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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강사 : 조성택 (고려대학교 철학과ㆍ불교철학)
- 주최 : 한국학술진흥재단
- 일시 : 2008년 8월 16일
- 장소 : 서울역사박물관 강당
- 후원 : 교육과학기술부
‘석학과 함께하는 인문강좌 시리즈’ 아홉번째 강연을 맡은 조성택 교수(고려대)는 기존 불교학연구에 있어 새로운 시각을 제시한다. 이번 시간에는 불교전통 내의 두 구원의 존재, 즉 미륵과 아미타불과 관련된 신앙이 인도에서 어떻게 시작, 형성됐고 이러한 신앙이 중국과 한국의 지역문화에 어떻게 수용됐는지를 개관한다. 인도와 중국 그리고 한국이라는 각 문화권의 독특한 특징들을 파악하고 두 구원 신앙을 통해 한국불교의 위치를 재조명한다.
# 불교구원의 두 존재, 미륵과 아미타불
각 문화권의 미륵과 아미타불에 대한 신앙형태를 논의하기 이전에 우리는 불교 교리 내에서 이 구원의 존재가 어떠한 의미를 지니고 있는지 짚고 넘어갈 필요가 있습니다.
미륵불과 아미타불은 많은 점에서 대조적입니다.
미륵은 불교가 상정하고 있는 삼계(욕계ㆍ색계ㆍ무색계)중 욕계 육천 하나인 도솔천(兜率天)에 살면서 지상에 붓다로 태어나기를 기다리고 있는 보살입니다. 그러므로 그는 신성한 실체가 특정한 시기에 이 땅에 나타나는 유사-역사적인 존재(quasi-historical)입니다.
반면 아미타불은 정토(淨土, Sukh?vat?), 즉 불국토에 머무르고 있는 이미 부처가 된 존재입니다. 따라서 그는 신성함이 공간적, 시간적 범위를 넘어선 차원에서 실현되는 초역사적 존재입니다.
아미타불 신앙은 아미타불의 ‘구원능력’에 근거합니다. 그를 믿는 자는 어떤 고통도 없는 천상의 지복(至福)만이 존재하는 정토에 다시 태어나게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한편 미륵에 대한 신앙은 좀더 복잡합니다. 불교에서 다양한 미륵신앙이 발달했으며, 그 신앙 형태에 따라 ‘상생(上生)’과 ‘하생(下生)’의 두 가지 범주로 분류하게 됩니다.
‘상생’의 유형에서는 신도가 도솔천에 환생하여 미륵을 친견하고자 하며, ‘하생’의 유형에서는 미륵이 부처로 지상에 출현할 때 자신도 ‘재생(再生)’하기를 바랍니다. 불교도들은 보통 미륵이 먼 미래에 나타날 것이라고 생각하지만, 때로는 기존의 질서를 뒤엎는 혁명과 관련 될 경우 미륵의 ‘하생’은 임박한 것으로 믿어지기도 했습니다. 그리고 혁명 지도자들은 종종 자신이 미륵의 현현이라고 주장하기도 했습니다.
# 인도와 중앙아시아의 아미타불과 미륵
우선 미륵과 도솔천을 살펴보면 대승과 소승을 통틀어 미륵신앙보다 복합적이고 불분명한 기원을 갖고 있는 경우는 거의 없을 것입니다. 미래의 붓다로서 미륵을 인정하고 있는 다양한 문헌자료들은 너무나 단편적인데다, 보통 상호 모순적이어서 불교사 내에서 ‘미륵’의 개념과 미륵신앙의 발전모습을 추적하는 것은 매우 어렵습니다.
디가니까야(D?gha-N?k?ya)의 전륜성왕수행경은 비록 간략하지만 미래세의 부처로서 미륵을 언급하고 있는 최초의 자료 중 하나입니다.
다른 자료들이 있지만 정전에서 대승과 상좌부의 자료들이 미륵신앙에 대해 아무런 언급을 하지 않고 있기 때문에, 우리는 인도 내 미륵신앙이 생겨나는 데는 상당한 시간이 소요됐으며 미륵신앙은 그의 거처가 도솔천으로 결정된 이후에 비로소 생겨난 것이라고 결론지을 수 있습니다. 미륵신앙이 후대에 중앙아시아와 동아시아 등지에서 누렸던 인기 비해 인도에서 더디게 발달한 이유는 세 가지로 들 수 있습니다.
첫째는 인도 불교도에게 도솔천은 이상적인 재생 장소가 아니었습니다. 도솔천은 불교우주관에서 가장 낮은 영역인 욕계에 속해있으며, 미래의 부처는 인간세계와 가깝다는 이유로 그곳에 머무르고 있기 때문입니다.
둘째는 석가모니 붓다가 활동하던 시기와 비교적 가까운 시대를 살고 있던 인도불교도들에게는 미륵은 매력적이지 않았을 것이고 그들에게 미륵이 도래하는 미래는 너무 먼 후일로 생각됐을 것입니다.
셋째는 미륵과 관련된 신앙은 그 당시 석가모니 붓다의 가르침과 잘 맞지 않는 부분이 있기 때문입니다. “다른 이에게 의지하지 말고 오직 법과 자기 자신에 의지하라”는 붓다의 유훈에서와 같이 미륵신앙은 쉽게 받아들이기 어려웠을 것입니다.
이러한 이유 때문에 미륵은 인도와 동남아시아에서 후대가 되어서야 인기를 누릴 수 있었고, 오히려 ‘본고장’과 멀리 떨어진 곳에서 인기가 있었던 것입니다. 중앙아시아, 특히 인도와 이란의 접경지대에서 수많은 미륵상을 볼 수 있듯이 이 지역에서 미륵신앙이 유행했음을 알 수 있습니다.
한편 아미타불신앙은 인도 거의 모든 대승 전통의 출가자들에게도 타당한 종교목표로 받아들여졌습니다. 이러한 두 가지 점에 입각해 우리는 인도 대승불교의 정토개념 그리고 인도불교의 구원론적 지향점에 대해 평가를 내릴 수 있습니다.
첫째, 인도에서 아미타불은 동아시아에서와 같이 신앙대상으로 발전하지 않았고 정토는 정토를 믿는 불교신자들 만을 위한 곳이 아니라 그곳에 태어나기를 염원하는 모든 이들을 위한 곳이었다. 오직 정토는 아미타불, 도솔천은 미륵과 연관돼 있다는 중국불교 전통과 상반된다.
둘째, 출가중심 전통이 천상에 태어나는 것을 경시했지만, 정토는 승려들에게도 합리적인 목표로 여겨지기 시작했다. 이는 멸법에 대한 관념과 관련 있을 수도 있다.
셋째, 아미타불신앙과 미륵신앙이 경쟁관계였다는 증거는 없다. 이러한 사실은 이후 중국불교에서 아미타불 신앙과 미륵신앙 사이에 형성됐던 경쟁관계와 대비된다.
# 중국에서의 두 부처
불교가 처음 중국에 소개됐을 때, 당시 중국북방을 점령하고 있던 유목민족과 남쪽의 한족은 서로 다른 반응을 보였습니다. 북방 유목민족은 불교에 우호적이었습니다. 특히 북방유목민들의 왕은 불교가 자신이 원하는 관심사를 잘 충족시켜줄 수 있다는 것을 발견했습니다. 불교의 업설은 한족에 의해 무시당하던 유목민의 ‘선출제 왕권’에 정당성을 부여해 줄 수 있었습니다. 게다가 미륵과 전륜성왕 개념은 당시 그들의 중국북방 침입과 정복을 정당화해 줄 수 있었습니다. 유목민의 왕들은 불교를 국교로 받아들이는 등 적극적으로 수용하고 그것을 미륵신앙과 함께 한국과 같은 다른 지역으로 까지 전파했습니다.
반면 한족은 불교가 유교적 사회질서에 기반을 둔 자신들의 고유한 풍속과 달랐기 때문에 불교에 반감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불교의 출가전통과 금욕수행은 가족의 혈연적 유대와 그들의 조상숭배를 위협하는 것처럼 보였습니다. 한족의 중국은 북방유목민의 침입으로 급격한 사회구조의 변화를 겪고 난 뒤에야 비로소 불교를 받아들이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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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방유목민족의 중국침입으로 한족들은 사당과 조상들의 묘가 있는 고향을 떠나 양자강 이남지역으로 이동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이러한 사회대격변 속에서 기존가치관은 현실성측면에 상당한 도전을 받게 되고 한족사회에 새로운 종교적 관념들이 들어설 수 있는 여지가 마련됐습니다. 양자강 이남의 한족이 세운 남조에서 불교는 큰 발전을 이루게 됩니다. 남북조시대가 막을 내린 수나라 통일 초기 미륵과 아미타불 신앙은 큰 갈림길에 서게 됩니다. 남조시대 변혁과 미래에 대한 기대로 각광 받았던 미륵신앙이 쇠퇴하고 아미타불 신앙이 선호 받게 됩니다. 이 이유는 크게 두 가지로 볼 수 있습니다. 첫째는 통일정권에서 정토에 항상있는 아미타불보다 이땅에 언제 올지 모르는 미래 미륵불은 정권존립에 있어 불안했기 때문이고 둘째는 통일된 이후 다시 찾게된 옛 땅에서 아미타불 신앙이 보다 조상제사 등 유교전통과 중국인이 가졌던 사후영생에 대한 관심에 아미타불 신앙이 맞았기 때문입니다.
이는 용문석굴에서의 미륵불상과 아미타불상의 연대별 개수차이로 보면 확연히 드러납니다.
중국에서 미륵신앙과 아미타불신앙은 정권과 민족적 차이로 서로 경쟁하는 체제로 자리잡습니다. 아미타불을 따르는 사람들은 서방정토는 불퇴전, 욕망이 없는 보리심세계, 청정한 곳으로 반면에 미륵불이 머무르는 도솔천은 욕계로 퇴전, 욕망이 남아 깨끗하지 못한 곳이라고 비난했습니다. 미륵불을 믿는 사람들은 도솔천에 있으면서 이땅에 내려와 법을 펼치는 미륵불이 오히려 심오하고, 맑고 청정하지면 먼 서방정토에서 법을 펴는 아미타불은 하열하다고 했습니다.
# 미륵과 아미타의 통합-노힐부득과 달달박박
한국불교는 이런 중국불교문화가 들어왔을 것으로 생각되지만, 전혀 아닙니다. 한국에는 북조 유목민족의 불교가 들어왔습니다. 이는 한반도에서 처음부터 미륵신앙이 강조됐음을 의미합니다. 북방유목민족의 왕들이 미륵신앙이 갖는 정치적 효과에 끌렸던 것처럼 한반도의 오아조들 또한 새로운 종교로 나라를 지키기를 바랬습니다. 특히 신라 화랑의 모습에서 이러한 모습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한국 사람들은 먼 미래에 올 미륵이 아니라 지금현재 이 땅에 온 미륵이 있고 바로 여기가 불국토라고 믿었습니다. 즉, 한국불교에 면면히 이어져온 것은 북방유목 불교였던 것입니다. 한국불교에서 중국한족불교가 들어오게 된 것은 조선 이후이고 선불교 이전에는 중앙아시아나 인도불교의 영향이 크게 자리했던 것입니다.
중국에서 미륵신앙이 가라앉고 아미타신앙이 떠오를때, 일본도 마찬가지로 아미타신앙이 대부분 자리하게 됩니다. 하지만 한국만은 미륵신앙이 자리하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한국에서는 당나라 때 중국 아미타불 신앙에 영향을 받아 미륵신앙과 아미타불 신앙이 혼재해 자리잡게 됩니다. 이는 삼국유사 노힐부득과 달달박박 설화에 잘 나타납니다. 노힐부득(미륵불)과 달달박박(아미타불)이 부처가 된 자리에 신라사람들은 절을 짓게 되고 미륵불과 아미타불을 함께 모시게 됩니다. 이처럼 한국불교에서는 미륵신앙과 아미타불신앙이 서로 배타적인 것이 아니라 공존하게 됩니다.
미륵의 경우 당시 한국 민간 전통에서 미래불이 가지고 있던 위상의 중요성을 보여줍니다. 한국인들이 미륵을 전적으로 수용할 수 있었던 까닭은 천상에 대한 토착적인 믿음에서도 찾을 수 있습니다. 고대 한국의 건국신화는 천제 혹은 하느님의 아들인 환웅이라는 존재가 하늘로부터 강림했다는 내용을 담고 있습니다. 이러한 설화의 골격이 재림할 부처인 미륵불과 유사하게 융합됨으로서 한ㄱ구의 불교인들은 한반도가 과거 ‘불국토’였으며 미래불인 미륵의 ‘불국토’가 될 것임을 의심치 않았습니다.
이러한 현상은 한국인의 종교적 감수성을 형성해온 ‘하늘’에 대한 깊은 믿음을 반영하고 있으며, 이것은 바로 한국불교를 중국불교와 구별시키는 특징이기도 합니다.
한국문화 발달에 영향을 미친 외래요소들을 고려할 때 중국기원에 비해 비중국적기원이 종종 평가절하 됐다는 느낌을 받습니다. 부분적으로 이는 15세기 이후 한국역사상 중대한 역할을 해온 강력한 유교전통의 잔재 때문입니다. 물론, 중국기원을 중시하는 편견은 불교학 연구 분야에서도 찾아 볼 수 있습니다.
실제로는 비중국적인 문화요소가 한국불교에 있어 큰 역할을 했습니다. 불교의 한국유입은 북방 중국의 유목민족과 한반도 사이의 문화교류의 일환이었습니다. 한국학과 한국불교를 연구하는 학계가 오로지 중국자료에 기초하고 있는 문헌적 전통에 집중하기보다는 이러한 비중국계문화와의 연관성에 보다 주목해야 할 때입니다. 중국의 틀에 메여있는 한국은 중국이 세계와 차단되면 자동적으로 세계에서 고립된 섬이 됐습니다. 이제는 중국에서 벗어나 대륙과 호흡하는 한국으로 거듭나야 합니다. 마찬가지로, 우리는 한국불교를 중국적 틀에 싸여있는 동아시아의 문화권에서 벗어나 세계 문화권속에서 재조명해야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