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기 2568. 10.23 (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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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산 대종사
활안 스님의 내가 만난 선지식
기산 스님은 송광사 출신이시다. 송광면 장안리에서 태어나 14세에 인봉 스님께 출가, 화엄사 진진응 스님께 이력을 보았다. 1919년부터 현 동대 전신인 중앙학림을 졸업하고, 지방학림 교사와 강사, 주지를 거쳐 40년 조선불교총본산 태고사(현 조계사) 대웅전 건축 상임위원으로 부임 종무원 교육부장을 역임하였다.

61년 8월 신촌 봉원사 이만봉(인간문화재 49)스님 댁에서 처음 뵈었을 때는 광주 포교당 포교사, 전남종무원장, 정광학교 교장, 총무원 원장을 거처 동국대학교 이사장으로 계셨다.

낙산사에서 춘곡 큰스님 편지를 받고 서울에 가니 아직 학교에서 퇴근하지 아니하였다. 만봉 스님께서 여섯 시까지 “기다려 보라” 하여 기다리니, 해가 뉘였뉘였 넘어갈 즈음 지프차 한 대가 도착하였다.
“어디서 왔느냐?”
“송광사에서 왔습니다.”
“들어가자.”
방으로 들어가니 밥상이 두 개 놓여져 있었다.
“이리 가져오너라. 같이 먹자.”
상하의 구별이 엄격한 절간에서 큰스님과 마주 앉아 공양을 한다는 것이 어색하여 사양하였으나, 극구 가져오라 하여 친 아버지 모시고 밥 먹는 식으로 다정하게 밥을 먹다보니, 이런 말 저런 말이 나왔다.
“저녁에 자고 가거라.”
하고 스님 자리 옆에다 자리 하나를 더 깔고 물었다.

“너는 어찌하여 중이 되었느냐?”
“중이 된 줄도 모르고 중이 되었습니다.”
“무슨 공부를 하였지?”
“송광사 추강 학담 스님께 사미과를 배우고, 취봉 스님께 사미계를 받은 뒤 <수심결>을 익혔고, 추강 스님을 따라 월정사로 갔으나 종단분규 때문에 수도원이 폐지되어 상원사 선방에서 한 철을 났습니다.”
“이력도 마치지 못하고 선방에 먼저 들어가 스승을 잘못 만나면 증상만인(增上慢人)이 되기 쉽다.”
“그렇지 않아도 <능엄경>에 홀연연기(忽然緣起)라는 말이 있어 몇 군데 물었으나, 결론을 얻지 못했습니다. 이 세상 모든 것이 인연에 의해 생긴다 하였는데, 왜 홀연연기라는 말이 생겼는지 알 수 없습니다.”
“허허. 네가 언제부터 그런 생각을 하였느냐? 나는 내 나이 50이 다 되어서야 그런 생각을 하게 되었는데”
하고 벌떡 일어나 손목을 잡으시면서,
“너는 학교에 가야 되겠다”
하시었다.
“<수심결>을 보니 도만 통하면 무불통지(無不通知)라 하였는데, 학교는 다녀서 무엇합니까?”
“지금은 선지식을 찾아 자기 점검도 할 수 없는 시대가 되었다. 그러니 학교에 가서 나의 공부를 점검하고 부처님과 조사들이 어떻게 포교하였는가를 배워야 한다.”

그리하여 스님과 나는 하루 저녁사이에 스승과 제자가 되고, 이듬해 동국대학교에 들어가서는 틈만 있으면 사서실 일을 보게 되었다. 동국대학교 총장 백성욱 박사님께서는 출근시간에 맞추어 꼭꼭 나오셔서 문안을 드리셨는데, 특별히 드릴 말씀이 없을 때는 이사장실에 직접 납시여 인사를 드렸다.
“총장님께서 이러하시면 진짜 이사장 면목이 없어집니다.”
“그런 말씀 마십시오. 학교는 이사장님이 주인입니다. <금강경> 도인을 잘못 모시면 금강신장에게서 벌을 받게 됩니다”
하고 깍듯이 대접하였다. 그동안 많은 사람들을 모셔 왔지만 기산 스님처럼 깨끗하고 청렴결백한 스님은 보지 못했다는 것이다. 실로 스님은 77세를 일기로 성북동 청룡암에서 입적하실 때까지 가진 것이라고는 가사, 장삼, 발우와 평생 동안 쓰신 원고 밖에 없었다. 책도 동국대학교 도서관에서 빌려다 보셨기 때문이다. 돌아가시기 5일전에 가니,
“죽고 난 뒤에 주면 죽은 사람 물건이라 쓰지 않을 것이니 이것 받아라.”
하고 친히 덮으시던 이불 한 채를 주셨다. 당시는 경제가 어려워 불도 제대로 때지 못하고 난로도 피지 못하고 살았기 때문이다.
미아리에서 고등공민학교를 운영할 때 이른 봄에 오셨다가 벽에 성에가 낀 것을 보고 매우 안타깝게 생각하셨던 모양이다. 당시 7천2백원 월급을 받으면 3천원은 하숙비 내고 2천원은 운전수 주고, 2천원 가지고 용돈을 쓰시는데, 그 가운데 반을 잘라 학생들 노트와 연필을 사 주었다.
“다른 사람들은 불교공부해 가지고도 호구지책만을 생각하는데, 너는 네 장가갈 돈까지 갔다가 자선사업을 하고 있으니 고맙게 생각한다.”

그런데 그날 학교 방문을 하고 내려가시다가 인수동 3거리에서 건립패들을 만났다. 징, 꽹과리를 울리고, 나무아미타불을 부르며 길거리에서 불공시식을 하는 사람들을 보고는,
“저자가 누구 상좌인지 알아보고 오너라.”
하여 가서 물으니,
“동국대학교 이사장 임석진 스님 상좌입니다.”
하고 명함을 주어 보니 실제 그렇게 쓰여져 있었다. 불쌍한 건립패들을 살피며,
“나 같이 못난 사람의 이름을 팔아서라도 호구지책을 면하고 있으니 다행이다. 나에게는 린곡, 문곡, 두성, 대천 등 상좌가 몇 사람 아니 되어 쓸쓸 하였는데, 저런 사람들이라도 있으니 내 마음이 든든 하구나.”
그리고,
“나쁜 짓만 하지 말고 잘 살게”
하고는 내려 오시면서,
“소도 언덕이 있어야 한다더니…”
혀를 톡톡 차셨다.
활안 스님 |
2008-09-17 오후 4:24: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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