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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단했던 역사는 부처님 품에서 끝이 나고, 사라진 극락전은 하얀 들꽃으로 피어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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치열한 전쟁터였던 건봉사. 생사(生死)를 묻던 그 날의 총성은 이제 들리지 않고, 포화를 견디며 살아남은 불이문(不二門)이 부도(浮圖)처럼 서있다. 북녘에서 내려온 냇물이 골짜기를 적시고, 빗물 고인 돌확에는 노란 루드베키아가 수련처럼 피어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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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랜 세월 아픈 시간을 보낸 건봉사는 한 동안 중생의 발길을 들일 수 없는 외로운 도량이었다. 전각들은 사라졌고 사중(四衆)은 머물 수 없었다. 매일 밤 부처님사리탑 위로는 차가운 달빛만이 다녀가고 홀로 남은 불이문은 총탄의 상처로 아파해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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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이문을 지나자 한 눈에 도량이 들어온다. 눈을 감으면 그 옛날의 대가람이 보일 것만 같다. 능파교도 보이고 대웅전도 보인다. 봉서루 옆 작은 배나무에는 달랑 배 하나가 열려서 찬바람을 기다리고, 후원 벽에 걸어둔 목탁위엔 빨간 고추잠자리가 앉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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법당에서 목탁 소리가 들려온다. 고단했던 역사는 끝이 나고 사라진 극락전 기단 위에는 하얀 개망초가 가득 피었다. 하얀 꽃잎 위로 하얀 나비가 날고 스님의 하얀 고무신이 극락전 꽃밭을 걷는다. 적적했던 돌계단 위로 저녁 바람이 스치고, 산신각 앞에 선 스님은 정성스레 합장을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