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기 2568. 10.22 (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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육바라밀 실천으로 ‘법의 곳간’을 채우자
특집- 불자라서 행복해요 프롤로그
“행복하게 살고 싶어요.”

행복하게 살고 싶지 않은 사람이 어디 있을까. 우리 세상이 아무리 ‘고(苦)’로 가득하다 해도 사람들은 그 속에서 각자 살아가는 의미를 찾는다. 그러면서 가끔은 ‘행복한 것 같다’ 싶다가도 또 가끔은 ‘행복한 삶’이 저 멀리 무지개 너머에나 있는 것 같이 느껴진다.

우리 주위에서 “나는 정말 행복하다”고 자신 있게 말하는 사람도 드물다. 직장에서도, 집안에서도 언제나 사람들 속에서 부딪칠 일들이 발생하기 때문이다. 불편한 마음, 채워지지 않는 욕망이 커지면 사람들은 점점 공허해진다.

과연 ‘행복하다’고 느끼려면 무엇이 채워져야 할까. 우리가 행복하려면 의식주를 비롯한 물질의 충족은 기본이다. 삶의 기본 조건이 제대로 갖춰지지 않고서는 ‘생존’ 이상을 생각할 여유가 생기지 않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물질과 명예로 채워진 삶이 행복한가 하면 꼭 그렇지는 않은 것 같다. 종종 사회지도층이나 부자들도 극단적으로 우울증에 빠져 자신의 생을 마감하곤 하기 때문이다.

지난 2월 삼성경제연구소에서 국민 1605명을 대상으로 ‘행복 지수’에 대해 조사했다. 그 결과 행복하다고 느끼는 사람들에게는 6가지 특징이 있다는 것을 분석할 수 있었다. 그것은 ▲젊음 ▲상대적으로 큰 만족감 ▲가족과 여가 중시 ▲높은 교육 수준 ▲타인과 사회에 대한 신뢰 ▲종교행사에 자주 참석(종교의 종류는 무관) 등이다. 결혼여부나 절대적 소득수준은 ‘행복하다’는 의식에 큰 영향을 주지 못하는 것으로 드러났다.

이 조사 결과에서 ‘인간은 사회적 동물’이라는 명제를 재확인할 수 있다. 가족, 사회에 대한 신뢰가 바탕이 되고 이들에 대한 가치가 발견될 때 사람들은 행복을 느낀다고 하니 말이다.

이 결과에서 또 하나 주목해야 할 것은 ‘종교’의 중요성이다. 종교가 단순한 믿음이 아니라 행복한 삶의 조건 중 하나라는 것이 밝혀졌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불자들은 불교를 통해 무엇을 보면 ‘행복하다’고 느낄 수 있을까. 불자들에게 행복이란 과연 무엇일까. 일반적 행복의 의미와 크게 다르지는 않겠지만 대승불교에서는 보살의 길로 나가는 ‘육바라밀’ 즉 보시ㆍ지계ㆍ인욕ㆍ정진ㆍ선정ㆍ반야(지혜) 바라밀을 닦음으로서 피안, 즉 행복의 최고 경지에 이를 수 있다고 한다.

대승불교경전인 <대품반야경>에서는 ‘만약 보살 마하살이 육바라밀을 닦는다면 모두 궁극의 깨달음을 얻으리라’라는 구절이 있다. 또한 ‘육바라밀은 모든 부처님의 진리가 담겨 잇는 이루 다함이 없는 법의 곳간’이라고도 한다. 육바라밀은 불자가 불자답게 하는 기본 행(行)이면서도 최고의 수행방법인 셈이다.

중생은 탐(貪, 탐욕)ㆍ진(瞋, 성냄)ㆍ치(癡, 어리석음) 삼독(三毒)에 빠져 항상 괴로움에 시달린다. 육바라밀은 이 삼독을 걷어내 마음의 평안을 얻는 궁극의 길이다.

그런데 육바라밀은 ‘혼자’가 아닌 ‘세상과 함께 하는 수행’을 강조하고 있다. 각각의 개인이 육바라밀의 실천으로 불자다운 삶을 이뤄나갈 때 내가 속한 세상도 편안해지고 이 개인과 세상의 선(禪)적 연결구조를 통해 결국 정토(淨土)가 이룩된다는 것이다. 결국 피안은 다른 어떤 만들어진 세상으로 가는 것이 아니라 지금 이 세상과의 유기적으로 화합함으로써 이뤄낼 수 있는 경지가 아닐까.

육바라밀의 개념에 대해서는 춘원 이광수가 시 ‘육바라밀’을 통해 잘 설명하고 있다. 부처님 오신날을 맞은 지금, 춘원의 시를 다시 한 번 읽어보자. 육바라밀의 의미가 새롭게 다가올 것이다.


육바라밀
춘원 이광수


님에게는 아까운 것 없이 무엇이나 바치고 싶은 이 마음,
거기서 나는 ‘보시(布施)’를 배웠노라.

님께 보이고자 애써 깨끗이 단장하는 이 마음,
거기서 나는 ‘지계(持戒)’를 배웠노라.

님이 주시는 것이면 때림이나 꾸지람이나 기쁘게 받는 이 마음,
거기서 나는 ‘인욕(忍辱)’을 배웠노라.

자나 깨나 쉴 사이 없이 님을 그리워하고 님 곁으로만 도는 이 마음,
거기서 나는 ‘정진(精進)’을 배웠노라.

천하에 하고 많은 사람 중에 오직 님만을 사모하는 이 마음,
거기서 나는 ‘선정(禪定)’을 배웠노라.

내가 님의 품에 안길 때에 기쁨도 슬픔도 님과 나와의 존재도 잊을 때에,
거기서 나는 지혜(般若)를 배웠노라.

이제 알았노라. 님은 이 몸께 바라밀을 가르치려고 짐짓 애인의 몸을 나투신 부처님이시라고.
김강진 기자 | kangkang@buddhapia.com
2008-05-04 오후 9:25: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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