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몰록 깨달음(頓)과 점차 깨달음(漸) 어느 것이 불교적 깨달음일까? 지난 20여년간 한국불교를 뜨겁게 달궜던 돈오에 대한 논쟁이 “용성 스님의 깨달음이 간화선만을 고집한 것은 아니었다”는 보광 스님(동국대 교수)의 발표로 다시 타오를 전망이다.
보광 스님은 4월 29일 종로 대각사에서 열린 대각사상연구원 학술세미나에서 ‘백용성 스님의 대각증득과 점검에 관한 연구’에서 용성의 깨달음과 점검에 대해 발표했다.
스님은 “대각사상을 정립하고, 독립운동과 연관된 대각운동을 전개했으며, 새로운 불교운동으로 대각교를 천명하는 등 용성을 상징하는 대표단어는 대각(大覺)이다. 용성은 자신의 깨달음에 대한 확신을 바탕으로 대각에서 사회적 회향법을 찾았다”고 주장했다.
이어서 보광 스님은 “용성의 수행과정은 크게 16세에서 23세까지를 오도수행기(悟道修行期)로, 이후 40세까지를 오후수행기(悟後修行期)로 나뉘며, 4차에 걸쳐 깨달음을 얻었다. ▲꿈의 깨우침으로 출가 ▲다라니 염송으로 업장소멸 후 깨달음 체험 ▲화두참구로 대각증득 ▲경전열람으로 깨달음을 확인하는 과정을 거쳤다”고 설명했다.
‘꿈의 깨우침’은 용성이 14세 때 꿈속에서 부처님을 친견하고 부처님으로부터 마정수기와 정법의 부촉을 받은 것으로 이후 출가동기가 됐다.
‘다라니 염송으로 업장소멸 후 깨달음 체험’은 용성이 천수다라니를 통한 견성으로 유명했던 김수월 스님에게 가르침을 받고 천수다라니와 육자주 등을 지송ㆍ정진한 후 얻은 깨달음을 말한다. 보광 스님은 “용성이 19세 무렵인 1882년 양주 보광사 도솔암에서 다라니 수행을 하던 중 ▲산하대지와 삼라만상의 근원에 대한 의심 ▲인간의 근원에 대한 의문 ▲자신에 대한 의문 ▲마음의 근원에 대한 의문을 차례로 품은 지 6일째 되는 날 ‘통 밑이 빠지는 것과 같이 훤하게 깨달았다.’ 이것이 용성의 두 번째 깨달음”이라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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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다라니 오도 이후 용성은 무융선사에게 무자화두를 받아 간화선을 참구했다”며 “용성 은 20대 초반 무자화두를 통해 두 번에 걸쳐 세간과 출세간을 여읜 절대무의 경지를 체득했다”고 주장했다. 보광 스님이 주장하는 용성의 네 번째 깨달음은 23세 송광사 하안거 해제 후 낙동강변을 지날 때 찾아왔다.
금오산에 천년의 달이오
낙동강에 만리의 파도로다.
고기잡는 배가 어느 곳으로 갔는고
옛과 같이 갈대꽃에서 잠자도다. -용성 스님 4번째 오도송-
용성은 네 차례에 걸쳐 깨달음을 얻고 경전열람을 통해 자신의 깨달음을 확인하고자 했다. 스님은 “용성은 <기신론> <법화경> 등을 통해 자신의 깨달음을 점검하고 이후 <치문> 등을 읽어 강원 과정을 거꾸로 섭렵했다”면서, “용성의 나이 30세 무렵부터 37세까지 기록이 없는 7년간은 깨달음 이후 보림 기간”이라 역설했다. “보림을 마친 용성은 제방의 선지식과 법거량을 했고 중생교화의 길로 나서 민족독립운동, 불교개혁운동 펼쳤다”는 것이 스님의 설명이었다.
보광 스님은 “묵조선, 진언 등이 조계종 비주류 수행법이라 해서 무시할 수는 없다”면서 “다라니, 육자대명왕 진언 등을 통해 업장소멸 후 입선하는 방법은 운서주굉 등에 의해 빈번히 주장됐다. 출가불교보다 재가불교에서 이런 움직임이 활발했다”고 주장했다. 보광 스님의 발표로 돈점의 논쟁은 물론 조계종 간화선 수행법과 용성 스님 수행법의 심도 있는 논의도 기대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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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편 이날 학술세미나에는 신규탁 교수(연세대)가 ‘<각해일륜> 분석-동아시아 불교의 전통과 연과하여’를, 노권용 교수(원광대)가 ‘소태산의 깨달음과 법신불 신앙운동’을, 권기현 교수(위덕대)가 ‘진각종조 회당 대종사의 깨달음’을, 홍사성 편집위원(불교평론)이 ‘깨달음에 대한 몇가지 오해, 그리고 진실’을 발표해 깨달음에 대한 다양한 학술적 조명을 시도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