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기 2568. 10.23 (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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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처님 탄생설화의 상징성
‘부처님오신날’기념 대중강좌『붓다의 생애와 가르침』2. 부처님 일대기를 통해서 배우는 불자 신행
권기현 교수

- 강사 : 권기현(위덕대학교 불교문화학부 교수)
- 주최 : 대한불교조계종 중앙신도회 부설 불교인재개발원
- 후원 : 대한불교조계종 포교원
- 일시 : 2008년 4월 2일
- 장소 : 한국불교역사문화기념관 국제회의장

과연 우리는 붓다를 어떻게 바라보아야하는가. 불타관(佛陀觀)의 문제입니다. 붓다는 최고의 인격적 존재입니다. 나라고 하는 문제와 주관과 객관, 나와 세상의 관계를 문제 삼아 보십시오. 불교는 하나라고도 하지 않고, 둘이라고 하지 않습니다. 인도의 ‘아드바이따(Advaita)’ 개념으로 ‘不二’입니다. 불과 물이 섞이는 관념의 세계와 같습니다. 지난 시간에 문화적인 다양성을 말씀드렸습니다만 깊은 사유(禪)를 통해 이해 할 수 있을 것이고, 수행을 통한 유식인 요가짜라(Yogācāra)로도 가능할 것입니다. 둘도 하나도 아닌 세계를 용수보살(Ngrjuna)은 <팔부중도(八不中道)>에서 연기(緣起)와 공(空)의 관계로 해명했지요.

저는 문화해석학적 입장에서 이해하는 방식으로 풀고자 합니다. 다름과 차이에 대한 이해는 내 사고를 확대할 수 있을 때 비로소 가능합니다. 문화의 차이는 사고의 차이입니다. 일단 문화는 충돌되어야합니다. 사고의 폭이 확장되고 반대되는 문화의 사고에 계속 노출될 때 큰 이해가 가능해집니다. 인도인의 사고 틀은 큰 생각의 틀까지도 없애는 방식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불교은 이즘(ism)이 아닙니다. 붓다왓짜나(붓다의 말씀), 붓다데싸나(붓다의 가르침)로 불교인 것입니다. 이러한 인도문화의 속에서 붓타의 탄생은 가능했습니다.

인도를 제외한 대부분의 나라에서 전기의 서술 방식은 조상의 가계족보에서 시작됩니다. 그러나 인도에서는 윤회사상에 입각해 나 자신의 전생이야기가 가계사보다 앞섭니다. 인도에서는 부자집의 문지기로 땀 흘리며 일해도 부자를 부러워하지 않습니다. 전생의 업을 믿기 때문입니다. 현재를 열심히 땀 흘려 살면 내생에는 오늘의 선업으로 과보를 받을 것이라는 인식이 자연스럽게 반영된 것입니다. 깨달음이란 문화의 훈습으로 가능한 것입니다. 그렇게 살다보면 그렇게 됩니다. 우리나라의 효에 대한 관념과 같은 식입니다. 인도는 원융적 사고의 다양성과 오랜 시간의 믿음 체계를 지녔기 때문에 사회 저변으로 그것이 문화가 되어 있습니다. 불교적 깨달음의 세계로 접근하는 방법도 이러합니다. 인도에서 전생이란 보편적인 개념입니다.

전생이야기는 <자타카(Jataka)>라고 하여 총 574개가 있습니다. 붓다 생전부터 이어져 내려왔고, 붓다 시대에 상당히 보편화 됐으며, 인도에 흩어진 이야기를 다 채록했습니다. 500<자타카> 혹은 550<자타카>라고 하며 한국에서는 <본생경(本生經)>이라는 이름으로 동국역경원에서 발행했습니다. 산스크리트어本으로는 빠알리<자타카> 이후에 흥미로운 것만 모아 묶은 <아바다아나(Avadana)>가 있습니다. 붓다의 일생담은 상당히 갈고 닦아져 있있습니다. 문학적으로 각색이 되었고, 아름답게 좋은 은율로 만들어졌습니다. 경전을 불전문학으로 여기는 것도 이러한 이유 때문입니다. 소설을 쓸 때 복선이 있듯이 성언량(聖言量)이라고 하지요. 해석이 가능할 때는 그 뜻을 다시 생각하며 경전을 바라보아야 합니다. 그래야만 붓다의 탄생과 위신력이 다양하게 비춰집니다.

천상천하(天上天下) 유아독존(唯我獨尊) 삼계개고(三界皆苦) 오당안지(吾當安之). 고타마붓다의 탄생게에 내재된 붓다의 삶과 가르침이 지닌 복선을 깊이 통찰해봅시다. 마야부인은 여섯 상아를 지닌 코끼리가 잉태되는 태몽을 꿉니다. 관상가 수약야를 불러서 꿈을 점치니 “성스러운 분이 태안에 내려오셨다는 징후입니다. 탄생한 아들이 집에 있으면 장차 전륜성왕이 될 것이요. 도를 배우면 장차 붓다가 되어 시방을 제도할 것입니다.” 불탑신앙에 의한 조각물인 중인도의 산치대탑에서 우리는 이러한 역사적 기록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네팔 국경선에 있지만 인도 문화권인 룸비니에서 친정으로 향하던 마야부인은 산기를 느낍니다. 현재 이곳에는 아쇼카왕이 세운 석주가 붓다의 탄생 성지임을 증명해줍니다. 붓다 열반 200년 후에 아쇼카왕이 방문하여 ‘신들로부터 사랑받는 덕 있는 왕은 즉위 관정 후 20년에 스스로 여기에 와서 참배를 드렸다. 여기서 고타마붓다가 탄생하였기 때문이다. 돌담을 만들고 돌기둥을 세우게 했다. 세존께서 여기서 탄생하였기에 룸비니 마을은 세금을 면제받고 또 생산의 8분의 1만 내어도 된다.’ 는 비문을 세깁니다. 이 석주는 인도 역사에서 가장 중요한 유물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고고학적인 위치상의 표적이 됩니다. 2300년 이상을 저 자리에서 지켜주었기 때문에 오늘날 우리가 확인 가능한 것입니다.

붓다의 생애와 가르침 두번째 시간으로 출생기를 듣고 있다.

마야부인은 오른손으로 무수 가지를 잡고 오른쪽 옆구리로 태자가 탄생합니다. 범천 브라만이 붓다를 받고, 땅에 내리셔서 동서남북으로 ‘7보’를 걷습니다. 그 자국마다 연꽃이 피어났습니다. 오른 손으로 하늘을 왼손으로 땅을 가리켜 천지수인을 합니다. 인도력으로 웨샤크달인 4월 보름입니다. 인도의 쟈이나에서도 그렇고 성인은 대부분 웨샤크달에 탄생합니다. 인도의 시간관념을 짐작할 수 있는 대목입니다.

실제로 갓난아이가 옆구리로 태어나 울지 않고 스스로 걸어 나아가 말을 할 수 있을까요? 걸을 수 없는 상황에서의 걸음과 고함이 지닌 문학적 특성을 엿볼 수 있습니다. 우협탄생이란, 인도에서의 4성계급과 관련 있습니다. 브라흐만은 머리 크샤트리아는 옆구리 베이샤는 다리 수드라는 발바닥에서 태어난다는 상징적 비유입니다. 붓다는 크샤트리아 왕족이었기 때문에 옆구리에서 태어난 것입니다.

불교에서 ‘6’이라는 법수가 지닌 상징성은 다양합니다. 붓다의 일곱 걸음은 윤회의 세계를 벗어남의 상징이자 붓다 일생의 복선입니다. 이 세상 모든 사람들의 생명의 존엄성을 일깨워 편안케 하신 성인의 탄생 이야기가 문학적으로 승화된 것입니다. 진흙 속에 살더라고 깨달음을 성취하여 결코 더럽혀지지 않는 청청한 지혜를 상징하는 대목입니다. 이런 점으로 붓다의 탄생게에는 불교의 자비와 모든 깨우침이 담겨있다고 볼 수 있습니다. 불교의 두 가지 목표인 깨달음과 자비의 표현입니다. 브라만 도인인 아시타 선인이 붓다의 탄생을 알고 직접 뵙고자 합니다. 아시타가 태자를 보고 눈물을 흘리며 태자의 발에 정례를 합니다. 미간에 연꽃합장을 하고 지혜를 상징하는 제3의 눈(깔라챠크라)에 경례합니다. 처음으로 붓다의 생애를 예언하는 상황입니다.

어머니의 죽음을 경험하고 학습기가 지나 궁중생활을 하던 태자는 아버지인 국왕을 따라 파종을 하는 농경제에 참석합니다. 염부수 나무 아래에서 약육강식의 세계를 보고 삶의 고통을 체험합니다. 그리고 초선에 드시니 염부수나무가 지닌 상징적인 의미를 통해 알 수 있듯 염부제 세계에서의 세속적 깨달음을 얻습니다. 마야부인인 룸비니에서 잡은 나무도 무우수 나뭇가지입니다. 후에 성도하실 때에는 보리수나무에서 정각을 이루십니다. 농경제에서의 초선이 의미하는 바는 붓다가 지닌 선천적인 능력의 확인입니다. 아쇼다라 공주와의 결혼 그리고 아들 라훌라의 탄생은 태자의 출가 결심을 굳힙니다. ‘모두가 무덤이요. 온갖 모양이 마치 허깨비와 같고 꿈과 같구나.’ 태자는 시종 찬다카를 불러 말 칸다카를 타고, ‘모두가 공(空)으로 돌아가거늘 어리석은 이들은 그것을 깨닫지 못하는 구나.’

고타마 붓다의 위대한 출가는 2600여년이 지난 오늘 날까지도 전 세계의 구도자들이 인도로 향하게 하는 나침표가 됩니다. 인간적인 붓다의 생애는 진실함으로 다가옵니다. 길에서 나서, 길에서 깨달음을 이루고, 길에서 다섯 제자와 더불어 설법을 하시고, 마지막마저도 귀향하지 못하시고 길에서 돌아가신 고타마붓다. 붓다께서 남기신 말씀의 상징성을 교리적인 입장에서 맞추고 나면 우리와 가장 닮은 인간이었음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이것이 불교의 생명력이라고 봅니다. ‘우리는 과연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라는 인간적 문제가 불교의 종교적, 본질적 문제를 가르쳐 줍니다. 우리보다 먼저 그 길을 가신 분. 유훈으로 남기신 ‘자등명’ ‘법등명’은 분명히 드러냅니다. ‘유아독존’의 의미를 냉정하리만큼 강조합니다. 결국 종교는 진실성의 문제입니다. 나와 세계의 본질적인 문제에 있어 먼저 그 길을 가신 인간 붓다이신 것입니다.
가연숙 기자 | omflower@buddhapia.com
2008-04-09 오후 8:04: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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