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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시의 세계화 불가능한 것이 아니다. 언어의 음과 시스템이 다르기 때문에 번역의 어려움을 말하게 되는 것이다. 이미 오래전 신라대의 ‘이두문자’는 한자의 우리말화가 아니라 산스크리어의 번역이었다는 사실을 생각하면 더욱 그렇다. 번역이 불가능한 것이 아니라 제 나라말로 된 시를 모르기 때문에 불가능하다고 하는 것이다. 시를 제대로 파악해야 하고 시 읽기가 번역보다 더 중요하다는 인식을 먼저 해야 한다. 시를 제대로 읽는 것에서 번역이 시도되어 한국시의 세계화를 가능케 하는 것이다.”
이어령 前 문화부 장관은 한국문학의 세계화를 위한 번역의 문제는 시대의 화두이지만 절망적이거나 불가능한 일이 아님을 강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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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 만해축전의 주요 심포지엄으로 주목받고 있는 ‘한국 현대시 100주년 기념 국제학술심포지엄’이 8월 12일 오후 2시 만해마을에서 열렸다. ‘한국 현대시 100년의 반성과 전망’을 주제로 한 첫 세미나에서 기조강연에 나선 이어령 前 문화부 장관과 김종길 고려대 명예교수는 한국문학의 세계화를 위한 번역의 문제를 얘기하며 시를 언어적 체계와 의미의 측면에서 제대로 읽는 것에서 번역의 난제들을 풀어야 한다고 강조했다. 두 학자의 기조 강연은 한국문학이 세계화라는 화두를 푸는데 매우 현실적인 구조들을 분석하며 구체적인 해법을 제시했다는 측면에서 주목받았다.
다음은 두 학자의 기조강연문 전문이다.
님의 침묵
―구조분석을 통해서 본 ‘님’과 ‘침묵’의 시적 의미― 이어령(前 문화부 장관ㆍ대한민국예술원 회원) | ||||||||||
1 님은 갔습니다. 아아, 사랑하는 나의 님은 갔습니다. 2 푸른 산빛을 깨치고 단풍나무 숲을 향하여 3 난 작은 길을 걸어서, 차마 떨치고 갔습니다. 4 황금의 꽃같이 굳고 빛나던 엣 맹세는 5 차디찬 티끌이 되어서 한숨의 미풍에 날아갔습니다. 6 날카로운 첫 키스의 추억은 7 나의운명의 지침을 돌려놓고 8 뒷걸음쳐서 사라졌습니다. 9 나는 향기로운 님의 말소리에 귀먹고, 10 꽃다운 님의 얼굴에 눈 멀었습니다. 11 사랑도 사람의 일이라, 만날 때 미리 떠날 것을 염려하고 12 경계하지 아니한 것은 아니지만, 13 이별은 뜻밖의 일이 되고 놀란 가슴은 새로운 슬픔에 터집니다. 14 그러나, 이별을 쓸데없는 눈물의 원천으로 만들고 마는 것은, 15 스스로 사랑을 깨치는 것인 줄 아는 까닭에 16 걷잡을 수 없는 슬픔의 힘을 옮겨서 17 새 희망의 정수박이에 들이부었습니다. 18 우리는 만날 때에 떠날 것을 염려하는 것과 같이 19 떠날 때에 다시 만날 것을 믿습니다. 20 아아, 님은 갔지마는 나는 님을 보내지 아니하였습니다. 21 제 곡조를 못 이기는 사랑의 노래는 님의 침묵을 휩싸고 돕니다. *번호는 분석에 필요한 표지로서 평자가 임의로 붙인 것이다. 1. 메타 언어로서의 <님의 침묵> <군말>의 시적 언술에 있어서 시의 제목이 어느 정도 관여하는가 하는 문제에 대해서 지금껏 본격적인 논의를 한 적은 거의 없었다. 시만이 아니라 회화와 음악 등 예술작품에는 반드시 제목이 붙어있기 마련이지만 그것들은 오히려 예술의 자유롭고 열려진 의미를 한정한다는 점에서 부정적인 요소로 배제되어 오기도 했다. 창작자 자신들이 <무제(無題)>라던가 혹은 이상(李箱)의 <오감도>처럼 1호(號) 2호와 같은 숫자를 달아놓은 제명들이 그 같은 본보기로 지적될 수 있다. 작품 제목을 편찬자나 그와 관계된 타자가 임의로 만든 것도 많아 작품해석의 노이즈로 작용하는 경우도 허다하다. 그러나 제목을 어떻게 달던 그리고 그 중요성을 인정하던 무시하던 텍스트 읽기에 있어서 작품 제목은 텍스트를 규정하고 있는 메타 언어로 작용하고 있다는 것은 부정할 수 없다. 가령 로뎅의 조각 “생각하는 사람”은 그것을 주조 제작한 사람이 뒤에 붙인 것이며 베토벤의 운명 역시 작곡가 자신이 단 제목이 아니다. 그런데도 일반 사람들은 두 작품을 감상하는데 있어서 작품자체보다 그 제목에 더 많은 흥미와 관심을 두고 있는 현상을 볼 수 있다. 한용운(韓龍雲)의 <님의 침묵>은 위에서 지적한 것과 같은 현상들이 가장 극명하게 들어나 있는 예 가운데 하나가 될 것이다. 더구나 그것은 독립된 시의 작품명만이 아니라 시집 전체의 표제어로 되어 있기 때문에 많은 평자(評者)와 독자(讀者)들은 <님의 침묵>을 작품 풀이의 키워드로 삼아왔던 것이 사실이다. 그리고 대부분의 경우는 그 시집 표제를 구체적인 시작(詩作)의 분석이나 총체적인 검증을 거치지 않고 “님”은 무엇을 뜻한 것인가 “침묵”은 무엇을 가리키는 상징어인가 하는 외재적 해석으로 로 단순화해온 것도 사실이다. 그 결과로 “님의 침묵”의 “님”은 조국이고 “침묵”은 나라의 상실, 즉 식민지인의 망국 한(恨)을 노래한 것이라는 고정된 틀이 만들어진다. “님의 침묵이 식민지” 상황을 의미한다는 그 간단명료한 우유적(寓諭的) 풀이는 한용운의 텍스트보다는 독립운동가로서의 한용운의 전기적 준거에서 비롯한 것이라는 점도 또한 부정할 수 없을 것이다. 그리고 님을 노래한 시를 순수한 연가(戀歌)가 아니라 사군가(思君歌)로 읽어온 한국 전통 시가의 문화적 코드에서 연유한 것이기도 하다. 그 결과로 시적 텍스트의 의미는 정치적 언술로 단일화되고 만다. 말하자면 복합기호(polysemic)가 단일기호(monosemic) 체계로 바뀌게 된다는 점이다. 이렇게 외재적 의미로 굳어진 제목의 선입견 때문에 텍스트의 의미가 빈약하게 되는 것을 경계하기 위하여 작자 자신이 그 시집머리에 서시(序詩)로 써놓은 것이 바로 “군말”이라는 시이다. 시 형태로 쓰여진 이 작자자신의 서명이 들어 있는 서문은 시 제목을 풀이한 일종의 메테 텍스트라고 할 수가 있다. <군말>의 가장 핵심적인 언술은 님에 대한 풀이, 즉 “님”이란 어휘에 대한 정의이다. 그러므로 <군말>이라는 그 서시는 “님의 침묵”이라는 시 제목과 등가적인 메타 언어라고 볼 수 있다. 무엇보다도 한용운이 한국 특유의 “님”이란 말에 대해서 관심을 갖고 있는 부분은 바로 그것이 단일기호가 아니라 다의성을 내포하고 있는 복합기호라는 사실에 대해서이다. 그러기 때문에 그는 군말 첫머리에 “ ‘님’만 님이 아니라, 기룬 것은 다 님이다.”로 시작하고 있다. 즉 괄호 속에 집어넣은 님은 일상적으로 쓰이고 있는 단일기호체계로서의 님으로서 연인(戀人)을 뜻할 때의 님인 것이다. 이 님의 고정적인 뜻을 우리가 흔히 선생님이나 햇님 달님이라고 할 때처럼 존칭 접미사로 활용하고 있는 님의 경우처럼 보다 확산된 의미 다의적인 의미로서 사용하고 있는 작자자신의 태도를 분명히 하고 있는 것이다. “기룬 것은 다 님이다.”라는 말 속의 “다”라는 말은 님의 복합성 총체성을 직접적으로 강조한 말이다. 그러나 우리가 여기에서 조심해야할 부분은 “님만 님이 아니라”라는 통사적 의미이다. “a만 a가 아니다”라는 표현은 필연적으로 “b도 a이다”라는 긍정구가 나오기 마련이다. 이런 경우 a항과 b항은 대치관계가 아니라 내포 또는 확충적인 관계를 지닌 항목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러기 때문에 당연히 앞에 나오는 a는 b까지를 포함시킨 a속에 포함되기 마련임으로 한용운이 말하는 님은 일상적인 님의 의미를 배제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것을 디딤돌로 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보다 단순하게 말하자면 <님의 침묵>이 뜻하는 전체 시의 시적 언술은 연시(戀詩)로서의 의미도 배제하지 않고 있다는 점이다. 님의 여러 가지 목소리, 이른바 다성적(多聲的) 텍스트의 층위가운데는 연인으로서의 님도 중요한 갈래를 이루고 있으며 어느 의미에서는 그 시의 출발점이 되는 구조를 이루는 목소리라고 할 수 있다. 더 정확하게 말하자면 일상적 의미로서의 님과 한용운의 메타언어로서의 님의 차이 속에 바로 그 시의 진정한 시적 언술이 전개하고 있다는 점이다. <님의 침묵>이 조국상실의 식민지 상황을 노래한 애국시라고 말하는 사람이나 혹은 “사랑의 시란 형식을 빌린 증도가(證道歌)”라고 말하는 사람은 그 해석의 차이에 엄청난 거리가 있으면서도 님의 일차적 의미를 텍스트에서 제거해 버리고 오로지 정치적 또는 불교적 단일 층위에서만 읽고 있다는 시각에서는 구별되지 않는다. 한용운이 <군말>에서 새롭게 정의한 “님”을(“기룬 것은 다 님이다”) 괄호 안에 넣은 “님”(“ ‘님’만 님이 아니라”)의 대치어로 읽을 때 한용운의 다성적 텍스트는 단일한 목소리의 정치적 텍스트 혹은 종교적 텍스트로 번질 되고 만다. 님의 여러 가지 층위가 한데 어울리고 그 모순들이 하나의 해체 갈등 통합으로 창조되어 가는 과정 속에 만해 시의 시적 언술의 특성이 있다는 것은 “군말”에 나타난 “님”의 층위를 분석해 보면 쉽게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님의 의미론적 계층 <님의 침묵>의 그 님이란 말이 정치 또는 종교적 의미만을 지니고 있지 않다는 것은 만해 자신이 분명히 밝히고 있는 것이다. <군말>은 직접 제시되어 있는 님의 층위가 네게, 그리고 간접 또는 암시적으로 나타나 있는 것이 두 개이다. 우선 직접적으로 진술되어 있는 층위로서는 “중생이 석가의 님이라면, 철학은 칸트의 님이다. 장미화의 님이 봄비라면 마시니의 님은 이태리(伊太利)다.”라는 구절이다. 두말 할 것없이 석가의 님은 종교적 층위 칸트의 님은 사상(철학)적 층위 장미화(薔薇花)의 님은 자연적 층위이다. 그리고 마지막의 마시니의 님은 이태리로서 정치적 층위이다. 그리고 연애가 자유라면 님도 자유일 것이다. “……너에게도 님이 있느냐 있다면 님이 아니라 너의 그림자니라.”에서는 성애(性愛), 연애의 층위 그리고 마지막에 “길 잃은 양을 기루어서 이 시를 쓴다.”에서는 시인의 님이라는 문학적 층위가 암시되어 있다. 이상의 님의 층위를 요약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① 종교적 층위 : 석가의 님 → 중생 ② 사상적 층위 : 칸트의 님 → 철학 ③ 자연적 층위 : 장미화의 님 → 봄비 ④ 정치적 층위 : 마시니의 님 → 이태리 ⑤ 연애의 층위 : 일상적인간의 님 → 연인 ⑥ 시적 층위 : 시인의 님 → 독자(길 잃은 양) 여기에서 괄호 안의 님은 5번이고 나머지는 “기룬 것”을 대상으로 한 만해의 메타언어인 님이다. 그러나 자세히 보면 5번만이 아니라 전 층위에서 그림자로서의 님(일상적 층위로서의 임)과 진정한 님의 패러다임을 만들어 낼 수가 있다. 뿐만이 아니라 각 층위마다 모순관계가 일어날 수가 있다. 낙랑공주의 경우처럼 정치적 층위(조국에 대한 애국심)와 사랑의 층위(왕자 호동에 대한 사랑)의 모순과 갈등은 흔히 있는 일이다. 세속적인 사랑만이 아니라 그러한 부조화는 종교와 정치, 사상과 종교 사이에서도 얼마든지 일어날 수가 있다. 가장 잘 알려져 있는 갈릴레오의 경우를 두고 생각해보면 금시 이해가 갈 것이다. 만해가 계층간의 그러한 갈등이나 마찰 모순 등을 피하려 하였을 때에는 이 여섯까지 층위에서 하나를 선택하고 다른 층위의 목소리는 잡음으로 처리해버릴 수밖에는 없다. 그랬더라면 아마도 님의 침묵은 볼교의 증도가(기독교의 경우라면 구약의 아가(雅歌))가 되었을 것이고 기미 독립선언문과 같은 글이 되었을 것이다. 독립운동가이며 스님이며 시인이며 한 여인을 사랑한 남자 그리고 자연의 생태계의 일원으로서 살아가는 생명체로서의 만해를 하나로 통합할 수 있었던 것이 바로 님이라는 다의어이며 그 님을 찾는 시 쓰기였다는 것을 도식적일 정도로 명료하게 보여주고 있는 것이 바로 그 <군말>의 언술이다. 비단 님의 의미론적 계층만이 아니라 실질적으로 군말에는 불교적인 동양적 이미지와 기독교적인 서구적인 상징체계가 각기 서로 혼합되어 있는 것을 목격할 수 있다. 불교적인 이미지보다는 오히려 서구적 기독교 사회의 이미지가 더욱 우세하기까지 하다. 칸트, 마시니 등 서양인물 만이 아니라 연꽃이 아니라 “장미화” 그리고 “길 잃은 양”은 전형적인 기독교적 문화의 상징물이다. <님의 침묵>이 송욱 씨를 비롯 불교적 언술이라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옳은 것이라면 장미화는 연꽃으로 길 잃은 양은 신우장이라는 만해 자신의 옥호처럼 소와 관련을 맺은 상징물로 바뀌었을 것이다. 구체적인 사물어 만이 아니라 추상어 계열에 있어서도 “연애” “자유” “구속”등의 말은 서구문명에 뿌리를 둔 개념어로서 개화기에 번역어로서 사용되기 시작한 것들이다. 우리가 관심을 갖는 것은 오히려 불교의 승려로서 독립운동가로서 일관하여 생활 해온 만해가 어떻게 불교적 언술이나 정치적 언술과 다른 시적언술을 사용하였는가. 하는데 있다. 그리고 그러한 언술의 차이에서 우리는 시인으로서의 만해가 종교가 독립운동가와 차이화할 수 있는 어떤 특성을 지니고 있는지 밝혀내는 일이다. <님의 침묵>을 정치적 언술이나 불교적 언술로 환원한다는 것은 만해가 애써 발견하고 창조한 그의 시적 언술을 부정하고 외면하는 결과를 낳게 된다. 종교․사상․정치․자연․사랑․시의 여섯까지 층위를 “님”이라는 한마디의 말 인간이 “기리워하는 것”의 대상 속에 혼유 융합시키려고 한 만해의 통합적 언술은 각 층위마다 고정 개념을 해체시키고 있는 선(禪)적 깨달음의 방식과 관련되어 있다고 볼 수 있다. 그러나 그 선적인 것 자체가 그의 언술 속에서는 많은 목소리 가운데의 하나라는 사실도 인정해야 한다. 자유라는 이름 속에 들어 있는 구속의 의미를 발견하고 또 그와는 정반대로 구속이라는 말속에 숨어있는 진정한 자유의 의미를 끌어내는 만해의 작업은 언어의 고정된 코드 자체를 끝없이 해체하고 탈 구축 해가는 과정을 보여주고 있다. 그것이 곧 새로운 기호를 생성해가는 만해의 의미작용이 종교나 정치의 단일 코드에 얽매어 있지 않다는 것을 입증한다. 구국의 소리나 구도의 언어는 궁극적으로는 피시스(physis)와 대립하는 노모스(nomos)에 속해 있는 것이다. 그러나 기호의 세계(semiosis)는 항상 노모스와 피시스의 그 중간에 유동하고 있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과연 만해가 종교가나 독립운동가와는 다른 기호 생성자로서 평가할 수 있는 것인지 우리는 직접 <님의 침묵>과 같든 개별 텍스트의 분석을 통해 확인할 수 있을 것이다. 2. 침묵과 노래의 상관관계 침묵과 이별―<님의 침묵>의 구조 분석 군말이 님이라는 말을 정의한 메타 언어라고 한다면 시집의 표제어가 된 님의 침묵은 침묵이란 무엇인가 하는 침묵의 뜻에 대한 메타언어라고 할 수가 있다. 그러므로 <군말>과 함께 <님의 침묵>은 시집제목과 마찬가지로 전 시작품에 대한 메타 시의 구실을 하고 있다. 그리고 <군말>에서 님이란 말에 대한 여러 층위가 패러디그마틱한 공간축으로 구성되어 있는데 비해서 <님의 침묵>은 신테그마틱한 시간축으로 전개되고 있다. 그러므로 앞에서 본대로 <군말>에 나타난 님은 종교․정치․사상․시와 같은 영역별로 나타난 기리운 것의 대상이 병렬적으로 등장하고 있지만 <님의 침묵>에서는 만남(과거)․이별(현재), 그리고 침묵(미래)의 시간적 변화에 의해서 님의 의미, 즉 나와 님의 관계가 각기 달리지는 서술적 양상을 띄우고 있다. 그러기 때문에 <님의 침묵>의 시적 언술은 소설이나 연극의 경우처럼 시간축을 타고 전개되고 있으며 각 시행들이 분명한 시간적 순차성을 보이고 있다는 사실을 발견하게 된다. 그 시행(詩行)들은 거의 모두가 하나의 서술어로 구성되고 있으며 그 서술어들은 시간적 계기성을 나타낸다. ① (님은) 갔습니다. → ② 떨치고 갔습니다. → ③(옛맹세)날아 갔습니다 → ④(추억은) 사라졌습니다. → ⑤(님의 말소리)에 귀먹고 눈멀었습니다. → ⑥ (이별) 슬픔에 터집니다. → ⑦(슬픔) 희망의 정수박에 드러부었습니다. → ⑧(이별과 만남)믿습니다. → ⑨ (님을) 보내지 아니하였습니다. → ⑩(사랑의 노래) 침묵을 휩싸고 듭니다. 이 도표에서 시간적 구조에 의해서 극명하게 대조를 이루고 있는 부분들을 추려보면 첫째 서술어가 과거형으로부터 현재형으로 옮겨가고 있다는 점이다. 첫행의 ①은 “갔습니다”이지만 마지막행인 ⑩은 “휩싸고 듭니다”로 현재형이다. 둘째로 “님은 갔습니다”로 처음에는 님이 서술어의 동작주(주격)이지만 중간에는 나와 님 그리고 마지막에는 내 자신이 동작주로 바뀌는 것이다. 이 시를 첫 행과 끝 행만을 놓고 비교 해보면 “님은 갔습니다”와 “나는 노래를 부릅니다.”로 되어 있다. 이 같은 동작주의 변화와 그 바뀜은 화자의 수동성이 능동성으로 변하는 과정을 나타내는 것이라고 풀이할 수가 있다. 셋째로 처음의 만남은 님의 “맹세”③로 시작되고 끝의 별리는 님의 “침묵”⑩으로 되어 있다는 점이다. 그리고 동시에 나의 경우에는 “향기” (후각) “귀먹고”(청각) “눈 멀었습니다”(시각적)으로 감각을 나타내는 신체어로 되어 있으나 마지막에 오면 슬픔의 눈물을 “정수박”이에 들어부었다고 되어 있다. 두말 할 것 없이 정수박은 신체에서 가장 높은 위치의 정점에 있는 뇌가 있는 부분으로 수직적이며 사변적인 것이다. 관능적인 육체의 언어가 정신적인 언어로 전환해 있음을 알 수 있다. 무엇보다도 이 시가 시간적인 분절과 그 대립 항에 의해서 침묵이라는 말 그리고 그 행동이 무엇인가를 명확하게 보여주고 있는 것은 만남이 이별로 맹세가 침묵으로 바뀌는 의미론적 전향이며 그것을 다시 뒤집어 침묵이 노래로 바뀌는 그 역설적인 인과율인 것이다. 그러기 때문에 만해 시의 열쇠말을 이루고 있는 메타언어인 “침묵”은 바로 만남의 축을 대표하는 “맹세” (옛 맹세로서 과거)와 이별의 축을 상징하는 침묵 (현재) 그리고 미래의 희망(창조)축을 보여주는 “노래”의 삼항 대립구조의 텍스트에 의해서 해독된다. 그리고 그 침묵의 해독장치로서 우리는 “맹세”와 “노래”의 양극적 의미와 그 사이에 매개 항으로 작용하고 있는 “침묵”의 역설적 의미작용을 제시할 수 있다. 행동으로는 “만남” “이별” “기다림”(희망), 감정으로는 “기쁨” “슬픔” “희망”, 의미구조로는 “맹세” “침묵” “노래”, 그리고 그것을 모두 포함하는 시간적 축으로는 과거(시작) 현재(전개) 미래(종결)의 서사적 삼항 대립 구조로 구성되어 있는 것이 다름 아닌 <님의 침묵>을 떠받치고 있는 기둥이다. “황금의 꽃”의 이중적 의미 그와 같은 분절과 단위 그리고 그 연쇄를 최종적으로 정리하면 그 시행들은 다음과 같은 순서로 배열할 수 있다. 만남과 맹세 ⑤ → ④ → ③ → 이별과 슬픔 ② → ⓛ → ⑥ → 침묵과 노래 ⑦ → ⑧ → ⑨ → ⑩ 5행의 “나는 향기로운 님의 말소리에 귀 먹고 꽃다운 님의 얼굴에 눈멀었습니다.”는 님을 처음 만났을 때의 묘사로서 이 시의 첫 행인 “님은 갔습니다”에 앞서 벌어진 상황이라는 것은 췌언할 필요가 없다. 우리가 이 만남의 시행에서 주목해야 할 것은 님은 꽃으로 수식되어 님의 말소리는 향기 그리고 얼굴은 꽃으로 그려져 있다. 언뜻 생각하면 사랑하는 님을 꽃으로 비유하는 것은 정형구로서 그 비유자체는 조금도 신기할 것이 없는 수사법이다. 그러나 그것을 시간의 인과성 즉 그 시간 구조와 그 분절의 변별성을 통한 과정과 변화를 보면 아주 정교한 장치가 숨어 있음을 발견하게 된다 .왜냐하면 님의 말소리를 향기에 비한 것은 필연적으로 그 말소리가 사랑의 맹세로 귀결 될 것이고 그 향기는 바로 황금의 꽃으로 발전된다. “황금의 꽃”이라는 그 광물질로서의 이미지는 바로 5행의 말소리에 대한 반응으로 귀가 먹고 눈이 먼다는 선행하는 이미지에 의해 강화된다. 바슈라르가 제시하고 있는 “메듀사 컴플렉스”의 경우 처럼 사랑으로 인한 석화작용(望夫石의 경우도 같다)은 날카로운 첫 키쓰라는 광능적인 언어에서도 읽을 수가 있다. 키스를 달콤한 부드러움으로 형용되는 것과 달리 날카롭다고 한 것은 바로 키스를 (가장 가까운 만남의 양식)칼질과도 같은 광물적 특성을 함유하고 있음을 암시한다. 그 “황금의 꽃”(맹세)는 한숨의 미풍에 날려 티끌처럼 날아간다. 즉 꽃향기로 수식되는 님의 말소리는 황금의 꽃이 되지만 그 광물질 견고함은 티끌로 꽃향기는 꽃을 지게 하는 바람의 이미지로 변화한다. 뿐만이 아니라 이 꽃의 은유 코드는 만남과 떠남의 대립 항을 더욱 강화하는 장치로소 2행의 단풍나무숲과 연계된다. 만남의 님은 봄으로 떠나는 님의 계절은 가을로서(“단풍나무숲을 향하여 난 적은 길을 걸어서”)물질적 비유 속에 시간의 유전과 계절의 순환성을 담고 있는 것이다. 이 시의 구조가 군말의 경우와는 대조적으로 공간적인 것이 아니라 꽃(봄)과 단풍(가을)로 이어지는 시간적인 서술적 구조로 형성되어 있다는 것을 무어보다도 극적으로 보여주고 있는 것이 만남과 이별이라는 인과율의 고리를 자르는 7행의 첫머리에 나오는 “그러나”라는 접속사이다. 이 시 전체를 통해서 그러나로 이어지는 시행은 7행 하나 밖에 없다. 마치 논술적 언술에 나타나는 것과 같은 “그러나”가 이 시의 구조에 결정적으로 간여하게 되는 것은 침묵과 노래의 출현을 마련하는 전기가 되어 주고 있다는 점에서 이다. 7행 바로 앞 6행은 “새로운 슬픔에 터집니다.”로 끝을 맺고 있다. 하지만 이 “새로운 슬픔”은 “그러나”로 시작되는 7행에서 이별의 슬픈 눈물이 새 희망의 정수박이에 퍼붓는 생명의 물로 전환된다. 꽃의 식물적 세계가 황금과 티끌의 광물적 세계를 걸쳐서 마지막 종결부에서는 액체의 이미지로 변화한다. 그리고 물의 순환적 이미지는 시간의 순환성과 결합한다. 만남과 사랑의 맹세는 이별을 가져왔지만 이번에는 그 이별과 침묵이 사랑의 노래를 낳게 한다. 님을 처음 만났을 때는 (5행)오히려 눈 멀고 귀 먹는 수동성 맹목성이 지배하고 있었지만 8행에서는 “님은 갔지마는 나는 님을 보내지 아니 하얐습니다.” 로 바뀌어 있다. 나의 태도만이 아니라 긍정에서 부정으로 이행헤기단 모든 의미와 행동의 줄기는 부정에서 긍정으로 옮아간다. 일정한 인과성을 갖는 선형적(線形的) 언술의 세계에서는 종말론처럼 끝이 있기 마련이지만 순환적 언술은 끝이 새로운 시작으로이어진다. 빛이 어둠이 되고 어둠이 다시 빛이 되는 하루의 순환 또는 봄과 가을과 같은 게절의 변화처럼 만남은 이별이 되고 이별은 다시 새로움 만남 (사랑의 노래)으로 바뀐다. 그것이 거의 직절적으로 이별과 만남의 순환성을 진술하고 있는 것이 8행의 “우리는 만날 때에 떠날 것을 염려하는 것과 같이, 떠날 때 떄에 다시 만날 것을 믿습니다. 슬픔이 믿음으로 바뀌고 믿음이 사랑의 노래로 바뀌게 하는 것 그것이 바로 님의 ”침묵“이다. 그 침묵이 없으면 노래는 탄생되지 않는다. 그리고 그 노래는 마지막 10행에서 밝혀져 있는 대로 ”제곡조를 못이기는“것으로 우물물처럼 절로 솟아오르는 자연발생적으로 흘러나오는 것이다. 불가에서 말하는 색즉시공 공즉시색(色卽是空 空卽是色)이 이시에서는 만남이 이별이요 이별이 곧 만남이라는 패러독스로 해석될 수가 있다. 그러나 만해의 “침묵”은 밤의 어둠을 새벽의 빛으로 바꿔놓는 지구의 자전(自轉)과도 같이 슬픔이 노래가 되게 하는 그 “뒤엎기”의 힘이 된다. 기호론적으로 풀이하면 침묵은 기호의 해체이며 재생산이라고 할 수가 있다. 이 시에서 쓰인 어휘 층위(LEXICAL LEVEL)를 알기 쉽게 도표로 요약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狀況과 主體 氣體 物體 身體 말(記號) 結果 만남(님과 나) 향기로운 말소리 황금의 꽃 눈 귀 가슴 얼굴 맹세 슬픔의 눈물 이별(나와 님) 한숨의 微風 티끌 정수리(정수박) 沈黙 사랑의 노래 기호의 해체와 형성 작업 <군말>의 메타 텍스트가 모든 기호의 단일성을 복합성으로 바꿔놓는 기능을 갖고 있는 것이라면 <님의 침묵>의 메타 텍스트는 모든 기호의 의미를 해체하는 탈코드화 그리고 그 과정을 걸쳐 나타나는 기호생성의 작용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일상적인 말[記號]의 의미는 바로 님의 말소리인 “맹세”이고 그 기호를 뛰어넘는 것은 맹세가 티끌이 되어버리게 한 이별, 즉 의미를 무(無)로 돌리게 하는 “침묵(沈黙)”이다. 그리고 그 “침묵”속에서 새롭게 태어나는 기호생성이 사랑의 “노래”, 즉 시(詩)인 것이다. <님의 침묵>에서 로고스, 즉 음성중심 기호만을 추려 그 생성과정을 시에 나타난 어휘를 그대로 선택해 이어놓으면 그대로 기호의 해체와 그 생성과정을 일목요연하게 볼 수 있다. 말소리→맹세→황금의 꽃→한숨→티끌→침묵→노래. 말하자면 기호론적 축으로 보면 님은 “말”의 기호가 “노래”(시)의 기호로 전이되어가는 과정을 나타낸 시라고 할 수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침묵”을 문학적 차원에서 보면 “시란 무엇인가”하는 시론(詩論) 더 정확하게 말하자면 일상적인 언술과 구별되는 시적언술의 근거를 밝히는 메타 詩가 된다. 그리고 그것을 기호론적 영역에서 보면 바로 침묵은 기호가 죽어버린 공간이고 동시에 새로운 기호가 생성하는 극적인 시간인 것이다. 소리(시니피앙)와 의미(시니피에)가 황금의 꽃처럼 굳게 맺어 있는 것 같은 “맹세의 기호체계”를 침묵을 에워싸고 스스로 흘러나오는 “사랑의 노래”의 기호체계로 바꾸는 작업이 시집 《님의 침묵》 속에 담겨 있는 88편의 시라고 할 수 있다. “ …… 선생의 문학을 일관하는 정신이 또한 민족과 불(佛)을 일반화한 ‘님’에의 가엷는 사모였기 때문이다.”라고 평한 조지훈(趙芝薰) 씨의 만해론(萬海論)에서는 그 “일관하는 정신”이 바로 민족과 불(佛)의 (정치와 종교)일체화로 되어 있다. 말하자면 정치적 언술과 종교적 언술을 하나가 되게 하는 것이 한용운의 시라는 이야기가 된다. 그러나 님의 침묵에서 보여주고 있는 그의 작업은 이미 <군말>과 <님의 침묵>의 두 편의 메타 시에서 보았듯이 민족과 불 못지않게 말이라고 하는 기호의 세계가 그 대상으로 되어 있다는 점을 우리는 확인하게 된다. 이 기호의 해체작업과 생성작업은 민족 운동가로서의 한용운과 깨달음을 추구하는 불자로서의 한용운과 함께 시인으로서의 한용운의 독자적인 존재이유를 부여한다. 이상에서 밝힌 대로 <군말>과 시집의 표제어가 된 <님의 침묵>의 두 시는 만해의 개개 시작품의 보다 상위에 있는 메타 시와 같은 작용을 하고 있는 것이며 이 두 편의 시가 반복하면서 변형과 차이를 일으키는 무수한 텍스트를 생성해 가는 것이 만해의 기호생성이라고 할 수가 있다. 이런 시점에서 보면 당연히 “님”과 “나”의 관계, 그리고 침묵과 노래의 관계 더 구체적으로 말하자면 만남 맹세 이별의 축과 이별 침묵 노래의 축이 만해의 시속에 어떤 말로 변형되어 어떤 구조로 투사되었는지를 밝히는 일에 관심이 집중될 수밖에 없다. 즉 반복 구조와 그 차이를 통해서 생성되어 가는 만해의 기호와 언술의 특성이라고 할 수 있다. 가령 <님의 침묵> 뒤에 나오는 <이별은 미(美)의 창조(創造)>라는 시를 앞의 텍스트와 직접적으로 연관되어 있는 반복 형태를 금시 알 수가 있다. 님의 침묵을 산문적인 언술로 요약하면 “님과의 이별이 도리어 아름다운 사랑의 노래를 낳았다”는 뜻이 될 것이다. 바로 그것을 시로 옮긴 듯한 텍스트가 <이별은 미의 창조>라는 시이다. 이 시에서 미(美)라는 말은 님의 침묵의 “노래”란 말과 구조적으로 등가물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리고 노래를 낳은 이별 그리고 그 침묵은 이 시에서 보다 명료하게 들어 나있다. 이별이 희망과 사랑의 노래를 낳은 것처럼 이 시에서는 이별이 미를 창조하는 힘이 된다. 즉 노래[詩]가 더욱 추상적이고 포괄적인 미(美)라는 말로 대치되어 있는 것이다. 그리고 노래가 휩싸고 도는 침묵은 아침 밤 그리고 하늘의 비유로 바뀌어져 있다. 즉 “아침의 바탕 없는 황금과 밤의 올 없는 검은 비단과 주검 없는 영원의 생명과 시들지 않는 하늘의 푸른 곳”에는 이별의 미는 생기지 않는다. 노래를 낳은 장소가 침묵이듯이 미를 낳은 그 공간은 낯[빛]과 밤[어둠] 그리고 하늘[영원한 생]과 땅[죽음]의 그 어느 한쪽이 아니라 그 대립항이 경계를 잃고 하나로 이어져 있는 곳, 즉 “눈물의 죽음이 웃음의 생이 되는” 곳이다. 기호론적으로 말하자면 이별이 미가 되는 것은 모노세믹[아침의 바탕 없는 황금, 밤의 올 없는 검은 비단, 그리고 주검 없는 영원의 생명과 시들지 않는 하늘의 푸른 곳]이 아니라 폴리세믹의 영역에서만 가능하다. 즉 아침의 빛과 밤의 어둠이 동시에 있는 곳 하늘의 영원한 빛과 땅의 주검이 함께 있는 양의적․다의적 공간인 것이다. 폴리세믹의 기호체계는 시니피앙과 시니피에가 일대일의 관계를 갖고 있지 않으며 동시에 대립항이나 변별성이 그 경계상실의 양성구유적인 상태를 뜻한다. 말하자면 기호 자체의 침묵 상태로 들어간 상태라고 할 수 있다. 결합축에 속하는 형태적 구조를 보아도 마찬가지다. 이미 앞에서 본 것처럼 <님의 침묵> 첫 행의 동작주(ACTANT) “님”은 마지막 행에 이르면 “나”로 변해 있었던 것처럼 이 시에서도 역시 첫 행의 동작주 “이별”은 끝 행에 와서 “미(美)”로 바뀌어져 있다. 1행 “이별은 미의 창조입니다.” 4행 “미는 이별의 창조입니다.” 이와 같이 같은 형태의 문장에서 창조의 주체와 객체 즉 조물과 피조물의 관계가 뒤집혀 있는 것이다. 이것은 꼭 “어머니가 아이를 낳았다.”라는 문장이 “아이가 어머니를 낳았다.”와 같은 불가역적(不可逆的)인 인광류(因果律)로 전도된 형태와 같은 것이다. 그러나 한용운의 시에서는, 즉 님의 침묵의 기호체계에서는 그러한 주체와 객체간의 도착이 자연스럽게 이루어진다. <군말>의 경우를 보면 알 수가 있다. 보통의 상식과는 달리 석가는 중생의 님이 아니라 거꾸로 중생이 석가의 님으로 되어 있다. 차이나 대립이 무너지면 기호체계 전체가 파괴된다. 만해는 님이라는 말 침묵이라는 말의 통념적 기호체계를 무너뜨리는 수사법, 즉 탈코드화는 모순 어법, 역설, 대치 그리고 문장 형태의 도착 등을 통해서 새로운 기호체계를 생성한다. 그러기 때문에 이별이 미를 창조한다는 명제가 시의 진행과정을 통해서 결국은 미가 이별의 창조자로 바뀌는 역류현상을 빚듯이 가치의 문제에 있어서도 부정이 긍정으로 긍정이 부정으로 역전되는 수가 많다. 한용운에 있어서 침묵이라는 말은 부정이 아니라 긍정의 언어, 부재와 결여가 아니라 창조의 근원적인 힘으로 되어 있다. 침묵을 통해서 비로소 사랑이나 만남은 완전해지고 님은 참된 님으로 변신하는 것이다. 침묵을 통과하지 않는 것은 맹세와 마찬가지로 티끌에 지나지 않은 것이고 그 님은 그림자와도 같은 가상에 지나지 않는다. 이런 이유에서 한용운의 시를 일상적 언어 코드로 읽거나 단일 기호체계로 풀이하면 엉뚱한 시로 변질 되고 그 메시지도 바뀌고 만다. 님의 침묵을 일제에 강점된 조국이라고 읽어버린다면 한용운은 일제의 한국 침략을 오히려 미화하고 찬미한 것이 된다. 왜냐하면 앞에서 상세히 검토한 것처럼 한용운은 침묵을 필요한 것 창조의 원천으로 보고 그것에 긍정적 가치를 부여하고 있기 때문인 것이다. 논리적으로 보나 시적 상징으로 보나 시의 복합적 언술을 정치적 단일의 언술로 보았을 때 얼마나 시 자체가 파괴되고 그 뜻이 빈약해지고 정 반대의 의미로 왜곡되는 지를 우리는 이상과 같은 한용운의 텍스트 분석을 통해서 쉽게 증명할 수 있다. |
한국시의 세계화와 번역 문제
김종길(고려대 명예교수) | ||||||||||
저는 정확히 1년 전 바로 이 자리에서 한국시인협회가 “세계화시대에 있어서의 동아시아의 역할”이라는 주제로 개최한 2007 동아시아 시인 포럼에서 기조강연을 했는데 이번에는 “한국시의 세계화와 번역 문제”라는 주제로 만해학술원이 주관하는 이 국제학술심포지엄에서 발표를 맡게 되었습니다. 한국 현대시 100주년을 기념하고 축하하는 이 두 행사의 주제에는 다 같이 ‘세계화’라는 말이 보이는데 이 사실은 한국 시단에서도 근년 이 말이 하나의 유행어가 되어 있고 당대의 한국 시인들에게 세계화의 문제가 절실한 관심사가 되어 있다는 인상을 줍니다. 그러나 우리가 그때나 지금이나 그 말로 뜻하려는 것은 제가 작년에 지적했듯이 경제나 국제 정치, 더 나아가 미국의 패권 같은 것과는 아무런 관련이 없이 다만 ‘세계화하다(globalize)’라는 동사가 뜻하는 ‘국제적인 영향이나 작용을 가능케 하도록 전개시키거나 전개되다’(《신 옥스퍼드 미국어사전(New Oxford American Dictionary)》, 2001)라는 함의를 가진 ‘국제화’에 불과합니다. 이러한 뜻에서 한국의 시가 국제화된 최초의 중요한 선례로서 우리는 당나라 말기에 중국에 유학한 뒤 그 나라의 과거에 급제하여 그 나라에서 관리 노릇을 한 신라 말기의 최치원(崔致遠, 857-?)을 들어야 할 것입니다. 최치원보다 앞서 중국에 가서 거기서 시명(詩名)을 떨친 한국인으로는 6세기경의 고구려의 승려 정법사(定法師)와 신라의 왕자로서 중국에서 포교(布敎)한 김지장(金地藏, 705-803)과 같은 불교 승려들과 신라 헌덕왕(憲德王) 7년(815 A.D.)에 입당한 김입지(金立之)와 9세기 중엽에 신라와 당나라를 왕래한 김가기(金可紀, ?-859)와 같은 시인들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이 남긴 작품들은 우선 양적으로도 최치원의 그것과는 비교가 되지 않습니다. 그러니 최치원의 작품들이 앞에서 든 몇몇 시인들과는 달리 청나라의 강희제(康熙帝)의 재위연간(1662-1722)에 편찬된 방대한 《전당시(全唐詩)》에 수록되지 못하고 일본에서 간행된 《전당시일(全唐詩逸)》에 칠언절구(七言絶句) 한 수와 칠언연구(七言聯句) 일곱 개가 수록된 것은 아이러니컬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이들 옛 시인들의 시는 당대(唐代)의 중국 시인들이 쓰던 시와 매재와 형태 및 양식에 있어서 동일한 한시(漢詩)였습니다. 그러니 엄밀한 의미에 있어서의 한국시는 아니었지요. 그러므로 앞에서 본 바와 같은 그것의 국제화는 그것의 본고장에 그것을 역수출 내지는 귀속시키는 일에 불과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이 점에 있어서는 우리가 여기서 주로 논의하기로 하는 현대 한국시의 세계화 내지 국제화 또한 한편으로는 비슷한 느낌이 없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한국 현대시도 한국어라는 매재가 다를 뿐 형태와 양식은 원래 서구의 그것들을 채택했기 때문입니다. 보다 더 정확히 말하면 현재 한국시의 형태와 양식은 압도적으로 자유시 내지 산문시의 그것들입니다. 그러나 한국 현대시는 현대 한국어로 쓰여졌으므로 그것을 국제화하기 위해서는 외국어로 번역되어야만 합니다. 따라서 우리가 이 자리에서 다루는 ‘한국시의 세계화와 번역 문제’라는 주제는 동어반복처럼 들리기도 하지만 시의 국제화에 있어서의 번역의 불가피성을 강조하고 그것을 기술적으로 고찰하려는 의도가 내포되어 있는 것으로 생각됩니다. 그러나 시 번역의 기술적 고찰에 앞서 우리는 그간 한국시 내지 한국 현대시의 외국어 번역이 언제부터 어떻게 이루어져 왔는가를 잠시 살펴볼 필요가 있습니다. 이때까지 한국시가 가장 많이 번역된 외국어인 영어로 한국시가 번역, 출판된 경우를 주로하여 말씀드린다면 제가 알기로는 1935년 일본 고오베(神戶)에서 출판된 조운 그릭스비(Joan Grigsby) 역편의 《The Orchid Door: Ancient Korean Poems(난초의 문: 고대 한국시)》가 그 단초(端初)입니다. 그러나 이 번역 시집을 본 적이 없는 저로서는 그 자세한 내용은 알 길이 없고 다만 그것이 시조를 번역한 것이 아닌가 추측할 뿐입니다. 그 뒤 국내외에서 영역된 한국시가 사화집 형식으로 출판되기 시작한 것은 1960년부터입니다. 즉 1960년에는 런던의 존 머레이(John Murray)사에서 128면으로 된 현웅(玄雄) 씨 역편의 《Voices of the Dawn(새벽의 소리)》가 출판되었는데 거기에는 향가 5편, 신라 및 고려의 한시 4편, 고려가요 4편, 조선의 시조, 가곡 및 한시 40편, 그리고 현대시 18편이 수록되어 있습니다. 그 다음의 영역 한국시 사화집은 1961년 8월에 국내에서 출판되었는데 한국시인협회가 대한공론사에서 낸 《Korean Verses(한국 시편)》이 그것입니다. 그때 그것을 편찬하고 제작하는 실무는 제가 맡게 되었는데 그것은 그때 벨기에의 크노케에서 열리는 세계시인회의에 참가하는 한국 대표가 각국 대표들에게 나누어주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거기에는 여섯 사람의 한국인 역자가 번역한 43명의 시인이 쓴 58편의 현대시와 두 사람의 역자가 번역한 두 편의 향가, 한 편의 고려가사 및 20편의 시조가 수록되어 있는데 고 이인수(李仁秀) 교수가 번역한 16편의 현대시와 리처드 러트(Richard Rutt) 주교가 번역한 향가, 고려가사 및 13편의 시조가 특히 눈길을 끕니다. 이 영역 사화집은 1970년 7월 서울에서 개최된 국제 PEN대회에 맞추어 Poems from Modern Korea이라는 제목으로 수정, 재판되었는데 초판본의 고시가 및 시조와 함께 15편의 현대시를 빼고 근 30편의 현대시를 새로 첨가하여 도합 69편의 현대시만을 수록한 현대시 사화집이 그것입니다. 그리고 1964년에는 뉴욕의 존 데이(John Day)사에서 이학수(李鶴洙) 교수가 역편한 《An Anthology of Korean Poetry(한국시 사화집)》이 출판되고 1970년에는 아이오와대학 출판부에서 고원(高遠) 교수 역편의 《Contemporary Korean Poetry(한국 현대시)》가 나왔습니다. 러트 주교의 시조 번역집 《The Bamboo Grove(대숲)》이 캘리포니아대학 출판부에서 출판된 것은 그 다음해였습니다. 그러나 《The Grass Roof(초당)》의 저자인 강용흘(姜鏞訖)과 그의 미국인 부인 프랜씨스 킬리(Frances Keely)가 공역한 한용운(韓龍雲)의 《Meditatons of the Lover(님의 침묵)》이 1970년에 연세대학 출판부에서 나온 예외가 있지만 한국 현대 시인들의 단독 시집이나 시선집이 영역으로 출판되기 시작한 것은 1990년을 전후해서입니다. 1989년에는 한국에서 교편을 잡거나 공부를 하는 두 사람의 미국인들이 번역한 윤동주(尹東柱)의 《Heaven, the Wind, Stars and Poetry(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가 서울에서, 그리고 데이비드 맥캔(David R. McCann) 교수가 번역한 《Selected Poems of Sŏ Chŏngju(서정주(徐廷柱) 시선)》이 뉴욕에서 출판되었고, 1990년에는 김우창(金禹昌) 교수가 번역한 《Selected Poems of Pak Mogwol(박목월(朴木月) 시선)》이 버클리에서, 그리고 앤토니 수사(Brother Anthony)가 번역한 구상(具常)의 《Wasteland Poems(초토(焦土))》가 런던에서 출판되었습니다. 그 밖에 1990년대에는 1991년에 김광규(金光圭)의 《Faint Shadow of Love(희미한 사랑의 그림자)》와 구상의 《A Korean Century(한국의 세기)》가 앤토니 수사의 번역으로 런던에서 출판된 것을 비롯하여 1993년에는 서정주, 고은(高銀), 김남조(金南祚)의 시가, 그리고 1994년에는 정지용(鄭芝溶)의 시가 미국에서 출판되었습니다. 1995년에는 서정주의 《Poems of a Wanderer(떠돌이의 시)》가 아일랜드에서, 그리고 천상병(千祥炳)의 《Back to Heaven(귀천(歸天))》이 미국에서 간행되었습니다. 1997년에는 박제천(朴堤千)의 시가, 그리고 1998년에는 김춘수(金春洙)와 정현종(鄭玄宗)의 시가 미국에서 출판되었으며 김소월(金素月)의 시가 캐나다에서 간행되었습니다. 한용운과 신경림(申庚林)의 시가 각각 캐나다와 미국에서 선을 보인 것은 그 다음해인 1999년이었습니다. 그리고 2000년대에 들어와서 국내외에서 단행본으로 영역, 소개된 시인들로는 김광림(金光林), 조병화(趙炳華), 홍윤숙(洪允淑), 문정희(文貞姬), 구상, 고은, 김광규, 박재삼(朴在森), 박희진(朴喜璡), 김소월, 마종기(馬鍾基) 시인 등이 있습니다. 그러나 위에서 열거한 바는 해당기간에 국내외에서 영역으로 간행된 한국 현대시의 완전한 전모를 밝힌 것은 아닙니다. 특히 거기에는 20세기 후반기의 한국의 대표적인 저항시인 김지하(金芝河)의 이름이 보이지 않습니다만 그는 1970년대 초반에 두 권의 일역 시집이 일본에서 출판되었을 뿐만 아니라 1980년에는 맥캔 교수가 영역한 《The Middle Hour(어중간한 시간)》이 뉴욕에서 간행되었습니다. 2006년 10월 20일자 동아일보 문화면 기사에 따르면 그해 9월 현재 그의 시집은 독일에서 2종, 중국에서 3종, 미국에서 4종, 그리고 러시아에서 1종이 나와 있어 한국 시인 중에서는 가장 많이 외국에 소개된 시인이었습니다. 그리고 또 여기서 언급하고 싶은 것은 김재현(金載玹) 교수가 1994년 캘리포니아의 프레몽(Fremont) 소재 아시아인문출판사(Asian Humanities Press)에서 출판한 영역 한국 현대시 사화집 《Modern Korean Poetry(한국 현대시)》입니다. 그 책은 그가 1987년 4월 서울의 한신문화사(翰信文化社)에서 출판했던 《Korean Poetry Today(오늘의 한국시》의 수정증보판으로 거기에는 한용운에서 조정권(趙廷權)에 이르는 88명의 시인이 수록되어 총 350면이 넘는, 이때까지 나온 가장 포괄적인 한국 현대시 사화집입니다. 이 사화집의 역편자는 또한 같은 해에 같은 출판사에서 600여 수의 고시조 영역집을 《Classical Korean Poetry(고전 한국시)》라는 제목으로 내기도 하였습니다. 작년 9월 13일부터 이틀 동안 서울교육문화회관에서 열린 한국 문학번역원 주최 제1회 세계번역가대회에서 발표한 독일 함부르그대학의 베르너 자쎄(Werner Sasse) 교수에 따르면 1996년부터 2006년까지 유럽어로 번역, 출판된 한국시는 영어가 62종, 스페인어가 27종, 독일어가 26종, 불어가 19종, 스웨덴어가 6종, 러시아어와 체크어가 각 4종, 이탈리아어와 루마니아어가 각 3종, 그리고 폴란드어, 써보-크로아티아어, 헝가리어 및 노르웨이어가 각 1종이라고 합니다. 그는 이와 같은 시의 경우를 포함한 한국 문학의 유럽어 번역출판은 양적으로 뿐만 아니라 그가 들은 바로는 질적으로도 대체로 빈약한데 이것은 원작자보다도 번역자와 출판업자가 책임져야 한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한국 문학의 세계화 내지 국제화는 한국 문학의 실상과 수준이 적절하게 해외에 소개되어 외부 세계의 정당한 인정과 평가를 받는 일인데 그것의 번역출판이 양적으로나 질적으로 빈약하다면 그 책임은 국내의 작가들보다도 특히 번역가들의 몫이 될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한편 국내의 작가들도 외국 문학의 동향에 늘 눈과 귀를 열고 있어야만 외국 독자들에게도 호소력이 있는 작품을 생산할 수 있을 것입니다. 이런 뜻에서 한국 문학의 연구와 교수에 평생을 바치고 1995년 여름에 요사한 하와이대학의 마샬 필(Marshall Phil) 교수의 “한국 문학의 성공적인 국제화는 독자수용의 문제부터 고려해야 하고 궁극적인 독자들의 필요사항들을 분석함으로써 시작되어야 합니다. 그들이 읽지 않을 것을 왜 제공해야 합니까?”라는 말은 한국의 작가들과 번역가들이 다 같이 기억해야 할 중요한 충언입니다. 다음으로 제가 다루어야 할 것은 주어진 주제의 후반인 ‘번역 문제’입니다. 시의 번역도 여러 가지 방식으로 다루어질 수 있겠습니다만 저는 여기서 좀 기술적인 관점에서 시의 리듬의 번역 내지 이식을 중심으로 생각해 보기로 하겠습니다. 한 편의 시도 다른 어떤 언어표현에서와 마찬가지로 특정한 형식의 말소리에 담긴 특정한 말뜻입니다. 그러나 시에서는 말소리의 형식이 하도 긴밀히 말뜻과 결합되어 있어 시작품을 손상하지 않고 그것을 변경할 수는 없습니다. 엄밀히 말해서 시 번역이 근사치를 얻는 일로서 매우 어려운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그러나 시 번역에 있어서의 근사치 획득의 정도는 원시의 산문개요로부터 원시와 거의 비슷한 등가물에 이르기까지 크게 달라집니다. 시 번역가가 내놓으려고 하는 것은 말할 것도 없이 이 ‘거의 비슷한 등가물’인데 그것을 내놓으려면 그는 원시의 말뜻만이 아니라 또한 그것의 리듬도 흡사하게 옮겨야만 합니다. 왜 말소리의 형식 가운데서 오직 리듬만일까요? 그것은 한 편의 시의 음운 내지 세부구조는 우연이 아니고는 다른 언어로 흡사하게 옮겨질 수 없기 때문입니다. 또한 마찬가지로 리듬도 어떤 기계적인 뜻에서 다른 언어로 흡사하게 옮겨질 수는 없습니다. 심지어는 시작품의 행수조차도 번역에 있어서는 흔히 무시되어 예를 들어 3행시가 6행으로 번역될 수도 있고, 6행시가 3행으로 번역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어느 경우이든 번역시는 말뜻만이 아니라 리듬에 있어서도 원시와 대응해야만 합니다. 이 경우의 리듬의 대응은 실지로는 리듬의 느낌에 있어서의 대응이지 리듬 그 자체에 있어서의 대응은 아닙니다. 이것을 예증하기 위해 한 편의 한국시 작품과 그 작품의 영역 두 편을 보기로 합시다. 그 한국시 작품은 현대 한국의 가장 훌륭한 시인 중의 하나로 일컬어지는 서정주(1915-2000)의 초기 작품 <자화상(自畵像)>입니다. 애비는 종이었다. 밤이기퍼도 오지않었다. 파뿌리같이 늙은할머니와 대추꽃이 한주 서 있을뿐이었다. 어매는 달을두고 풋살구가 꼭하나만 먹고 싶다하였으나… 흙으로 바람벽한 호롱불밑에 손톱이 깜한 에미의아들. 甲午年이라든가 바다에 나가서는 도라오지 않는다하는 外할아버지의 숯많은 머리털과 그 크다란눈이 나는 닮었다한다. 스믈세햇동안 나를 키운건 八割이 바람이다. 세상은 가도가도 부끄럽기만하드라 어떤이는 내눈에서 罪人을 읽고가고 어떤이는 내입에서 天痴를 읽고가나 나는 아무것도 뉘우치진 않을란다. 찰란히 티워오는 어느아침에도 이마우에 언친 詩의 이슬에는 멫방울의 피가 언제나 서껴있어 볓이거나 그늘이거나 혓바닥 느러트린 병든 숫개만양 헐덕어리며 나는 왔다. 1. Father was a serf, Who seldom came home till late at night. Home was guarded only by grandmother, Withered like the root of a leek, And a flowering date tree. Big with child, Mother would always long for sour apricots, Just one. I was mother''s boy With dirty fingernails Under a rude lamp in the mud-wall. I, with bushy hair and bold-staring eyes, Am said to take after Grand-dad on my mother''s side, Who, in the year of insurrection, Went to sea, so the story goes, And never returned For three and twenty years The wind has reared four-fifths of me. Ever and more the world has been a place of embarrassment, Some has read a convict in my eyes, And some an idiot in my mouth Yet I will repent nothing. At each dawn I have noted The dew of poetry settled on my brow, Mixed always with some drops of blood. I have come thus far panting Like a sick dog With hung-out drivelling tongue In the sun and the shade. 2. Father was a serf he never came home, even late at night. The only things standing there were grandmother, withered and plae as the roots of a leek, and one flowering date tree. For a month, mother longed for green apricots, even one. By the oil lamp set in the dirt wall''s niche I was mother''s boy, with black fingernails. With my large eyes and thick hair I am said to take after grandfather on my mother''s side who went off to sea, the story goes, sometime during the year of reforms, and never returned. For twenty-three years it is the wind that has raised four-fifths of me. Life has become more and more an embarrassment. Some read a convict in my eyes, some an idiot in my mouth, but I will repent nothing. On such mornings, at the magnificent dawn, drops of blood mingle with the dew of poetry settled on my forehead. For I have come, tongue hanging out, panting through sun and shade like a sick dog. 이 경우 한국어 원시는 16행인데 대해 영역시의 첫째 것은 29행이며 둘째 것은 22행입니다. 또한 한국어 원시는 두 개의 운문문절로 나뉘어져 있는데 첫 번째 영역시는 네 개의 운문문절로, 그리고 두 번째 것은 세 개의 운문문절로 나뉘어져 있습니다. 이렇게 첫 번째 영역시는 두 번째 것보다 한국어 원시로부터 멀어져 있지만 말뜻과 리듬에 있어 원시에 보다 더 비슷하게 대응하는 것은 두 번째 것이 아니라 첫 번째 것입니다. 이것으로도 확인되는 것은 어떠한 기계적인 대응도 그 자체로는 시번역의 성공을 보장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무엇보다도 중요한 것은 원시라는 말뜻과 말소리의 복합물에 만족스럽게 대응하는 또 하나의 새로운 말뜻과 말소리의 복합물을 다시 만들어내는 일입니다. 이 과정에 있어서는 말소리의 형식을 비슷하게 옮길 수 있는 유일한 요소들인 말뜻과 리듬은 한꺼번에 한 덩어리로 옮겨집니다. 이것이 바로 두 개의 영역시 중에서 첫 번째 것이 서정주의 「자화상」의 번역으로서 보다 더 성공한 이유입니다. 왜냐하면 그것이 원시의 뛰어나게 힘차고 대담한 전체성을 즉각적으로 파악하여 생동하게 재창조하고 있는 데 반해 두 번째 것은 그렇지 못함을 보여주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원시에 가까운 번역을 만족스럽게 성립시키는 데는 기계적인 것은 아니더라도 형태적인 대응을 이룩할 필요가 있고 그것은 대체로 성취될 수 있는 것이 사실입니다. 사실인즉 저 자신 시번역에 있어 원시와 같은 행수로 옮기는 것을 거의 통례화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원시의 리듬의 느낌을 비슷하게 옮기기 위해서는 역시의 행의 길이를 원시의 그것이나 원시에 있어서의 행들의 상대적인 길이에 대응하도록 해야 합니다. 그러나 이것은 원어와 표적어에 고유한 의미론적 및 구문론적 특수성 때문에 언제나 가능한 것은 아닙니다. 이와 같은 경우에는 역시의 행수 또한 원시의 그것에 정확하게 대응할 수는 없어 예를 들어 영시 작품을 한국어로 번역할 때에는 행수는 늘어나기 일쑤입니다. 그러나 제 생각으로는 역시의 행수와 행의 길이는 원시의 그것들과 대응하도록 만드는 것이 대체로 권장할 만합니다. 역시에 있어서의 행수와 행의 길이의 대응이 물론 리듬을 비슷하게 옮기는 일의 전부는 아니고 리듬은 결국 시작품의 말뜻, 어조, 그리고 심지어는 이미지와도 전적으로 무관하진 않으므로 시어(詩語)와 구문과 음운의 세부구조의 선택도 매우 중요합니다. 저의 시번역에 있어서의 이러한 고려사항들을 보여드리기 위해 제 자신의 번역에서 두 가지 경우를 들어보겠습니다. 첫 번째 것은 루펄 브루크(Rupert Brooke, 1887~1915)의 《The Old Vicarage, Grantchester(그란체스터의 옛 목사관(牧師館))의 한 대목을 한국어로 옮긴 것이고 둘째 것은 민재식(閔在植, 1932~)의 《코르네리아 베자부리디사 양(孃) (To Cornelia)》을 영어로 옮긴 것입니다. 두 경우에서도 다 저는 역시를 행수뿐만 아니라 행의 길이에 있어서도 원시에 대응하도록 함으로써 원시의 말뜻뿐만 아니라 리듬도 번역하려고 애썼습니다. 1. God! I will pack, and take a train, And get me to England once again! For England’s the one land, I know, Where men with Splendid Hearts may go And Cambridgeshire, of all England, The shire for Men who Understand And of that district I prefer The lovely hamlet Grantchester. For Cambridge people rarely smile, Being urban, squat, and packed with guile And Royston men in the far South Are black and fierce and strange of mouth At Over they fling oaths at one, And worse than oaths at Trumpington, And Ditton girls are mean and dirty, And there’s none in Harston under thirty, And folks in Shelford and those parts Have twisted lips and twisted hearts, And Barton men make Cockney rhymes, And Coton’s full of nameless crimes, And things are done you’d not believe At Madingley on Christmas Eve. Strong men have run for miles and miles, When one from Cherry Hinton smiles, 제기럴! 짐을 꾸려 기차를 타고 다시 한번 영국을 가야겠구나! 영국은 오직 하나, 내가 알기엔, 마음 좋은 사람들이 갈 수 있는 곳, 영국 가운데도 케임브리지주 유식한 사람들이 머무는 고을, 그리고 거기서도 나는 좋아라 참한 작은 마을 그란체스터. 케임브리지 사람들은 웃지를 않지. 깨이고, 바라지고 꾀만 많아서, 그리고, 먼 남쪽 로이스튼 패는 새까맣고 지독하고 말이 고약코, 오우버 치들은 벼르고 덤벼 트럼핑턴에서보담도 더욱 심하고 디튼 계집애는 밉고 더럽고, 하아스튼 골짜기엔 젊은 게 없고, 셀퍼드와 그쪽 사람은 입술도 마음씨도 비틀어졌고, 바아튼 사람들은 런던말 시늉, 코튼은 이름 모를 범죄투성이, 크리스머스 전날 밤, 매딩리에선 믿지 못할 일들이 일어들나고, 체리 힌튼 사람이 웃는 걸 보면 대장부도 천리만리 도망을 쳤고, 2. 窓臺에 화분을 내놔도 좋았던 그런 날씨에 ‘코르넬리아’는 오고 아쉬운 것이면야 무엇인들 못 나눠 갖겠느냐 地中海가 그리웁다는 파란 눈동자 서로 어루어 긴 밤을 질러가면 머리 안엔 멎지 않는 어머니의 노크 “저는 어려서부터 골(腦)을 많이 먹었지요 엄마가 그렇게 먹으랬지요 제 골이 없으니 쇠골이라도 먹어야 된다고” 그래서 소털은 이렇게 金髮이 되고 首都의 市街地를 등지고 ‘포토막’ 江가에 얼굴을 비치운다…… 내 故鄕은 榮山江 기슭 “내 생일은 二月 二九日 금년에도 나는 생일이 없구” “그러면 이제 겨우 일곱 살이게요?” 일곱 살이어도 네가 좋구나 아침마다 뜨거웠던 起床의 입술 네가 울었어도 나는 왔다. 아침마다 뜨거웠던 起床의 입술 나는 독하고 약한 東邦의 못난이 自鳴鐘時計 하나 사들고 왔다. Cornelia came one day—it was so fine That flower-pots were out on the sill. What on earth couldn''t we share? Your blue eyes dream of the Mediterranean We shortcut the long night in distant caress, With Mother''s incessant knocking in our heads. “I''ve eaton lots of brains since I was a child, As my mother told me to I should eat ''em, she said, for I hadn''t mine.” So you''ve got the blond hair that was the cow''s. With the streets of the Capital at my back, I see my face in the Potomac— My home''s away on the Yongsan-gang. “My birthday''s on February 29. I''ve no birthday again this year.” “Ah, then, you are only seven?” O well, I like you all the time. Morning kisses, hot on the bed! You cried and cried, but I''m home. Morning kisses, hot on the bed! A tough but soft, silly Korean, I brought with me an alarm-clock. 시번역의 성공은 궁극적으로는 역시의 말뜻과 리듬이 정확하게 원시에 대응하면서도 그 자체 한 편의 시로서 살아있느냐에 달려 있습니다. 우리가 앞에서 보았듯이 시작품의 리듬은 대체로 매우 비슷하게 옮겨질 수 있으며 원시의 리듬을 고려하지 못한 번역은 완전히 충실한 번역이라고는 할 수 없는 것입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