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아버지를 스승으로 둔 여섯 살 소녀의 남다른 춤사위는 그로부터 평생의 시간을 아우른다. 1979년 캐나다로 혈혈단신 떠나며 가슴에 인(印)으로 남은 것은 아버지와 불교였다. 기독교 환경인 캐나다에서 한마음선원의 법당 한편에 연등을 밝혀왔다. 무용인에게 있어 몸이란 평생을 켜켜이 갈고 다듬어야 하는 악기와 같은 것. 그녀의 무용 인생이 한국 전통 불교의식 ‘영산재’와 만나 재도약을 꿈꾼다.
무용과 함께 한 김미영(64. 캐나다 한국무용연구회 회장) 선생의 인생은 그야말로 물이 흐르듯 있는 그대로 모든 것이 자연스럽다. 환갑(還甲)을 훌쩍 넘은 나이가 무색하게 고운 자태다. 그러한 그녀가 한국 전통불교의식과 작법무의 뿌리를 찾아 영산재(중요무형문화재 제50호)를 보존하고 전수하는 옥천범음대학(학장 일운)을 찾았다. 그녀의 아호 또한 ‘수류(水流)’다. 그리고 매년 가을 캐나다에서 ‘수류무용제’를 연다.
| ||||
3대째 이어져 내려온 예술인의 피는 뜨겁다.
“아버지(김윤학. 민족무용가)의 모든 것이 옳다고 여겼지요. 아버지의 무용을 배우다 보니 이미 내 것이 되어 있었습니다.”
선생의 부친은 1940년대 일본에서 현대무용을 배우고 돌아와 지금의 명동자리에 있던 극장 ‘시공간’의 무대에 올랐다. ‘석불’ ‘승무’ 등 불교적 색채의 무용을 왕성히 선보였고 딸 김미영을 제자로 삼아 ‘장고춤’을 전수했다. ‘제2의 최승희’로 불릴 정도였다.
그러한 아버지가 1995년 만 73세로 이생을 마감하고 49재를 지낼 적에 한국의 불교의식 영산재와 처음 만났다. 부조리한 한국의 공연계가 싫어 타국으로 떠난 지 16년 만에 아버지가 일깨워주는 죽비였다.
| |||
발아된 불성(佛性)이 한국 전통의 불교 의식과 만나 종합 예술로 꽃피울 날을 고대한다. 섭수(攝受)의 법음(法音)으로 울려 퍼지는 영산회상의 재현을 꿈꾼다.
캐나다 온타리오 주정부의 문화유산 지원으로 진행된 이번 영산재 연수는 7월 초까지 진행된다. 현재 ‘캐나다 한국무용연구회’는 캐나다 정부 지원으로 미래 전문 무용인을 집중 양성하고 있다. 캐나다 사회에서 한국 전통무용의 중요성을 널리 보급하는데 주력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