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깨달음이란 지금 여기서 일어나는 모든 본질 그 자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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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V: 기독교와 불교는 숫자 ‘6’에 대한 해석이 다르던데요?
명진 스님: 탐욕의 마음으로 세상을 바라본다고 하지요. 불교의 육근ㆍ육경(眼ㆍ耳ㆍ鼻ㆍ舌ㆍ身ㆍ意)은 탐욕의 개인적 주관에서 비롯된 세상을 바라보는 창입니다. 기독교는 숫자 ‘6’을 악마의 의미로 지니지만 바른 해석은 탐욕심에서 비롯된 인식으로 해석해야겠죠. 내 마음 가운데 일어나는 모든 욕망을 쉬는 의미가 바로 ‘7’입니다. 욕망과 성냄과 어리석음을 극복한 상태를 불교는 최고의 안식처로 삼습니다. 6식의 경계를 넘어서 제7식의 상태로 세상을 바라보는 것이 반야의 지혜며 불교 수행입니다. 선(禪)의 궁극 목적은 바로 욕망의 비움을 통해 반야에 도달하는 것입니다.
BV: 강하고 아름다운 필체인데요. ‘단지불회(但知不會)’ 의미는 무엇인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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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진 스님: 소크라테스가 제자의 물음에 답하던 어느 날 제자들에게 “나는 사실 아는 것이 하나도 없다. 그러나 확실히 아는 것은 오직 하나, 나는 나를 모른다는 사실이다”고 말합니다. 소크라테스가 4대 성인의 반열에 오르는 사건입니다. ‘오직 아는가 알지 못한 줄을(但知不會)’ 소크라테스의 나는 내 자신을 모른다는 말과 같은 의미입니다. ‘Only onething I know, I don''t know myself’라고 하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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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진 스님: 가장 중요한 지식이 바로 그것입니다. 불교의 선은 사실 불교에만 있는 것이 아닙니다. 세상 곳곳에 있지요. 끝없는 물음으로 얻는 지혜가 바로 선수행입니다. 알 수 없는 그 자리가 분별심 없는 본래면목입니다.
BV: 물음의 해답은 누가 주는 것이 아니라 본인이 깨닫는 것이군요.
명진 스님: 알 수 없는 그 자리는 과연 무엇일까요. 실제로 우리는 시간이 어디서 출발해서 어디로 가는지 해답을 얻을 수 있습니까? 우리는 모름을 부정하는 세계에 살고 있습니다. 거꾸로 모름의 세계로 들어가 봅시다. 그때 모름 그 자체는 내가 됩니다. 모름에 모든 초점이 맞춰지고 부동하여 지속될 때 고요히 깨닫게 됩니다. 그 때 부처님은 별을 본 것입니다. 새벽별을 보고 깨달은 것이 아닙니다. 모름이란 허공과 같습니다. 이미 모르는 그 자리에는 분별이 없습니다. 모름의 그 세계를 화가는 미술로 표현합니다. 빌 비올라도 비디오아트를 통해 표현하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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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V: 2년 전에 달라이 라마를 만났습니다. 작가로서 현대는 수행이 무척 힘든 것 같습니다. 여행을 가도 제일 먼저 TV리모콘을 찾습니다. 달라이 라마는 어떻게 생각하는지 여쭸더니 답하시길 “나도 어디 가면 텔레비전부터 켠다” 하시더군요.
그 자리에는 아들도 함께 했습니다. 제 아들은 어릴 적부터 벌레가 죽으면 그 벌레를 모아 다른 친구들로부터 괴롭힘 당하지 않도록 돌봤습니다. 아들이 달라이 라마에게 질문했습니다. “한 방에 백 명의 사람이 있고 한 사람이 백 명의 사람을 죽이려고 할 때 달라이 라마께서는 그 한명을 구하겠습니까 아니면 백 명을 위해 한사람을 죽일 수 있겠습니까?” 달라이 라마가 답하길 “부처님도 이와 비슷한 경우가 있었는데 그 한 명이 짓게 될 악업을 차단하고자 후자를 선택했다”고 합니다. 스님은 폭력이 과연 필요하다고 보십니까?
명진 스님: 폭력은 때에 따라 필요합니다.
BV: 의도가 무엇인지 중요하지, 왜 폭력을 행해야 합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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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진 스님: 폭력 그 자체는 큰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인식의 문제입니다. 풀 한포기 꺾는 것도 풀에 대해선 폭력입니다. 인간이기에 어쩔 수 없이 행하는 폭력이 있습니다. 그러나 나를 위한 배려 없는 행위의 폭력은 중단돼야 합니다. 간디의 무저항 비폭력이 절대 해답은 아니라고 봅니다.
BV: 근래에 티베트와 중국의 폭력 사건에 대해선 어떻게 생각하시나요?
명진 스님: 티베트가 중국 중원을 침략해 장악한 적이 있습니다. 중국이 티베트의 독립을 허용치 않는 것도 이와 연관이 있을 겁니다.
BV: 티베트는 현재 어렵지만 달라이라마 사상은 현재 세상을 지배하고 있습니다. 그런 면에서 분노와 폭력의 관계는 조절 가능한지 복잡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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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진 스님: 자비의 마음은 부모의 마음과 닮았습니다. 연민을 지닐 뿐 분노의 화는 없어야 합니다. 화가 일어날 때 그 근원을 물어 들어가 보세요. 화의 실체는 없습니다. 마치 물거품처럼 말이죠. 화를 내는 것과 보리심은 둘이 아닙니다. 그것이 수행이고 정진이며 예술가의 고민일 것입니다.
한 사회와 시대를 지배하는 인물과 가치가 지닌 복잡 다양한 얼개는 불교의 인드라망으로 정의된다. 빈 컵이어야만 물을 가득 채울 수 있는 것처럼 참선 수행을 통해 작업 세계를 구축해온 빌 비올라. 그는 1970년대 대학생 시절 친구와 함께 방문한 명상센터에서 신비로운 체험을 하면서 불교와 첫 인연을 맺었다. 존 케이지(John Cage, 음악가)와 게리 스나이더(Gary Snyder, 시인), 앨런 왓츠(Alan Watts, 명상가)는 당시 불교신도였다.
뉴욕에서 5시간 정도 떨어진 시라큐스 대학에서 1972년에 전시 준비중인 백남준 선생을 만났다. 그의 전위적인 작업을 보고 비올라는 ‘나의 업을 만났다’는 직감이 왔다. 선생은 자상히 본인의 모든 작업을 지도해 주었고 2년 뒤 백남준의 개인전 준비를 돕는다. 그것이 바로 74년 선보인 ‘TV-부처’와 ‘TV-정원’이다. 지난 35년간 건축적 비디오 설치ㆍ사운드 설치ㆍ전자 음악 퍼포먼스ㆍ평면 비디오ㆍTV방송영상 등 다양한 빌 비올라는 ‘변형’을 선보인다. ‘물의 장막’을 경계로 넘나드는 어둠과 밝음에 의한 실체의 생멸은 비디오의 속성인 ‘프레임(frame)’과 찰나의 개념으로 해석한다. 물의 물리적 힘과 겨루는 인간의 격양된 표정 표출은 영적 신비감을 체험하게 한다. 변형의 총 여섯 테마는 변모되는 인간의 외적 형상을 통해 내적인 인간 감정의 변화를 삶과 죽음 사이의 간극으로 승화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