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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0년 전 연등축제는 어떻게 치러졌을까?
부처님오신날봉축위원회는 최근 연등축제의 역사를 정리한 자료집 <초파일 행사 100년-연등축제를 중심으로>를 펴냈다.
봉축위는 “연등축제의 근현대 변화과정을 밝혀 보기 위해 한국불교연구원과 조계종 행사기획단이 공동으로 조사를 시작하게 됐다”며 “이번 조사를 통해 연등축제 제등행렬이 1955년 조계사에서 시작됐음을 확인했다”고 성과를 밝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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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계종 총무원장 지관 스님은 “초파일 행사가 사회와 불교의 변화 속에 매년 발전해 온 것을 자료를 통해 알게됐다”며 “이 같은 작업을 통해 연등축제가 과거의 축제일 뿐 아니라 미래사회에 중요한 국민적 화합축제로 승화되기를 바란다”고 밝혔다.
▶1907년 ‘봉원사서 경축예식’ 기록
그렇다면 근현대의 초파일 행사와 연등축제는 언제부터 시작된 것일까?
부처님오신날을 기리기 위한 연등행사는 일찍이 신라 경문왕 6년(866)에 황룡사에서 간등(看燈)을 했다는 기록이 전하는 것으로 보아 신라시대에 불교민속으로 자리 잡았음을 알 수 있다. 탑돌이 또한 신라 원성왕대(785~799년)부터 기록이 보인다.
근현대 초파일 행사에 대한 기록은 1890년대 이후 간간히 신문지상에 나타나지만 매 해 행사를 치른 기록은 1907년 5월 24일자 대한매일신보에 실린 ‘음력 사월 초파일은 석존탄신이라. 명진학교 일반교원이 학도(學徒)를 반졸(伴率)하고 봉원사에 전왕(前往)하야…경축예식을 봉행했다’는 데서 시작된다. 1909년 5월 30일 ‘황성신문’에는 ‘욕불절(浴佛節)인 고로 덕수궁에서 의친왕 이하 각 황족(皇族)에게 주찬(酒饌)을 하사하셨다더라’는 기록이 보인다.
그러나 1910년 이후 조선이 일본의 식민지배에 들어간 직후에는 행사 주관이 일본의 정토종측으로 변했고, 1911년 행사는 일본 순사가 직접 보호를 했다는 기사가 있다. 1912년부터는 행사 규모가 점점 커져 낮과 밤에 걸쳐 두 번씩 행사를 하게 됐다. 이 해는 서울 종로구 수송동 각황사에서 행사를 시작한 해이기도 하다.
1920년에는 조선신도회가 주최한 초파일 봉축행사에 참가하려는 사람이 너무 많아 입장권을 발행하기도 했으며, 법요식 뿐 아니라 설교ㆍ강연ㆍ음악ㆍ무용 공연 등 다채로운 문화행사가 열렸다. 관불과 관등행사로 활발하게 진행됐다.
1937년부터는 조선총독부의 지시로 초파일 행사가 음력이 아닌 양력으로 치러지게 됐으며, 이는 해방 후 다시 음력 행사가 공식적인 행사로 자리 잡았다. 1940년대에는 종파마다 다르게 진행되던 행사를 종파연합으로 치르기도 했다. 광복 이후에도 비슷한 형태의 관불행사 및 욕불행사, 관등 등이 지속적으로 이어졌다.
▶제등행렬은 1955년 조계사에서 시작
현재 치러지고 있는 형태의 제등행렬은 1995년 조계사에서 시작됐다. 이 해 제등행렬은 조계사를 출발해 종로3가→을지로3가→시청→중앙청을 거쳐 다시 조계사로 이어졌다. 이후 1962년까지 조계사와 동국대 부근에서 치러지다 63년 무대가 동국대학교로 옮겨졌다. 63년 제등행렬은 동국대를 출발해 을지로3가→종로3가→조계사→중앙청→태평로→을지로입구→을지로4가를 거쳐 동국대로 돌아오는 일정으로 진행됐다.
75년 초파일의 공휴일 제정으로 인해 제등행렬의 참여인원이 대폭 확대됐으며, 이어 76년부터 95년까지는 여의도로 자리를 옮겨 여의도광장을 출발해 조계사에 이르는 구간에서 실시됐다. 이후 1996년 동대문운동장으로 장소를 옮겨 지난해인 2007년까지 치러졌다. 동대문운동장 철거로 인해 올해부터는 동국대를 출발해 조계사에 이르는 구간에서 제등행렬이 진행될 예정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