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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헌기록만 전해졌던 양양 낙산사의 옛모습이 관련 유물출토로 확실해졌다.
국립문화재연구소(소장 김봉건)는 7월 31일, 낙산사 발굴조사를 마치고 <발굴조사보고서>를 발간했다.
낙산사 발굴조사는 낙산사 사역의 변화과정을 밝히고 건물지의 정확한 규모와 위치 등을 파악해 낙산사 복원 고증자료로 활용하기 위해 2005년 6월부터 2006년 12월까지 원통보전(중심 법당)과 주변지에 대해 진행됐다.
발굴조사 결과, 중심 건물지(현 원통보전)는 고려시대부터 2005년 4월 산불로 소실되기 전까지 다섯 시기에 걸쳐 중창됐으며 조선시대 세조 때 최대 규모였음이 밝혀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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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왕조실록>에 따르면 낙산사는 당시 왕실로부터 많은 지원을 받으며 번성했다. 또 중심 건물지를 비롯한 주변 지역 8기의 건물지는 김홍도가 관동팔경 여행 중 그린 사생도 중 하나인 ‘낙산사도’의 건물지 배치 형태와 유사해 18세기 낙산사 가람 배치 형태가 파악됐다.
유물은 통일신라, 고려, 조선, 현대에 이르기까지 다량의 기와 및 도기, 자기 등이 출토됐다. 명문 유물로는 ‘성화3년(成化三年)’[세조13년(1467)]명 암막새편과 고려시대의 ‘낙산사(洛山寺)’명 기와, 조선시대의 ‘낙(洛)’자명 백자 등이 확인됐다. 또 연화문 암·수막새, 귀목문 암·수막새, 봉황문 수막새·용문 암막새, 연화문 수막새·‘황제만세(皇帝萬歲)’명 암막새, ‘범(梵)’자명 수막새·가릉빈가문 암막새 등 모두 6세트의 막새기와가 출토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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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립문화재연구소 관계자는 “그동안 문헌기록을 통해서만 전해지던 낙산사가 이번 발굴을 통해 통일신라, 고려, 조선, 현대에 이르기까지 소실과 중창을 거듭하며 현재까지 법맥을 유지한 천년 고찰임을 재확인됐다”며, <낙산사 발굴조사보고서>가 낙산사 사역 복원에 충분히 활용되기를 기대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