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기 2568. 10.25 (음)
> 문화 > 학술·문화재
석굴암, 조선 식민지배 수단?
강희정씨, 동악미술사학회 월례발표회서 주장
4월 19일 동국대에서 열린 동악미술사학회 발표 현장. 강희정(서울대)씨가 석굴암의 보수전과 보수후가 담긴 사진자료를 설명중이다.

신라 천년 예술의 극치로 기하학적 완성을 보여준 석굴암(국보 제24호). 한민족의 자랑으로 1995년 세계문화유산에 지정된 석굴암이 한때 일본의 조선 식민지배를 위한 수단이었다는 주장이 제기됐다.

강희정(서울대)씨는 4월 19일 동국대에서 열린 동악미술사학회(회장 윤범모) 월례발표회에서 ‘식민지 조선의 표상: 석굴암의 공론화’를 통해 이같이 주장했다. 석굴암의 ‘공론화’는 석굴암이 대중에 공개되고 조선 대표 문화재가 된 과정을 말한다.

강씨는 일본의 조선 고적 조사의 목적이 “합병 전에는 식민지 경영 위한 사전 작업이었고, 강점 후에는 효율적 식민지배 방편이었다”고 지적했다. 강씨는 “석굴암을 복원했던 것은 일본이 미개한 조선에 베푸는 시혜로 조선통치를 정당화하기 위함이었다”며, <조선고적도보>(朝鮮古蹟圖譜)에 석굴암 사진을 보수 전(조선의 과거)과 보수 후(조선의 현재)로 함께 수록한 것을 예로 들었다.

강씨는 “총독부 주도의 석굴암 복원이 끝나자 석굴암 관광이 시작됐다. 석굴암 관광은 비문명의 조선과 달리 유적을 보호할 줄 아는 일본의 자랑이었다. 1930년 일본 황족이 석굴암을 방문하기도 했다”고 말했다. 강희정씨는 “당시 일본인들은 조선 관광은 일본인 스스로의 정체성 확인 기회였던 셈”이라 풀이했다.

하지만 석굴암 복원은 일제의 시도와는 달리 오히려 조선인의 자긍심을 고취하는 결과를 초래했다. 1925년 10월 25일자, 11월 9일자 조선일보 등에는 ‘석굴암 불상은 국방의 수호신’이라는 헤드라인으로 석굴암에서의 최남선 강연을 포함한 경주견학단 모집광고가 났다. 신문에서 최남선은 토함산에 올라가니 홍예처럼 뚫린 굴이 나타나는데 이곳이 바로 나라의 자랑거리, 예술의 정수가 감춰진 곳이라 평했다.

당시 평양, 금강산 등이었던 수학여행지가 보성고보, 대구 신명여중, 포항소학교 등에 의해 경주로 바뀌기 시작했다. 강씨는 “경주 수학여행 계획은 민족 자긍심 고취를 위함이었다”고 설명했다.

1920년대 이후 전국 곳곳에서 빈번했던 영사회는 민족자의식 고취와 계몽운동적 성격이 짙었다. 영사회에서 석굴암은 첨성대, 돌거북, 봉덕사종, 다보탑과 함께 신라 5대 미술로 지정되는 등 석굴암은 민족 자긍심을 키우는 소재가 됐다.

한편 ‘사찰문화재가 국가나 국민의 것’이라는 인식은 일제 잔재라는 주장도 있었다. 강씨는 “일본 문부대승이던 구키 류이치(九鬼陸一)가 ‘사찰문화재는 국가나 국민의 것으로 박물관에 진열할 의무가 있다’고 말한 뒤, (불상 등) 사찰문화재는 신앙의 대상에서 미술의 대상이 됐다”고 말했다.
조동섭 기자 | cetana@buddhapia.com
2008-04-19 오후 10:28:00
 
한마디
닉네임  
보안문자   보안문자입력   
  (보안문자를 입력하셔야 댓글 입력이 가능합니다.)  
내용입력
  0Byte / 200Byte (한글100자, 영문 200자)  

 
   
   
   
2024. 11.25
1 2
3 4 5 6 7 8 9
10 11 12 13 14 15 16
17 18 19 20 21 22 23
24 25 26 27 28 29 30
   
   
   
 
원통스님관세음보살보문품16하
 
   
 
오감으로 체험하는 꽃 작품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