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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기도 안성 죽산면. 한적한 시골마을에 5월 25일 아침 풀썩풀썩 흙먼지가 일어난다. 사회복지법인 연꽃마을에서 운영하는 무료노인요양시설 감로당과 실비노인요양시설 보은당이 위치한 이곳에 아주 특별한 행사가 열렸다. ‘장애노인을 위한 2008 전국 효사랑 마라톤대회’가 그것이다.
이날 행사는 타이틀 그대로 5월, 가정의 달을 마무리 지으며 우리 사회의 ‘효(孝)’를 되돌아보기 위해 기획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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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노인복지시설에서 ‘마라톤’이라니 뭔가 좀 어색하기도 하다. 연꽃마을 이사장 각현 스님은 “마라톤이 젊은이들이 즐기는 운동이라는 바로 그 생각에서부터 이번 행사를 이끌어 냈다”고 한다. 스님의 생각은 이랬다.
“몸이 건강한 젊은 사람들은 노인에 대해 잘 모릅니다. 노인들이 무엇을 원하는지도 잘 모르죠. 게다가 노인요양시설을 무턱대고 싫어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이번 행사의 취지는 젊은이들이 관심 가질 수 있는 마라톤 대회를 개최함으로써 그들이 이런 노인복지시설에 찾아와 직접 실상을 보게 만들겠다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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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스님의 생각에 답하듯, 장애를 가진 노인들의 건강과 쾌유를 기원하는 마음을 갖고 나온 1500여명의 마라토너들이 이 행사에 참석했다. 이 중 절반은 연꽃마을 산하 시설 직원들이었지만 나머지는 멀리 태백, 온양, 마산 등 전국 각지에서 몰려온 마라토너들이었다. 이들은 “이렇게 뜻 깊은 행사에 어떻게 빠질 수 있느냐”며 한바탕 웃음이었다.
지자체에서도 적극적으로 이 행사를 지원했다. 시의원, 안성시 문화체육관광과장 등이 이 자리에 참석한 것은 물론이고 생수 3000병을 지원하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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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단한 준비운동을 마치고, 각현 스님의 “어르신들을 생각하며 달리고 또 달리자”는 개회사가 끝나자 참가자들은 출발대에 섰다. 출발은 하프마라톤, 10km, 5km 참가자 순이었다. 이날 대회에서는 경쟁과 기록보다 ‘어르신’들을 생각하는 마음이 중요해서 그런지 참가자들의 표정에는 여유로움이 넘쳤다.
드디어 “땅” 소리와 함께 출발! 참가자들은 포장도로와 비포장도로가 섞인 시골길을 힘차게 달려 나갔다.
이날 행사에는 특히 어린이 참가자가 많았다. 가족단위 참가자들이 많아서였다. 연꽃마을 산하 시설인 안산 부곡종합사회복지관 관장 도선 스님도 복지관 공부방 아이들의 손을 잡고 함께 마라톤 대회에 참여했다. 평소 축구 등 운동에 소질을 보였던 석민(13)이는 시작 전부터 스님에게 “꼭 1등 하겠다”고 큰소리를 치더니, 진짜 5km 어린이부문 1등으로 들어왔다. 도선 스님은 “석민이가 108배도 그렇게 잘하더니, 해냈다”면서 흐뭇한 미소를 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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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꽃마을 시설 어르신들도 신이 났다. 평소 거동을 잘 못해 답답했던 어르신들이 휠체어에 앉아 자원봉사자들과 바깥나들이에 나선 것. 어르신들은 길 한 켠에서 마라톤 대회에 참석한 사람들이 달리는 모습을 보며 박수를 보냈다. 어르신들의 박수에 고무된 참가자들은 어르신들을 향해 손을 흔들고는 더욱 힘차게 달려나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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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게 얼마쯤 시간이 흘렀을까. 점점 도착선에 한 사람씩 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스포츠 경기다 보니 순위가 매겨졌다. 1등, 2등, 3등…. 상위권으로 도착한 사람들의 기쁨은 당연히 컸을 것이다. 하지만 이날 대회에서는 모두가 참여하면서 느낀 보람과 기쁨이 더 크게 작용된 것 같았다. 복지시설 어르신들의 밝은 모습도, 대회에 참가한 사람들이 느낀 훈훈한 마음도 모두 함께 따뜻한 공기를 만들어 냈다.
이날 대회는 노인복지시설에서 주최한 마라톤 대회도 성공적으로 개최될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었다. 각현 스님은 이 대회를 앞으로 정례화 하려고 생각 중이다.
“노인복지시설에서 마라톤 대회를 하겠다니 고개를 젓는 사람들도 있었지만 우리 사회에서 복지시설에 대한 편견을 없애기 위해서는 이런 다양한 노력들이 필요할 것입니다. 저희는 노인복지전문 법인인 만큼 ‘효’라는 가치가 사회 속에서 공감대를 얻을 수 있도록 좋은 사업들을 펼쳐나갈 것입니다.”
효사랑 마라톤 대회 스타!
장애인 마라토너 엄기봉ㆍ이용술ㆍ천기식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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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애노인’돕기에 장애인 마라톤 선수들이 출전했다. 그 주인공들은 영화 ‘맨발의 기봉이’ 실제 주인공으로 유명한 엄기봉(44)씨와 마라톤 풀코스(42.195km) 130회 완주로 유명한 시각장애인 마라토너 이용술(49)씨, 지체장애인 마라토너 천기식(47)씨 등 3인이다.
엄기봉씨는 마라톤 이날 컨디션이 좋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완주, 많은 박수를 받았다. 유명인이다 보니, 곳곳에서 엄씨의 사진을 찍기 위해 사람들이 몰려들기도 했다.
이용술씨와 천기식씨는 우리나라보다 해외에서 더 유명한 장애인 마라토너들이다. 특히 이씨의 경우, 시각장애를 갖고 있으면서도 사하라ㆍ고비ㆍ아타카마 사막과 브라질 정글을 누비고 다녀 미국 유명 경제지인 ‘포춘(Fortune)’지 표지모델로 등장한 이력이 있다. 이씨는 “20대에 시각장애인이 되면서 너무 힘들고 원망스러웠지만 마라톤을 하면서 마음속에 쌓인 울분을 많이 풀어냈다”며 “장애인들도 꿈을 꿀 수 있고, 눈이 안 보여도 달릴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 출전했다”고 말했다.
이들이 한결 같은 마음으로 주문한 것은 사회에서 소외된 사람들을 돌아봐 달라는 것이었다. 사람들의 관심이 가장 중요하단 이야기다.
“노인문제든, 장애인문제든 사회에서 합의가 있어야 해결되겠지요. 우리는 그것을 위해 열심히 뛰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