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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일한국은 어떤 모습일까. 분단 상황이 오래 지속되다 보니 ‘통일’의 실체가 와닿지 않는다. 모두들 입버릇처럼 “통일? 해야지!”라고 말하지만 사실 ‘분단’ 현실조차 똑바로 보지 못하고 있다. 우리는 아직도 철책과 철조망, 삼엄한 ‘안보’ 아래에서 갈라진 채 살고 있는데도.
이렇게 막연한 ‘분단’이라는 문제를 현장 속에서 생생하게 살펴볼 수 있는 행사가 열렸다. 조계종 민족공동체추진본부(본부장 명진, 이하 민추본)가 5월 31일 ‘통일정토를 찾아서 떠나는 2008 평화통일순례’길을 마련한 것이다. 7월까지 5차례 평화통일순례가 진행되는데, 이번 순례는 그 두 번째였다. 이번 평화통일순례에는 민추본 사무처장 성묵 스님과 민족자주통일협의회 박석율 사무의장, ‘간잽이’ 이동삼 명인, 동국대 북한학과 학생 8명 등 총 31명이 참가했다. 이날 살펴본 곳은 북한 땅이 가장 잘 보이는 도라산전망대와 민통선 내 마을 통일촌, 최북단 철도역 도라산 역, 실향민의 애환을 담은 임진각 등이었다.
모든 일정은 <안녕, DMZ>의 저자 최현진씨의 상세한 설명 속에서 진행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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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통일을 발원하며
참가자들이 가장 먼저 도착한 곳은 도라산 전망대. 이곳으로 가기 위해서는 ‘민통선’이라 불리는 민간인출입통제선을 넘어서야 한다. 말 그대로 ‘통제구역’이기 때문에 이것을 넘기 위해서는 사전에 국방부에 명단을 제출해야 함은 물론이고 민통선 경계 검문소에서 다시 신분증 검사를 거쳐야 한다. 까다로운 절차를 마치고 차로 몇 분간 더 달리면 군부대가 지키고 있는 ‘도라산 전망대’에 도착하게 된다.
도라산 전망대에 도착한 참가자들은 마음을 가다듬고 통일을 발원하는 ‘깜짝 법회’를 봉행했다. 불단도, 불상도, 경전도 없었다. 그저 참가자들 눈앞에 펼쳐진 북녘 땅을 보며 ‘통일을 염원하는 마음’으로 서원을 세웠다. 민족자주통일협의회 박석율 사무의장이 발원문 낭독을 맡았다.
“남과 북은 5천년 역사 동안 한 민족으로 삶을 이어왔습니다. 유구한 역사에 비해 너무나 짧은 반세기는 우리 삶을 황폐화시켰습니다. 이념을 앞세운 분열과 대립이 그쳐지지 않는다면 우리민족은 영영 공멸의 나락에서 벗어날 수 없을 것입니다.(중략)
나라의 통일을 민족의 단합된 힘으로, 평화적으로 실현하려는 우리 겨레에게 지혜를 심어 주시어 반세기 동안 정체되어 있었던 우리 민족의 드높은 기상이 이곳 경의선 철도를 따라 신의주를 거쳐 대륙으로 뻗어나갈 수 있게 해 주십시오.”
도라산 전망대는 북한 땅이 가장 잘 보이는 전망대라 알려져 있다. 육안으로 개성 송악산과 시내가 보일 정도다. 바로 코앞의 개성을 구경밖에 할 수 없는 것이다. 여기에 또 하나 보이는 풍경이 있다. 북한 비무장지대 마을 기정동에 설치된 거대한 인공기와 남쪽 비무장지대 마을 대성동에 설치된 태극기다. 서로 마주 보며 경쟁하듯 펄럭이는 모습은 우리의 분단 현실을 일깨워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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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분단 속 ‘삶’의 질곡, 통일촌
경기도 파주시 군내면 백연리. 여느 시골마을과 다름없이 평화롭고 따스한 이 마을은 이름이 하나 더 있다. ‘통일촌’이다. 깨끗한 자연 속에서 재래종 ‘장단콩’을 복원시켜 생산해내고 있는 이 마을은, 안타깝게도 외지인은 함부로 드나들 수 없다. 마을 주변에 빼곡하게 드리워진 철책, 그리고 ‘지뢰’ 위험을 알리는 푯말이 이를 증명한다.
이 마을은 민간인통제구역안에 위치해 있다. 마을을 둘러보면 담도 없고 대문도 없다. 외부인 출입이 통제되기 때문에 도둑 또한 있을 수 없기 때문이다.
통일촌은 약 60여 가구가 모여살고 있다. 마을에는 부녀회가 꾸리는 식당이 하나 있고, 그 뒤편에는 마을의 유일한 학교인 ‘군내 초등학교’가 있다. 현재 이 학교에는 전체 15명의 학생이 수업을 받고 있다.
이 마을에 살고 있는 어린이들은 무엇을 하며 놀까. 아이들의 대답은 놀랍게도 “뺑뺑이 타고 놀아요”였다. 컴퓨터도, 게임기도 아니었다. 아이들은 학원도 다니지 않는다. 학교가 끝나면 선생님이 내준 숙제를 하고 친구집에 놀러가는 것이 이들에게는 지극히 자연스러운 일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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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이렇게 평화로운 마을이 이룩되기까지 꽤 고통스러운 역사가 숨어있다. <안녕, DMZ>의 작가 최현진씨는 “여기는 진짜 ‘피땀’으로 일궈낸 마을”이라 말했다. 1970년대 초부터 본격적으로 민통선 내 황무지를 농경지로 개간하는 작업이 진행됐다.
이 과정에서 민통선 내에서 정착하고자 지원했던 수많은 사람들이 지뢰 피해를 입게 됐던 것. 팔ㆍ다리, 심지어는 목숨까지 잃어가며 일궈온 논밭인 것이다.
아직도 통일촌을 비롯한 민통선 내 마을 주민들은 여러 가지 어려움을 겪고 있다. 길이 아닌 곳은 모두 지뢰밭인데다 비무장지대 깊숙이 자리잡은 대성동을 제외하고는 세금 혜택을 받지도 못한다. 또 개간 해놓은 땅의 원 주인들이 땅문서를 들고 찾아와 소유권을 주장, 소작농으로 전락하는 사례들도 속속 발생하고 있다. ‘통일’이전에 이들은 삶의 터전이, 근간이 흔들리고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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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철마는 대륙으로 달릴 준비가 됐다!
통일촌에서 버스로 약 10여분 정도면 남한 최북단 철도역인 도라산역에 갈 수 있다. 도라산역은 경의선 철도의 시발역이기도 한데, 이후 TSR(시베리아횡단열차)과 TCR(중국횡단열차)로 연결, 유럽대륙으로 뻗어나갈 준비가 한창인 곳이기도 하다. 현재는 2002년 개통된 개성까지 달리는 열차가 하루 1번 운행되고 있다. 남쪽으로는 서울역까지 하루 4번 열차가 운행된다.
도라산역은 ‘통일한국’이 나아갈 길을 제시하고 있는 곳이다. 현재 분단으로 반도국가의 이점을 누리지 못하는 대한민국이 통일 이후에는 그야말로 세계로 뻗어나가는 요충지가 될 수 있는 것. 그래서인지 도라산역에는 외국인 관광객들도 많다.
우리의 희망찬 앞길을 보여주는 곳이어서일까, 동국대 북한학과 학생들은 그 어느 코스보다 도라산역을 찾았을 때 즐거워 보였다. 미래로 나아갈 이곳의 철길을 걸으며 “앞으로 통일 한국의 주춧돌이 되자”고 다짐하는 시간을 갖기도 했다.
민추본 교육홍보위원회 이창희(동국대 북한학과 박사과정)씨는 도라산역 탐방 의미에 대해 “우리가 가진 분단이라는 특수상황에 대한 관심을 갖고 도라산역처럼 통일의 발전양상을 보이는 곳을 함께 탐방하면서 우리의 현재와 미래를 모두 조명해볼 수 있을 것”이라고 짚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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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철책, 철조망 없어져야
이밖에도 평화통일순례를 통해 실향민들의 애향을 담고 있는 임진각, 율곡 이이가 머물렀던 정자 화석정과 세종대 명재상 황희의 유적지 반구정 등을 돌아보았다. 모두 파주시 안에 있는 유적지들이다. 화석정과 반구정 등은 그 자체가 우리 분단 현실과 직접적 연관이 있는 곳은 아니었다. 하지만 남한군사분계선 인근 어디를 가도 철책과 철조망이 눈에 띄고, 삼엄한 감시 때문에 함부로 다닐 수 있는 곳이 아니라는 사실만은 확실히 되새기게 됐다. 아름다운 강산, 건축물을 보면서도 철책과 철조망이 눈에 띄는 순간, 다시 우리의 분단 현실이 생각나는 것이다.
최현진씨가 말했다.
“참 흉물스럽죠? 우리가 분단된 현실 속에서 손해 보는 것이 없다고 생각하지만 경제적 손실뿐만 아니라 이런 자연경관도 마음대로 볼 수 없는 감정적 손실도 있습니다. ‘안보관광’이라는 말도 다시 생각해봐야 합니다. 같은 민족끼리 대치하고 있는 공간을 돌아보며 ‘안보’라는 말을 내세우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고 봅니다.”
아직 분단의 현실에서 벗어나지는 못했으나, 언젠가는 하나가 될 것이라 믿는 마음은 가슴 곳곳에 살아 있을 것이다. 하지만 언젠가부터 우리는 점점 잊어가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진짜 우리의 현실을.
현실을 봐야 미래가 보인다. 현재 분단 현실을 잘 챙겨야만 아득하고 추상적인 ''평화통일''이 진짜 우리 대한민국의 모습으로 구체화될 수 있을 것이다.
* 민통선이란?
비무장지대 바깥 남방한계선을 경계로 남쪽 5~20㎞에 있는 민간인통제구역을 말한다. 민간인출입통제선이 정확한 표현. 1953년 7월 27일 미국ㆍ중국ㆍ소련에 의해 155마일 휴전선이 그어지고, 양측 군대의 접촉선을 군사분계선으로 해 이 선에서 남북이 똑같이 2㎞씩 뒤로 물러나 이 지역을 비무장지대로(DMZ)로 정하였다.
이 비무장지대 바깥의 남쪽 철책선을 남방한계선, 북쪽 철책선을 북방한계선이라고 한다. 그러나 1954년 2월 미국 육군 사령관 직권으로 다시 휴전선 일대의 군사작전과 군사시설 보호, 보안유지를 목적으로 남방한계선 바깥으로 5~20㎞의 보이지 않는 선을 그어 민간인의 출입을 금하였는데, 이 선이 바로 민통선이다.
민통선이 그어진 후 이 구역 안에는 민간인의 출입이 철저히 통제되어 오다가 1990년대 들어 국방부가 민통선의 범위를 대폭 북쪽으로 상향 조정함으로써 총 111개 마을 3만 7천여 명 가운데 51개 마을 1만 9천여 명의 통행이 자유롭게 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