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기 2568. 10.23 (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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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담진성대종사 영결식 22일 수덕사서
임종게 “청산과 풀은 스스로 푸름이로다”
덕숭총림수덕사 원담진성대종사 장의위원회가 공개한 영결사진.

덕숭총림 수덕사 방장 원담진성(圓潭眞性) 대종사가 3월 18일 열반에 들자 덕숭총림수덕사 원담진성대종사 장의위원회는 18일 밤 보도자료를 통해 영결일정을 밝혔다.

수덕사는 원로장으로 영결식과 다비식을 치를 예정인 가운데, 3월 22일 오전 10시 30분 수덕사에서 영결식을 봉행한 후 수덕사 연화대에 다비장을 마련할 계획이다.

이어 장의위원회는 “스님의 원적을 안타까워하는 문도들이 마지막 한 말씀을 청하자 대종사께서는 ‘그 일은 언구에 있지 아니해. 내 가풍은 (주먹을 들어 보이시며) 이것이로다!‘ 하셨다”고 전했다. 장의위원회가 밝힌 원담진성 대종사의 임종게(臨終偈)는 다음과 같다.(041)337-6565

■ 원담진성 대종사 임종게

來無一物來
去無一物去
去來本無事
靑山草自靑

올 때 한 물건도 없이 왔고
갈 때 한 물건도 없이 가는 것이로다.
가고 오는 것이 본래 일이 없어
청산과 풀은 스스로 푸름이로다.

■ 행장 및 수행연보

천진불 원담 대종사님

“불교라고 하는 것은, 무엇이 필요해서 믿고 닦아 들어가는 것이 아니라, 내 근본을 찾기 위해서 찾아 들어가는 법이 불교야. 이것을 알아야 해. 이것을 알지 못하고 다른 것을 안다고 하는 것은 하나의 형식이지 불교는 아니야. 나를 모르면 범부요 생사고해에서 떨어져 버리는 거야. 나를 안다고 할 것 같으면 생사가 조금도 상관없는 것이고, 나를 안다고 할 것 같으면 저 삼라만상과 더불어 내가 둘이 아니야.”

대종사(大宗師)의 본관(本貫)은 부안김씨(扶安金氏)이며, 모친의 꿈에 한 스님이 나타나 이름을 지어주었다고 해서 아명(兒名)은 몽술(夢述)이요 법명(法名)은 진성(眞性)이고 법호(法號)는 원담(圓潭)이다.

1926년 10월 26일 전북 옥구군 옥구면 수산리 217번지에서 부친 김낙관(金洛觀)과 모친 나채봉(羅采鳳) 사이에서 차남으로 태어났고, 다음해에 충남 서천군 기산면 신산리 39번지로 이주하여 성장하였다.

1932년 신동우 선생 문하에서 한학을 수학하던 중, 장남인 형이 일찍 죽자 수명장수 기도 차 이모인 비구니 스님을 따라 절에 오게 되었는데, 어린 마음에도 승려 생활이 무척 고상하고 숭배하는 마음이 나서 집에 돌아와 부모를 졸라 출가하였고, 1933년 벽초(碧超) 스님을 은사로 만공(滿空) 스님을 계사로 수계득도하였다.

수계한 후 천장사에서 다각 소임을 하던 중, 방선 시간에 대중들이 ‘만법귀일(萬法歸一)’ 화두에 담소하는 것을 듣고 이렇게 말했다.
“노스님, 저도 참선을 해볼랍니다.”
노스님께서 ‘참선을 어떻게 할래?’하고 물으시니,
“아까 어떤 수좌가 와서 노스님한테 법문을 묻는데, 만법이 하나로 돌아갔다고 하니 하나는 어디로 돌아갔는고……? 하나로 돌아갔다고 하는 하나라는 것이 도대체 무엇인고…….”

이렇게 불언불어(不言不語)하며 일구월심 지어감에, 정혜사에서 채공을 하던 중 만공 노스님이 거두절미하고 머리통을 내리치시면서 ‘알겠느냐?’ 하고 물어서 얼떨결에 ‘예, 알았습니다’라고 대답을 했다.

그러자 만공 노스님은 다시 주장자를 들어 올리면서 ‘네가 알기는 무엇을 알았느냐?’고 다그쳤고, ‘딱 때리니까 아픈 놈을 알았습니다.’라고 답했다.

실은 잘 모르면서도 또 맞을까 겁이 나서 뱉어버린 말이었기 때문에 그 후 늘 양심에 가책을 느껴 주장자로 얻어맞고 아팠던 놈이 어떤 놈인가 열심히 참구를 했다.

하루는 부엌에서 설거지를 하고 있는데 만공 노스님이 역시 머리를 딱 때리면서 ‘알았느냐?’ 하고 또 물으셨다. 거기서는 ‘예, 몰랐습니다.’ 하고 대답을 하니 노스님께서 ‘그러면 알아야지. 내가 닷새 동안 기한을 줄 테니 알아봐. 모르면 여기에 살지도 못하고 쫓겨난다.’ 하고 말씀하셨다. 그러자 ‘예, 그렇게 하겠습니다.’ 하고 대답을 해놓고는 닷새 동안 잠도 안 자고 아무리 생각을 해봐도 도대체 알 도리가 없었다.

만공 노스님이 금선대(金仙臺)에 계실 때 심부름을 내려갔더니 역시 주장자를 가지고 달려들어 딱 때리기에 ‘아직 모르겠습니다.’ 했더니 그제야 ‘됐다. 짚신을 삼아라.’ 하셨다. 그때부터 시봉을 하게 되었고 노스님의 법을 신뢰하게 되었다.

만공 노스님이 주장자로 머리를 때린 것과, 세존이 꽃가지를 잡아든 것과, 달마 스님이 불안한 놈 잡아오라 한 것과, 육조 스님의 한 물건이라는 법문과, 임제 선사가 두들겨 맞고서도 모르다가 황벽불법이 몇 푼어치 안 되는구나 하는 그 말과, 너무나도 일사분란하게 맞는 법문이라 비로소 이렇게 오도송(悟道頌)을 읊으셨다.

一片虛明本妙圓 한 조각 비고 밝은 것 본래 묘하고 둥글어
有心無心能不知 유심무심으로는 능히 알 수 없네.
鏡中無形是心卽 거울 가운데 형상 없는 이 마음은
廓如虛空不掛毛 확연히 허공 같아 티끌만치라도 걸리지 않네.

이것이 1943년 17세 때의 일이다. 이에 만공 노스님은 비로소 사미(沙彌) 진성(眞性)에게 글을 써주셨다.

眞性本無性 참 성품에는 본래 성품이 없고
眞我元非我 참 나는 원래 내가 아닐세.
無性非我法 성품도 없고 나도 아닌 법이
總攝一切行 총히 일체행을 섭했느니라.

이후 대종사(大宗師)의 임운등등(任運騰騰)하고 활발발(活潑潑)한 선기(禪機)는 하늘을 끌어내리고 땅을 뽑아 올렸다. 대종사의 허광방달(虛曠放達)한 선지(禪旨)는 산꼭대기에서 파도가 일고 우물에서 먼지가 솟았으니 참으로 출격장부(出格丈夫)였다.

경허(鏡虛)·만공(滿空)의 법(法)을 이은 화상(和尙)의 가풍(家風)은 언답(堰畓, 자갈논)을 일구고 땔나무를 나르는 중에도 평상심(平常心)의 도(道)를 내보이며 무소부재(無所不在)한 불법을 체현(體現)한 행화를 보이고 사라짐이 변화무쌍하여 그 향방(向方)을 가릴 수 없었다. 적경회심(適竟會心)한 경계(境界)는 춘래초자청(春來草自靑)이었으며, 언제나 자신의 흉금(胸襟)과 감흥(感興)이 분출하는 마음을 주인공(主人公)으로 한 심지(心地)였다.

오가(五家)의 종풍(宗風)을 두루 갖춘 대기대용(大機大用)의 기봉(機鋒)은 당대 선장(禪匠)들을 뛰어넘어 홀로 보배롭게 빛났고, 방광불피조속(放狂不避粗俗)한 화상(和尙)의 해탈문(解脫門)은 불조(佛祖)의 정법(正法)을 이은 여법(如法)한 본분납승(本分衲僧)의 면목(面目)이었다. 수물부형(隨物賦形)의 창신성(創新性)과 당기살활(當機殺活)의 수물응기(隨物應機)는 한치의 어긋남도 없는 조사문(祖師門)의 가풍(家風)이었으며 일체개공(一切皆空)을 체(體)로 하고 촉처개진(觸處皆眞)을 용(用)으로 한 쌍인검(雙刃劍)은 마음도 부처도 아닌 자리에 머물면서 더러움을 버리지 않고 깨끗함을 취했고 형식주의적인 것은 거부하고 조신(調身)보다는 조심(調心)으로 장양성태(長養聖胎)를 삼았다.

또한 천부적인 미적 감각으로 예술, 문화, 서화에서도 전문인을 능가할 정도여서, 의재(毅齋) 허백련(許百鍊), 비공(非空) 장욱진(張旭鎭), 고암(顧庵) 이응로(李應魯) 화백과 교류하면서 각자의 작품을 서로 평하고 취사(取捨) 선정(選定)하였으니, 이는 세속(世俗)과 청산(靑山)이 다름 아닌 경계였다.

남산(南山)에 구름이 일면 북산(北山)에 비가 오는 화상(和尙)의 본래면목(本來面目)은 일생동안 덕숭산(德崇山)을 떠나지 않았으면서도 아침마다 달마(達磨)의 소림굴(少林窟)을 드나들고 저녁마다 육조(六祖)의 조계(曹溪)에서 발을 씻었다.

1958년 불교정화 당시 구례 화엄사 주지를 잠시 역임하시고, 1964년 중앙종회의원에 피선되셨으며, 1967년 『만공어록』을 간행하셨고, 1970년 수덕사 주지로 취임하여 범종을 주조하고 범종각, 법고각, 청연당을 신축하여 사찰의 면모를 일신하셨다.

1980년 통도사 극락암에 안거하실 때 글씨 쓰시는 것을 보고 경봉 큰스님께서 ‘자네 글씨가 내 글씨보다 낫네!’라고 하실 정도로 대종사께서는 예술 방면에도 조예가 깊으셨다. 1982년에 쓰신 수덕사 대웅전 현판을 비롯하여, 1984년에는 속리산 법주사의 주련들을 쓰셨으며, 1986년에는 《일본산업경제신문》이 주최한 국제서도전에서 대상(大賞)을 수상하시고, 같은 해 독립기념관 건립 서예전을 열어 전액을 회사한 바 있다.

1986년에 덕숭총림 제3대 방장으로 취임하며 보임정수(保任精修)하시게 되었고, 1994년에는 원로회의 부의장을 역임하셨다. 2003년 『원담법향집』을 출간하였고, 2004년 대종사(大宗師) 법계(法戒)를 품수(品受)하셨다. 또한 승가사 조실, 용인 하운사 조실, 용인 법륜사 조실, 금산 금락사 조실, 향천사 천불선원 조실, 개심사 보현선원 조실을 역임하셨다. 30여 년 간의 결제·해제 상당법어(上堂法語)를 보면 마치 어둠을 밝히는 등불인 듯, 더위를 씻는 맑은 바람인 듯, 납자(衲子)들에게 길잡이가 되고 조도(助道)에 도움이 되는 지남(指南)이 되시었다.

2007년 12월 『원담대종사선묵집』을 간행하였으니, 그동안 일필(一筆)을 들어 먹으로 선계(禪界)의 풍류 속에서 개오(開悟)로 이루어진 서예의 예술은 많은 감화와 감동을 남겼다. 지난 결제 때에도 대중과 함께 기념 촬영을 하셨지만, 육신이 가을 낙엽 마르듯이 쇠잔해지는 모습을 보고 안타까운 문도들이 마지막 한 말씀을 청하니, ‘그 일은 언구(言句)에 있지 아니해. 내 가풍은 (주먹을 들어 보이시며) 이것이로다!’ 하시고,

來無一物來 올 때 한 물건도 없이 왔고
去無一物去 갈 때 한 물건도 없이 가는 것이로다.
去來本無事 가고 오는 것이 본래 일이 없어
靑山草自靑 청산과 풀은 스스로 푸름이로다.

■ 수행연보

1926년 전북 옥구 출생. 아명(兒名)은 김몽술(金夢述).
1927년 충남 서천으로 이주.
1933년 벽초스님을 은사로, 만공스님을 계사로 수계득도.
1958년 지리산 화엄사 주지.
1964년 대한불교조계종 중앙종회의원 취임.
1967년 『만공어록』 간행.
1970년 수덕사 주지 취임.
1980년 『경허법어』 간행.
1980년 승가사 조실.
1980년 용인 하운사 조실.
1982년 수덕사 대웅전 휘호.
1983년 덕숭총림 설립.
『만공법어』 간행.
1984년 속리산 법주사 주련 휘호.
1986년 덕숭총림 제3대 방장 취임.
《일본산업경제신문》 주최 제3회 ‘국제서도전’ 대상 수상.
독립기념관 건립 서예전 개최.
1994년 대한불교조계종 원로회의 부의장 취임.
2002년 용인 법륜사 조실.
2003년 법어집 『덕숭산법향』 간행.
2004년 대종사 법계 품수.
금산 극락사 조실.
향천사 천불선원 조실.
개심사 고현선원 조실.
2007년 『원담대종사선묵집』 간행.
2008년 현 대한불교조계종 원로의원.
현 덕숭총림 수덕사 방장.
독립기념관 소장 대종사의 작품 13점을 덕숭총림 선미술관에 기증.
3월 18일 오후 9시 수덕사 염화실에서 열반(법납 76, 세납 83).
여수령 기자 | snoopy@buddhapia.com
2008-03-19 오전 12:02: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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