원보리사를 찾을 수 있다”고 강조했다.
20여년 혜초 스님을 쫓은 김 소장의 연구는 이제 혜초 스님이 열반한 건원보리사가 청량사 인근이었다는 사실까지 접근했다. 하루빨리 건원보리사 위치가 밝혀져 김 소장이 발원한 ‘해동사문보리혜초행적비(海東沙門菩提慧超行蹟碑)’가 세워지길 기원한다.
◇ 혜초 스님과 <왕오천축국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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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축에서 돌아온 뒤 당나라에 머물며 금강지의 법통을 이은 불공삼장의 6대 제자로 이름을 떨치며, 불경을 연구하고 번역하며 후학을 양성하다 건원보리사에서 열반했다.
혜초 스님이 인도를 여행하면서 쓴 기행문 <왕오천축국전>은 1908년 프랑스 학자 펠리오에 의해 발견돼, 현재는 파리 국립도서관에 보관돼 있다.
<왕오천축국전>에서 ‘천축국’은 지금의 인도를 말한다. 당시 인도는 동천축(캘거타), 서천축(알로르), 남천축(나시크), 북천축(잔다라), 중앙천축(마가다)의 5개 지역으로 나뉘어 있었기 때문에 ‘오천축국’이다. ‘왕’은 그 곳을 다녀왔다는 의미다. <왕오천축국전>은 원래 세권이었으나 앞뒤가 잘려진 채 발견됐으며, 1200여년 전 인도와 중국의 사정 등을 알려줄 역사적, 학술적 가치가 큰 자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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