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석가탑 ‘묵서지편’은 불교미술사, 이두 등 국어학 뿐 아니라 불교의례와 불교사적으로 중요한 자료다. 문서 해독을 마친 ‘묵서지편’ 어떻게 연구될 수 있을까? ‘묵서지편’을 갖고 고려시대 불국사 상황을 재조명한 논문이 있어 눈길을 끈다.
6월 20일, 불교문화재연구소(소장 범하)가 ‘불국사 석가탑 문서지편의 기초적 검토’를 주제로 개최한 학술세미나는 석가탑 ‘묵서지편’ 연구를 집대성한 자리였다.
최연식 교수(목포대ㆍ사진)의 ‘석가탑 발견 묵서지편의 내용을 통해 본 고려시대 불국사의 현황과 운영’은 ‘묵서지편’ 해독에 따른 불교사적 연구의 가능성을 열어 보였다는 점에 의의
가 있다.
최연식 교수는 “‘묵서지편’ 중 <무구정광탑기>의 기록에 따라 11세기 전반 불국사가 법상종 사찰이었다는 것이 증명됐다. 11세기 후반 이후 법상종 사찰로 바뀌었을 것이라는 기존 견해는 수정돼야한다”고 주장했다. 지금까지는 불국사가 고려시대까지 화엄종 사찰이었다거나 11세기 후반 이후 법상종 사찰로 바뀌었다는 주장이 지배적이었다. 최 교수는 “일반적인 선종 계열 사찰의 삼강전(三綱典)과 달리 불국사 삼강전은 도감, 부도감, 부감, 사 등으로 독특한 구성을 갖춰 교종 사찰의 구체적 사례”라 설명했다. 독특한 삼강전 구성에 대해 최연식 교수는 “삼강전은 선종 이전부터 있던 기관이다. 교종과 선종사찰의 구성이 다를 이유는 없지만 선종과 교종 사찰이 분립해 발전하면서 차이를 보였을 것”이라 추정했다. 그는 “삼강전은 사찰 최고운영기구가 아닌 실무 운영기관이었다”면서, ‘묵서지편’에 기록된 대관전은 삼강전에서 분화된 기구로 설명했다.
최 교수는 ‘묵서지편’에 기록된 특별 법상과 사리 봉안의식 자료를 당시 신앙과 의례 모습을 보여주는 구체적 자료로 주목했다. “<무구정광탑기>에 석탑 중수작업 진행 중 봉행한 산신설경(山神說經)과 공덕천재(功德天齋) 기록은 당시 불교와 토착신앙의 관계를 증명하는 것”이라고 본 최연식 교수는 “<무구정광탑기> 내용에 따르면 산신설경은 정기적으로 거행된 것으로 보이며, 이는 불국사에 산신을 모시는 전각이 있었다는 것”이라 강조했다.
공덕천재는 인도 토착신인 락쉬미가 불교에 포섭돼 불교 수호신으로 변화된 공덕천녀를 모시고 복덕을 비는 법회다. <금광명경> ‘공덕천품’에 의거한 공덕천을 모시는 법회는 한국불교에서는 주로 고려 무인집권기 이후에 보였고, 궁궐에서 공덕천도량(功德天道場) 형태로 개최됐다. 최 교수는 “공덕천재도 산신설경과 같이 정기적으로 거행됐을 것이다. 불국사에 공덕천을 모시는 특정 전각이 있었을 것”이라 추정했다.
최연식 교수는 “‘묵서지편’에 기록된 사리를 모시는 절차 및 의식이 755년 화엄사에서 <화엄경> 사경시 사경하는 곳으로 나아가는 의식과 유사하다”고 지적했다. 또 <서석탑기>에 불국사 승려와 신도 등의 7ㆍ7齋와 기일재 기록이 있음도 언급했다.
고려시대 불국사 승려는 몇 명이었을까? 최 교수는 “<무구정광탑기>에 기록된 승려는 모두 90명 이상이며, 그중 불국사 소속 승려는 78명”이라 발표했다. 그는 “1024년과 1038년 당시 불국사에 머물며 석탑 중수 작업에 동참한 승려는 모두 300여명이며 이는 지금까지 알려진 고려시대 승려 명단 중 최대분량”이라 주장했다. 최연식 교수는 “승려의 소임에 따라 ‘묵서지편’에 기록된 승려 중 약 20%가 승직을 가진 고급승려였고, 승직이 없는 일반 승려 중 일부는 화상(和尙, 上)의 존칭으로 불렸다”고 분석했다.
한편 이날 세미나에는 박지선 교수(용인대)의 ‘묵서지편의 보존처리와 연구에 관한 제안’ 노명호 교수(서울대)의 ‘석가탑 묵서지편의 문서의 연결복원과 판독’ 이승재 교수(서울대)의 ‘묵서지편의 어학적 의의’ 최연식 교수(목포대)의 ‘석가탑 발견 묵서지편의 내용을 통해 본 고려시대 불국사의 현황과 운영’ 주경미 교수(부경대)의 ‘묵서지편의 석탑 부재 및 사리장엄 관련 용어’ 박상국 원장(한국문화유산연구원)의 ‘무구정광대다라니경과 묵서지편’이 발표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