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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불교사에 어두운 사건으로 기록된 1994년 조계종 종단 사태는 현재까지도 출가수행자 간의 다툼이 아닌 2000만 불자의 수치로 남아있다. 지난 정권에서 ‘과거청산’ ‘과거사 진상조사’ 시류 속에서 1994년 종단 사태가 다뤄지지 않았던 것은 속세의 시비를 벗어난 승가의 일이었기 때문이었을까. 이런 가운데 당시 조계종 종정이었으나 종단 사태로 초야에 묻혀야 했던 ‘서암 스님은 진정한 개혁승’이었다는 주장이 제기돼 눈길을 끈다.
불교교단연구소(소장 원두)가 서암 스님 열반 5주기를 추모해 ‘94년 종단사태의 회고와 전망’을 주제로 마련한 학술회의는 스님의 열반 5주기 날인 3월 29일, 서초동 수안사(주지 세민)에서 열렸다.
김광식 교수(부천대)는 ‘송서암의 불교개혁론’을 통해 “서암 스님은 올곧은 수좌였고, 조계종단의 종정을 역임하며 한국 현대불교사에서 일정한 위상을 점하던 수행자였다”면서 “서암 스님의 불교개혁론의 요체는 ‘종단재건안의 기본방향’이라 말했다.
김 교수는 “부처님 법에 맞는 도리를 모르는 사람은 없다. 문제는 실천하고자 하는 의지에 있을 뿐”이라는 서암 스님의 회고를 인용해 “스님이 부처님 법에 맞는 개혁을 추진하려 했다”고 주장했다. 그 근거로 스님이 원로회의 의장에 추대된 후 1991년 7월 5일 서울 대각사에서 기자회견에서 ‘승려대표자대회 취지문’을 발표하면서 종단을 구성하는 승려대표자들에게 종단 진로를 결정케 하고자 했음을 제시했다. 서암 스님이 추구했던 개혁의 방향을 김교수는 ▲원로회의를 통한 종정 선출 ▲종풍 쇄신 위한 개혁위원회 구성 ▲불교중흥을 목적으로 자금원 확보를 위한 사원경제 편중 배제였다고 구분했다.
이런 서암 스님의 개혁안은 1993년 11월 ‘석존의 교법에 의한 종단재건’으로 구체화됐고, 김 교수는 서암 개혁론 특징을 ▲1970년대부터 20여년간 대두된 종단의 모순, 파행, 문제가 모태 ▲율장 중시 ▲개혁주체로 원로회의 중시 ▲개혁방안으로 승가교육 중시 ▲재정의 투명성 중시 ▲출가와 재가를 통섭한 종도대표자회의 구성 등으로 정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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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 교수는 “서암 스님을 종단개혁에 반하는 인물로 인식ㆍ단정했던 제도권 ‘종단개혁’ 주체의 기존 해석이 재고될 것으로 기대된다”고 밝혔다.
이어 덕산 스님(불교교단사연구소)은 ‘94년 종단사태와 칠보사 원로회의’에서 “종정 불신임을 촉구하고 4ㆍ10 승려대회 개최를 결의했던 칠보사 원로회의가 종헌에 명시된 소집권자에 의해 소집되지 않았다는 점 등을 들어 위법한 회의였다“고 주장했다.
발표 후 좌담에서 명선 스님(조계종 원로의원), 현해 스님(前, 동국학원 이사장), 인환 스님, 마성 스님 등은 서암 스님의 재평가와 명예회복의 정당성에 관한 의견을 나눴다.
“종정을 불신임한 것은 종단의 비참함이었다”는 명선 스님은 “이제라도 바로잡아 명예를 회복시켜야 한다”고 말했다. 현해 스님은 “1994년 종단사태 등은 종단의 주요 소임을 권력으로 오인해 일어난 사태”라고 규정하고 “서암스님은 (권력 다툼의) 희생양”이라고 애도했다. 학술회의가 끝난 후 서암 스님 열반 5주기 추모 법요가 봉행됐고, 사부대중 100여명이 동참했다.
한편 열반한 서암 스님의 ‘종정 복권’ 추진은 현 조계종 체제가 1994년 종단개혁을 발판으로 하고 있다는 점에서 상호 이해와 용서로 대승적 화합을 이룰 수 있을지 귀추가 주목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