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산 동림사(東林寺) 혜원 스님의 문하에는 수많은 거사들이 활동했다. 그중 가장 뛰어난 공로를 남긴 거사는 사령운(謝靈運)과 류유민(劉遺民: 352-410) 거사이다. 류유민 거사는 당시 최고의 가문 출신으로 고위 관직을 두루 거치며 사치하고 호탕했던 사령운 거사와 대조적이다. 류유민 거사도 한(漢)나라 초원왕(楚元王)의 후예로 귀족가문 출신이다. 어려서 부친을 여의고 홀어머니를 극진히 모셨고, 뛰어난 실력을 지녔지만 결코 드러내지 않고 겸손했다. 동진(東晋)의 승상 환원(桓元)과 시중(侍中) 사곤(謝琨), 태위(太尉) 류유(劉裕) 등 당시의 최고 실권자들이 류 거사의 실력을 알아보고 관직을 추천하여 참군(參軍)과 현령(縣令)을 맡았다. 그러나 얼마 지나지 않아 당시 혼란한 정세를 비판하며 관직을 거절했다. 거사는 친하게 교류하던 주속지(周續之)와 도연명(陶淵明) 등과 함께 관직에서 물러났고, 당시 사람들이 그들을 ‘삼은(三隱)’이라 칭했다.
관직에서 물러난 후, 거사는 동림사 혜원 스님을 찾았다. 팽제청(彭際淸)의 <거사전>에는 혜원 스님과의 만남을 다음과 같이 묘사한다. 스님이 “관록이 높고 높은데 어째서 마다하는가?”라고 묻자 거사는 “동진은 반석이 견고하지 않고, 세상이 계란을 쌓아 놓은 듯하니 어찌 제가 관직을 맡겠습니까? 태위 류유가 저의 굽히지 않음을 보고 ‘유민(遺民)’이라는 호를 주었습니다”라고 말했다. 거사의 이름이 본래 ‘정지(程之)’였으나, 관직을 그만 두고 평민으로 남아 있다는 의미의 ‘유민’을 호로 삼게 된 유래다.
혜원 스님 문하에 들어온 거사는 서림(西林)의 계곡 북쪽에 선방을 지어놓고 청빈하게 수행했다. 류유민 거사가 혜원 스님 문하로 들어오자 뢰중륜(雷仲倫), 장래민(張萊民), 장수실(張秀實) 등이 거사를 따라 입산했고, 후에 주속지와 도연명 등도 동참했다.
<거사전>에 따르면, 수행하는 거사들의 숫자가 많아지자 혜원 스님은 류유민 등 거사들에게 “여러분이 이 도량에 온 것은 분명 정토에 뜻이 있는 것 아니겠는가?”라고 말하며 ‘백련결사(白蓮結社)’를 결성했다고 한다. 류유민 거사가 관직을 버리고 혜원 스님의 문하를 찾은 것이 태원(太元) 10년(395)이고, 백련결사가 결성된 때가 원흥(元興) 원년(402) 7월의 일이니, 거사가 혜원스님의 문하에 머문 지 7년 정도의 시간이 흐른 뒤였다.
‘백련결사’와 관련된 자료에서 혜원 스님이 행한 ‘염불삼매(念佛三昧)’의 수행과 관련된 것 외에 결사의 동기를 짐작하게 하는 기록은 보이지 않는다. 그런데 도선(道宣)의 <석혜원여류유민서(釋慧遠與劉遺民書)>의 주에 따르면, “류유민 거사가 혜원 스님 문하에 머물자 종병(宗炳), 장야(張野), 주속지(周續之), 뇌차종(雷次宗) 등 당시 뛰어난 문인과 학자들이 모두 한자리에 모여 불법의 도리를 깊이 연구했는데 그 중 류유민 거사가 가장 뛰어났다. 류 거사는 이런 모임을 영원히 지속하기를 희망했다”는 내용이 보인다. 여기서 필자는 ‘백련결사’의 결성이 류유민 거사가 혜원 스님에게 건의해 이루어진 것이라 추론한다. 특히 앞에서 언급된 모든 거사들이 ‘백련결사’의 주요 구성원이었던 사실은 그 심증을 더해준다.
‘백련결사’는 동림사 반야대(般若臺)에 무량수불상(無量壽佛像)을 앞에서 ‘염불삼매(念佛三昧)’를 닦고, ‘서방왕생(西方往生)’을 기원하는 서원으로 결성됐다. 혜원스님을 필두로 해 혜영(慧永), 혜지(慧持), 담순(曇順), 담항(曇恒), 도생(道生), 혜예(慧叡), 도경(道敬), 도병(道昺), 담선(曇詵), 백의(白衣), 서역으로부터 온 불태야사(佛?耶舍) 등의 스님들과 류유민, 장야, 종병, 장전(張詮), 주속지, 뢰차종 등의 18인을 상수(上首)로 한 승속을 포함한 123명이 참여했다. 혜원 스님은 류유민 거사에게 <발원문>을 짓도록 했다. ‘백련결사’는 동참자들이 점차로 늘었고, ‘정토’의 가르침이 흥성하는 계기가 됐다. 또한 한국과 일본에까지 커다란 영향을 끼쳐 ‘결사(結社)’의 선범(先範)이 되었다. 중국에 있어서는 원(元)나라 지대(至大) 원년(1308)에 ‘백련결사’를 황제의 령으로 금지시켰다가 동림사의 우담보도(優曇普度: ?-1330) 스님이 <여산련종보감(廬山蓮宗寶鑑)> 10권을 찬술해 황제에게 상주하고 그 종지를 밝힘으로 다시 재개돼 현재에까지 이어졌다.
류유민 거사는 ‘백련결사’ 이후에 더욱 염불수행에 정진했다. 그의 전기에는 류 거사가 ‘백련결사’ 후 3년째 수행할 때 선정(禪定) 가운데 아미타불의 광명이 땅을 비치니 모두 금색으로 변하는 것을 봤다고 한다. 그로부터 수년 후 한마음으로 염불수행 하던 중에 아미타불이 옥호의 광명을 비치며 팔을 드리워 이마를 어루만진 일도 있었다. 류유민 거사가 “어찌해 여래께서는 저의 이마만을 만지십니까? 옷으로 저를 덮어 주십시오”라고 하자 부처님이 이마를 만지시며 가사를 끌어 그를 덮어줬다. 후에 또 다른 꿈에서는 거사가 칠보의 연못에 들어가니, 청색과 백색의 연꽃들이 가득한데 그 물이 매우 맑았다. 이마에는 원광(圓光)이 빛나고 가슴에는 만자(卍字)가 드러나 있는 어떤 사람이 연못의 물을 가리키며, “팔공덕수(八功德水)다. 너는 이 물을 마셔 보거라”라고 말했다. 거사가 물을 마시니 매우 감미로웠다. 잠에서 깼을 때도 한동안 기이한 향기가 몸에서 풍겼다. 그때 류 거사는 사람들에게 “내게 정토의 인연이 이르렀다”고 말하고는 스님을 청해 <묘법연화경>을 수백 번을 염송했다. 그 후 류유민 거사는 불상에 향을 피우고 두 번 절하고 축원하기를, “저는 석가모니불의 유교(遺敎)로써 아미타불이 계시는 줄을 알았습니다. 이 향을 석가여래불에게 공양하고, 다음에는 아미타불과 <묘법연화경>에게 공양해 정토에 태어나기를 발원합니다. 이 경전의 공덕으로 모든 유정이 정토에 왕생하기를 서원합니다”라고 말하고는 대중들에게 작별을 고하고, 서쪽을 향해 합장하고 입적했다. 거사는 입적 전 아들에게 “관 대신 흙으로 벽을 쌓아 무덤을 만들라”고 했다고 전해진다.
거사가 입적한 지 6년 후, 혜원 스님이 감실(龕室)에서 좌선하다 깨어보니, 아미타불의 불신이 허공에 가득 차 있었고 관세음보살과 대세지보살이 좌우에서 시봉하고 있었다. 류유민 거사와 먼저 입적한 스님들이 합장하며 말하기를, “대사는 일찍이 발심했는데, 어째서 이리 늦게 오십니까?”라고 했다. 7일 후 혜원 스님이 입적했다.
류유민 거사는 철저히 염불수행에 매진했다. 하지만 류우민 거사의 사상은 단지 ‘염불수행’과 ‘왕생정토’에 국한되지 않는다. 류거사는 당시 유행하던 반야학에 대해서도 상당한 조예를 보였다. 구마라집(鳩摩羅什)의 수제자인 승조(僧肇)가 찬술한 <반야무지론(般若無知論)>을 도생 스님이 북방에서 가져왔을 때 류 거사는 읽고는 찬탄을 금치 못했다. 그리고 혜원 스님에게 보여주자 스님도 감탄하며 거사에게 몇 가지 의문점들을 승조에게 질문하도록 했다. 이렇게 전해지는 것이 바로 승조의 <조론(肇論)>에 실려 있는 <류유민서문부(劉遺民書問附)>이고, 이에 대한 승조의 답장이 <답류유민서(答劉遺民書)>이다. 여기에서 거사의 예리한 탁견을 엿볼 수 있다. 거사의 질문과 승조의 답변은 당시 남북으로 대별된 불교학풍의 차이를 느낄 수 있어 흥미롭다. 승우(僧祐)의 <출삼장기집(出三藏記集)>과 도선(道宣)의 <대당내전록(大唐內典錄)>에 따르면, 거사에게 <석심무의(釋心無義)>라는 저작이 있다고 하지만 아쉽게도 현존하지 않는다.
류유민 거사가 살았던 시기는 서진의 멸망과 동진의 건국, 그리고 제후들의 궐기로 인해 전란이 끊이지 않고 제국의 명멸이 교차하던 중국 역사상 가장 복잡한 시기였다. 혜원 스님의 철저한 수행과 ‘사문(沙門)은 세속의 왕에게는 예를 표할 수 없다’는 출가인의 기개로 여산 일대는 정치적 무풍지대로 인정받아 혼란기에도 불법의 혜명을 존속할 수 있었다. 여기에 중국불교사상 최초의 ‘결사’인 ‘백련결사’가 큰 역할을 했음은 물론이다. 필자의 추론처럼 ‘백련결사’가 류유민 거사의 건의로 이뤄졌던 혹은 혜원 스님의 결정에 의한 것이든 관계없이 자료들은 류유민 거사의 이름을 중요하게 다루고 있고, 백련결사가 재가자와 출가자를 모두 포함하고 있음은 중요한 의의를 가진다. 또한 류유민 거사가 보여준 철저한 수행은 과거와 현재는 물론 미래에 이르기까지 거사불교의 귀감이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