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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월초 중국 신강성 쿠챠와 투르판 지역의 불교 유적지를 답사했다. 이번 답사는 서울대를 중심으로 서울대 동국대 등 국내 불교학자 30여명이 실크로드 불교 유적지 답사를 통한 연구교류 확대를 위해 마련됐다.
실크로드의 천산남로와 천산북로가 만나는 지역에 자리 잡은 투르판과 천산남로 중심에 위치한 쿠챠와 고대 실크로드의 주요 거점 도시면서 동시에 불교 신앙이 크게 융성했던 지역들로, 인도에서 중국으로 불교가 전해지는 이른바 불교동전(佛敎東傳)의 중심지 역할을 했던 곳이다. 역사에 걸맞게 이들 지역에는 주요 불교 유적이 많이 남아 있었다. 이들 지역의 불적답사는 고대 불교의 역사와 문화, 특히 동아시아 불교문화의 원천을 이해하는 데 귀중한 경험이 됐다.
# 수바시 사원에서 구마라집의 흔적을 쫓다
새벽 1시 우루무치 공항에 도착해 다시 몇 시간을 보낸 후 8시 30분에 출발하는 국내선을 타고 첫 번째 답사지 쿠챠에 도착했다. 쿠챠 공항은 공항이라기보다는 작은 버스터미널에 가까운 규모였고, 대합실 분위기도 시골 역을 연상시켰다. 한때 실크로드의 요충지로 번성했으나, 18세기 실크로드를 대신한 해양 개척후 사막의 작은 오아시스 도시로 위축된 쿠챠의 현황을 공항이 잘 말해주는 것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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쿠챠에서 제일 먼저 찾은 곳은 쿠챠 시내에서 북쪽으로 20km 떨어진 쿠챠강 상류의 수바시(Subashi) 사원터였다. 수바시 사원은 쿠챠 왕실이 후원하던 가장 큰 사찰이었다. 강을 경계로 서쪽과 동쪽에 각기 비구와 비구니들을 위한 사원이 있었고, 쿠챠 출신의 역경승 구마라집(鳩摩羅什)과 그의 어머니가 주석했던 사찰로 알려져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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쿠챠 왕국의 공주였던 구마라집의 어머니는 쿠챠에 찾아온 인도 출신의 학승 구마염(鳩摩炎)을 흠모해 왕실의 권위로 구마염을 환속시키고 결혼했다. 구마라집을 낳은 후 문득 출가를 결심한 공주는 아들과 함께 이곳 수바시 사원에서 수행에 전념했다. 수바시 사원은 <고승전>의 구마라집 전기에는 작리대사(雀梨大寺)로, 현장법사의 <대당서역기>에는 조호리사(照?釐寺)로 일컬어졌다. 쿠챠 왕국 대표 사찰로 기록됐던 수바시 사원은 이슬람화된 10세기를 전후해 쇠퇴하기 시작했다. 13세기 이후에는 완전히 폐기됐고 지금은 황폐화된 흔적만 남아있다. 일반에게는 비교적 보존 상태가 양호한 서쪽 사원만이 개방 중이다.
# 석가모니불과 미륵보살 그려진 키질 석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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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후에는 쿠챠 시내에서 서북쪽으로 70km 정도 떨어진 키질(Kizil) 석굴을 찾았다. 키질 석굴은 무자라트(Muzarat) 강 북쪽 깎아지른 듯한 바위산 따라 약 2km에 걸쳐 조성돼있다. 현재까지 236개 석굴이 확인됐고 그 중 135개 정도는 비교적 온전하게 남아 있다. 석굴의 개창시기는 3세기경부터 9세기까지 지속된 것으로 알려진다. 초기에는 승려의 수행을 위한 승방굴이 만들어졌다. 점차 예배를 위한 석굴이 많이 만들어졌다. 소박한 승방굴과 달리 예배굴은 불상과 다양한 벽화로 화려하게 장식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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석굴 벽화는 석가모니와 미륵보살만 묘사되고 다른 부처나 보살들은 등장하지 않았다. 다양한 불보살을 신앙한 대승불교와 달리 석가모니와 미륵보살만을 신앙의 대상으로 받아들였던 쿠챠의 불교신앙을 반영하는 것으로 해석된다.
석굴 안내원이 조심스럽게 열어준 제10호 승방굴 벽에는 키질 석굴을 조사하고 많은 벽화 모사도를 그린 한국 출신 한락연(韓樂然) 선생을 추모하는 글이 쓰여져 있다. 한락연 선생은 1946~47년 동안 수많은 석굴들을 발견하고 거기에 그려진 벽화를 모사해 키질 석굴 연구 기반을 마련한 인물이다. 한 선생은 애석하게도 조사를 마치고 돌아오는 길 비행기 사고로 사망했다.
# 여인이 사는 곳-키질가하
키질 석굴에서 쿠챠 시내로 돌아오는 길에는 키질가하(Kizil Gaha) 석굴을 둘러봤다. 쿠챠 시내에서 서북쪽으로 12km 떨어진 곳에 위치한 키질가하 석굴은 4~8세기 사이 만들어졌다. 현재까지 61개 석굴이 확인됐고 11개 벽화가 남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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석굴로 걸어가는 길 중간에 높이 15m의 한나라 군대가 만들었다는 커다란 봉수탑이 서 있다. 위그르어로 ‘여인이 사는 곳’이라는 뜻의 키질가하라는 석굴 명칭은 봉수탑에서 유래했다. 점장이에게 “새로 태어난 딸이 성인이 되기 전 거미에게 물려죽을 것”이라는 예언을 들은 쿠챠 국왕은 공주를 봉수탑 꼭대기에 격리했다. 안타깝게도 봉수탑에 갇혀 살던 공주는 성인이 되는 날 선물로 전해진 과일을 먹다가 그 안에 들어 있던 거미에게 물려 죽었다.
하지만 쿠챠 공주가 한나라 군대가 만든 봉수탑에 격리됐다는 이야기는 뭔가 자연스럽지 못하다. 쿠챠 왕족이 한나라 군대에 의해 봉수탑에 유폐된 것을 전설로 표현한 것은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든다.
# 다섯 개 석굴 하나로 이어진 쿰투라 석굴
쿠챠 답사 둘째 날 오전에는 쿠챠시에서 서남쪽으로 약 30km 떨어진 곳에 위치한 쿰투라(Kumtura) 석굴을 찾았다. 쿰투라 석굴은 쿠챠에서 키질 석굴 다음으로 많은 석굴이 밀집해 있다. 현재까지 112개 석굴이 확인됐고 이중 60여 개가 비교적 온전하게 남아 있다. 키질 석굴과 마찬가지로 무자라트 강에 면해 있고 두 석굴 사이의 거리는 약 15km 정도이다.
석굴 입구에서 조금 들어간 곳에 자리한 쿰투라 수력발전소까지는 버스가 갈 수 있는 포장도로지만, 거기에서부터 석굴 밀집부까지 약 2km 강변 비포장길은 당나귀 수레를 타고 갔다. 망아지 크기 밖에 안되는 당나귀는 5~6명 사람을 태우고도 힘차게 달려 불과 몇 분만에 석굴 밀집부에 데려다 주었다.
쿰트라 석굴은 키질 석굴이나 키질가하 석굴보다 늦은 5~10세기 사이에 조영됐다. 초기에는 키질 석굴 등 영향을 받은 벽화가 그려졌지만 7세기 이후 당나라의 직접 지배를 받은 후로는 당나라 불교 미술의 주요 주제인 변상도와 아미타삼존, 약사삼존 등의 벽화가 등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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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세기말 위그르인의 쿠챠 진출 후 위그르 복장의 공양인 등 위그르 양식이 벽화에 나타난다. 쿠챠, 한족, 위그르 미술 양식이 한 곳에 보이는 것은 이곳만의 특징이다.
쿰투라 석굴 안쪽에 위치한 제68~72호까지의 다섯 석굴은 하나의 출입구를 공유하면서 서로 복도로 연결된 동굴이다. 네 개 석굴은 각기 본존을 모시는 예배굴이고 제69호굴은 승려들이 모여 법회를 보는 법당굴이었다. 쿰투라에는 다섯 개 석굴이 하나로 연결된 ‘오련동(五聯洞)’이 여러 개 분포한다. 이는 쿰투라 석굴만의 특징이다.
제68~72호굴 벽화도 이슬람교도들에 의해 불타 형체를 알아볼 수 없는 상태다. 그런데 간혹 불탄 천정 벽화 사이로 이전 시기 벽화의 모습들이 보였다. 앞 시기 벽화를 덮고 있던 후대 벽화가 이슬람교도에 의해 떨어져 나가면서 보인 것이다. 파괴가 파괴로 그치지 않고 사라졌던 처음의 모습을 드러내는 계기가 됐다는 점이 흥미로웠다.
쿰투라 석굴을 나오는 길에 샤하르트 사원터를 들렀다. 폐허만 남은 샤하르트 사원은 현장 법사 방문 당시 쿠챠 불교를 대표하던 목차국다가 머물던 사찰이다. <대당자은사삼장법사전>에는 현장 법사가 샤하르트 사원에서 소승 교학을 최상으로 여기는 목차국다와 논쟁을 벌여 그를 압도했다고 전한다.
# 푹 꺼진 땅, 투루판
쿠챠 시내 박물관 등을 둘러본 후 투루판으로 향했다. 중간에 있는 쿠얼러(庫爾勒)에서 1박 후 철문관(鐵門關)과 보스텅(博斯騰) 호수를 둘러보고 투루판에 도착했다.
투루판에 도착해 버스에서 내리자 숨 막히는 더위가 느껴졌다. 투루판은 해발 100m도 안될 뿐 아니라- ‘투루판’은 ‘푹 꺼진 땅’이라는 의미라 한다- 주변이 큰 산맥들로 둘러싸인 분지다. 여름 최고 기온이 50℃ 가까이 올라가는 중국의 대표적 불가마 지역이고, 1년 강우량 10mm에 증발량이 2500mm인 초(超)건조지역이었다. 이런 상황이니 <서유기>에 나오는 화염산이 이 지역에 있는 것이 당연히 여겨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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투루판시 서쪽에 위치한 교하장원(交河莊園) 호텔에서 1박 후 투루판 시내에서 동쪽으로 40km 떨어진 고창고성(高昌古城)으로 향했다. 북쪽으로 화염산이 바라보이는 지역에 자리한 고창고성은 5세기 중엽 고창국이 성립된 이후 왕성으로서 크게 발전했다. 고창국은 처음흉노족 출신 저거씨(沮渠氏)가 건국했으나 5세기말 국씨(麴氏)가 왕위를 차지했다. 고창국은 불교의 후원에도 적극적이었다. 열정만으로 시작했던 현장 법사의 인도구법 여행 최대 후원자도 고창국왕 국문태(麴文泰)였다.
고창고성 주변에는 국씨 왕조 시대의 중심 사원으로 현장 법사가 한 달간 머물며 <인왕경>등을 강의한 사원이 남아있다. 안쪽 깊은 곳에 불전(佛殿)이 있고, 중앙 마당 좌우에 강당과 승방이 자리한다. 강당의 벽과 천정이 만나는 네 귀퉁이는 둥글게 처리했다. 안내인은 “소리가 잘 퍼질 수 있도록 한 장치”라고 설명했다.
# 선굴이 많았던 토욕구 석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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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창고성을 나와 동쪽으로 10여km 떨어진 토욕구 석굴로 향했다. 토욕구는 화염산 중 한 협곡의 명칭으로, 협곡 입구에는 오래된 위그르 전통마을인 마자촌이 위치했다. 마자촌은 마을입구 이슬람교 성인의 무덤(=마자, Mazar)에서 비롯된 명칭이다. 무덤의 주인공은 7세기 이 지역에서 이슬람교를 전파한 사람이었다. 마자촌의 위그르인 전통 가옥들을 보면서 협곡 안으로 20분쯤 걸어 들어가니 협곡 안쪽에 석굴이 나타났다.
석굴은 협곡 깊숙한 조용한 곳에 자리 잡고 있었다. 과거 좋은 자연환경으로 많은 수행자들이 모여들면서 선인(仙人)이 거처하는 이상적 수행처로 이름이 높았다는 이야기가 실감됐다. 석굴은 협곡의 양쪽에 모두 94개가 확인됐고 그중 46개가 비교적 온전하게 남아있다. 고창국 성립 직후부터 조영되기 시작한 석굴은 불교가 널리 신봉되던 10세기까지 계속해서 만들어졌다. 특히 당나라 때 많은 선굴(禪窟)이 만들어졌다.
토욕구 석굴에는 원래 많은 벽화가 장식돼 있었지만 서구의 탐험대, 특히 독일인들에 의한 약탈로 대부분이 없어져 현재는 단지 8개 석굴에서만 벽화를 볼 수 있다. 대부분 석굴은 천정과 벽을 천불(千佛) 그림으로 메우고 있었다. 화려한 색채로 석굴을 가득 채운 천불도는 대단히 아름다웠으나, 안타깝게도 이슬람교도에 의해 눈 부분이 훼손된 것이 많았다.
# 벽화가 아름다운 베제클릭 석굴
토욕구 석굴을 나와 고대 투루판 인들의 무덤인 아스타나묘지를 둘러보고 북쪽으로 10km 떨어진 베제클릭 석굴로 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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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제클릭은 ‘아름다운 그림으로 장식된 집’이라는 위그르말이다. 수많은 아름다운 벽화가 장식된 석굴 성격이 잘 표현된 이름이었다. 토욕구 석굴보다 조금 늦은 국씨 왕조시기에 만들어지기 시작해 14세기 이슬람화 되기까지 조영이 계속됐다. 확인된 83개 석굴 중 40개 이상에 벽화가 남은, 투루판 지역에서 벽화가 가장 많은 석굴이다.
초기 벽화는 중국 미술의 영향이 강했지만 9세기 중엽 위그르 왕조 등장 후에는 위그르풍 그림으로 바뀌었다. 벽화 내용도 대단히 풍부했다. 서역의 석굴에 많이 등장하는 천불도를 비롯해 <약사경>, <관무량수경> 등 경전의 변상도와 공양자, 비천상 등 그림의 주제가 다양했다. 특히 석가모니가 전생에 과거 부처님들에게 공양하는 모습을 그린 과거불공양도가 많이 그려져 베제클릭 석굴을 대표하는 벽화로 널리 알려져 있다. 이 과거불공양도를 서양학자들은 ‘서원화(誓願畵)’라 부르지만, 중국학자들은 그림 내용이 <불본행경(佛本行經)>과 일치한다는 점에서 ‘불본행경변상도’라 부른다.
베제클릭 석굴의 과거불공양도 중 일부분이 현재 서울의 국립중앙박물관(관장 최광식)에 소장돼 있다. 벽화는 20세기초 일본의 오오타니 탐험대가 약탈해 일본 강점기 총독부박물관에 소장됐던 것으로, 제15굴에 있던 그림의 일부분으로 확인됐다.
같은 그림 나머지 부분 중 일부는 영국인 스타인에 의해 약탈돼 인도 뉴델리 박물관이 소장 중이다. 같은 그림의 일부분이 제국주의 국가였던 일본과 영국 탐험대에 약탈돼 각기 그 식민지였던 한국과 인도 박물관이 소장 중이라는 사실은 우연치고는 의미심장하게 생각된다.
최근 국내 일부 인사들이 국립중앙박물관 벽화를 원래 자리에 반환하자는 이야기를 하고 있다. 식민지였던 한국과 인도의 박물관이 그림을 반환해 원래의 벽화를 복원한다면 과거 제국주의 열강의 국가들에게 적지 않은 자극이 될 것으로 보인다. 그 결과 현재 열강의 박물관에 흩어진 벽화들이 제자리로 돌아온다면 베제클릭 석굴은 원래의 ‘아름다운 그림으로 장식된 집’의 본모습을 되찾게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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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제클릭 석굴은 불교 벽화만 그려진 것은 아니었다. 제38호굴은 마니교도들이 만든 석굴로 흰옷을 입은 마니교 신도들 그림이 그려졌다. 10세기 급작스레 사라진 마니교 모습을 보여주는 중요한 자료다.
# 대지를 깎아 만든 교하고성
베제클릭 석굴을 나와 투루판 유적 답사 마지막 장소인 교하고성(交河古城)으로 향했다. 교하고성은 기원전 2세기경 존재했던 차사전국(車師前國)이라는 투루판 원주민 국가의 도성으로, 서역지방에서 가장 오래된 도성으로 알려져 있다.
현장에서 본 교하고성은 지금까지 본 어떤 도성과도 다른 독특한 모습이었다. 성벽을 쌓아 만든 성이 아니라 야르나즈강이 두 줄기로 나뉘었다가 합쳐지는 지역에 약 30m 높이로 우뚝 솟은 대지를 깎아 만든 도시였다.
성모양은 버드나무 잎과 같은 모양으로 남북 길이 1700m, 동서 최대 폭 300m로서 면적은 고창고성보다 조금 더 컸다. 강이 성 전체를 싸고 흐르고, 30m 깎아지른 절벽으로 된 천혜의 요새였다. 성 출입구는 비교적 낮은 위치에 있는 남쪽 문으로 이 역시 강을 넘어 갈 수 있었다. 성의 건물 대부분은 평지를 파내 만든 것으로 대형 건물인 관청과 사원들만이 흙을 쌓아 만들었다. 세계 건축사에서 다시 찾기 힘든 특별한 사례로 보인다.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등록된 성은 마음대로 돌아다닐 수 없고 반드시 지정된 보도를 걸어서 다니며 관람해야 했다. 성 중심부의 대형 사원 유적이은 당시 불교신앙의 위상을 상징적으로 보여줬다.
40℃를 오르내리는 더위 속에 교하고성을 나온 일행은 모두 탈진한 상태였다. 이번 쿠챠와 투루판 지역 불적 답사는 이렇게 끝마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