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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을 너무나 좋아한 나머지 “출판사를 차리겠다”는 말을 달고 다니던 소년이 있었다. 소년이 나이를 먹게 되면서 그 꿈은 그대로 묻혀버리는가 싶었다. 그러나 잠시 접혀 있던 그의 꿈은 불교계 안에서 펼쳐졌다. 좋은 불서를 만들어내겠다는 서원으로 단단하게 다져진 ‘정우서적’을 세우면서부터.
햇살이 맑은 3월 10일, 서울 종로 한 건물에 위치한 정우서적을 찾았다. 정확히는 정우서적 이성운 사장을 찾았다는 것이 맞을 것이다. 그를 만나자마자 어떻게 불서 출판사를 시작하게 됐는지가 궁금해 이야기를 꺼냈다. 이 사장은 1992년부터 공직생활을 접고 출판사를 시작했다며 간단하게 “뜻이 있고 하고 싶어서”라고 정리했다. 그러면서 그는 ‘불서’라는 단어의 정체성이 뭐라 생각하냐고 되물었다. 이 사장이 진정으로 하고 싶던 말이 시작된 셈이었다.
“불서란 과연 종교의 하위개념인지, 불교적인 내용만 들어가면 되는 것인지, 불자가 아닌 사람이 출판해도 되는 것인지 생각해봐야 합니다. 불서는 불교를 담은 책이죠. 불교인에 의해, 불교의 가치와 이념을 드러내야 불서라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원론적이지만 그만큼 신선하기도 했다. 요즘처럼 변주가 환영받는 세상에서는 오히려 원론을 지키는 것이 특이하니 말이다.
이 사장이 만들어낸 정우서적 책들을 살펴봤다. 의식 및 불자신행서ㆍ국한문대역경서ㆍ사경시리즈ㆍ경전시리즈 등 ‘정통파’ 불교서적과 이론교양서적으로 나눠져 있다. 이 사장이 의식ㆍ의례집을 상당히 중시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뜻밖이다. 규모가 작은 출판사는 어떻게든 일반 독자에게까지 ‘어필’할 수 있는 책 출판에 신경 쓰기 마련인데 정공법을 택한 것이다.
이런 도서를 주로 만들어내는 이 사장을 가장 힘들게 하는 것은 무엇일까 문득 궁금해졌다. 생활적인 답변이 나올 것이라 기대했으나 이 사장은 ‘언어’문제를 들고 나왔다. 번역도 번역이지만 이 사장이 더욱 크게 문제 삼는 것은 ‘우리 말’ 자체다.
“우리말로 옮겨 놓아도 이해가 안 되면 무슨 소용입니까. 우리말 문법에 맞게 정확한 문장을 쓰면 불서 어렵다고 안 읽을 사람은 적어도 없을 것 아닙니까.”
그렇다고 이 사장이 딱딱한 사람이냐면 그렇지 않다. 그는 문학을 사랑하고 한시도 즐겨 쓴다.
“불교에 얼마나 아름다운 구절이 많은데요. 게송을 하나 보아도 문학적이지요. 게다가 초기 경전에는 또 얼마나 많은 비유가 내재해 있습니까.”
이런 그의 생각은 이 사장이 운영하는 ‘정우피아’ 블로그(blog.naver.com/jabidj)에서 더욱 자세히 볼 수 있다. 여기에는 그의 출판 신념, 새 책에 대한 꼼꼼한 리뷰는 물론 신행이야기, 습작 시들까지 다양하게 꾸몄다. 마치 사랑방 같은 분위기다.
다시 이 사장에게 물었다. 그렇다면 현재 불서는 어떤 방향으로 나아가야겠느냐고. 지금 불서 시장의 불황을 어떻게 타개해 나갈 것이냐고.
“불교출판인들이 책을 통해 불교의 가치를 개발하고 다양하게 드러내야 합니다. 우리나라 사람들은 무척 현실적이고 현세적입니다. 불교도 시대에 맞춰가려는 노력이 필요하고 트렌드를 따라잡지 못하면 불서 출판계도 살아날 수 있을 겁니다.”
그래서 요즘 이태성 교수와 범어(梵語)를 다시 보는 <범어실담입문>을, 김호성 교수와는 <불교, 소설과 영화를 말하다>를 출간 준비 중이다.
여기서 그치지 않고 ‘새로 쓰기 경전 운동’도 계속하고 있다. 현학적 해석은 지양하고 원형을최대한 유지시킨다는 것이 그의 결심이다. <법화경>을 비롯한 10권의 경전이 이런 과정을 거쳐 나올 예정이다. 독송 위주의 경전에서 탈피해 온전히 뜻을 안길 수 있는 경전을 만드는 것이 그의 목표다.
이 사장은 정말 열심히 고민하고 끊임없이 회의하는 전문인이다. 그러다 보니 자연스레 공부도 한다. 현재 동국대 불교학과 박사과정을 밟고 있는 그다. 이 사장은 불서를 만드는 그 자체에 자부심을 갖고 살고 있다. 출판 시장 상황이 어렵다는 것은 그에게 걸림이 아니다. 달리 보람이라 찾을 것도 없이 불서를 만드는 그 자체가 보람인 삶이다.
철학이 없고 불교적 가치가 없는 출판물은 불서가 아니라고 딱 잘라 말하는 이성언 사장. 그러나 그와 이야기를 하다 보면 현실적이면서도 순수한 열정, 그리고 확고한 신념을 가진 출판인의 자부심이 느껴진다. 그러다보면 슬그머니, 이 사장의 그 ‘고집’을 편들고 싶어진다.
“출판사를 시작하면서부터 가진 꿈이 있습니다. 대를 이어 출판사를 물려줄 수 있었으면 좋겠다는 것입니다. 불자가 아닌 사람도 읽고 싶어하는 책, 인문학적 가치를 가진 불서를 만들어내다 보면 그 바람, 이뤄지겠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