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기 2568. 10.23 (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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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와 불교를 찾아 떠난 스리랑카②
무릉가 나무가 있는 차밭. 낮은 차나무 사이에 시원시원한 큰 키는 차밭의 공간미와 시각적인 아름다움을 더한다.

스리랑카에서 가장 살기 좋은 계절이라는 1월이지만 한낮의 기온은 무려 30도를 넘나든다. 아침저녁 살랑대는 서늘함도 잠시, 해만 뜨면 한 여름처럼 땀이 난다. 천장에 높이 달린 선풍기가 졸음이 덜 깬 사람처럼 설렁대지만 더위 식히기에는 역부족이다. 가장 무더운 4월에는 무려 40도를 넘는단다.

더위야 어떻든 구수하고 향기로운 카레 냄새는 스와띳까아가 만드는 맛있는 음식에서 나는 기분 좋은 냄새다. 임 선생 댁의 주방장격인 그녀는 자신이 만든 음식에 대한 자부심이 대단하다. 간혹 주방에서 마주치면 음식은 손으로 만들어야 한다느니, 이것은 어디에 좋다느니, 장황한 설명이 이어지지만 결코 싫지 않다. 그녀는 아침마다 부처님께 꽃을 올린다. 태생적이고도 절대적인 신앙심이 몸에 밴 것이다. 그녀의 이 마음은 잔잔한 감동을 일으키는 묘한 힘이 있다.

다음 날, 우리는 콜롬보를 떠나 왓뎃가마에 있는 후나스로 떠날 예정이다. 콜롬보에서 캔디로, 캔디에서도 네 시간 반이나 차를 타야한다니 무려 여덟 시간은 족히 소요되는 먼 곳이다. 더구나 콜롬보에서 캔디로 가는 길은 영국 사람들이 19세기 커피를 운송하기 위해 만든 우마차길로, 커피와 홍차가 쉴 새 없이 운송되던 역사적인 길이라니 감회가 새롭다. 이 길을 지났을 많은 사람들. 그들은 무엇을 위해 길을 지났으며, 나는 또 무엇 때문에 이 길을 가고 있는가. 때로는 우마차로, 때로는 해진 신발을 신고서 지났을 이 길을 지금은 자동차로 지난다.

그 뿐인가. 이 길은 아시아에서 가장 먼저 개통된 고속도로란다. 하지만 지금의 이 길은 옛 길이 아니다. 오히려 어설프다 못해 실밥이 풀린 해진 옷처럼 허술하기 짝이 없다. 간간히 도로를 넓힐 셈인지, 아스팔트포장길 가장자리를 붉은 황토로 다지는 공사가 한창이다. 다져진 붉은 황토 길과 검은 아스팔트 도로가 대조적인 색조를 이루고 있어 묘한 조화를 이루고 있다.

옛날에도 길을 따라 늘어선 야자나무, 물이 고인 늪지엔 어김없이 보라색 수련과, 하얀 수련이 피어 있었을 터. 잠시 차를 세우고 언뜻 스칠 꽃향기를 기대했지만 꽃 향은 불전에 공양을 준비하는지 미동조차 없다.

이러 저러한 풍경을 뒤로 하고 도착한 후나스풀호텔. 한때 영국인의 피서용 방갈로가 있던 곳이지만 지금은 방갈로를 개조해 호텔로 쓰고 있다. 아기자기한 작은 규모의 호텔로 천혜의 자연조건을 완벽하게 갖추었다. 좌청룡 우백호를 완벽하게 구비한 지세와 안산 격인 앞산의 크고 작은 준령은 편안하고 후덕해 보인다. 무려 1400m이상 고지에 위치해 있으니 천상에서 세상을 내려 보는 듯 발아래 펼쳐진 아침 운해, 이곳은 분명 별천지다. 낮은 기온 탓인지 밤사이 내린 이슬이 보석처럼 영롱하다.

이 호텔 주변에는 사방어디에나 영국인들이 조성한 대규모 차밭이 있다. 해발 1700m에 자리한 고지대 차산지. 바위 사이에 자라는 차나무는 건실하다 못해 기름을 친 듯 번들거린다. 건너편 산등성이까지 온통 차밭이니 차밭 속에 호텔이 있는 셈이다. 듬성듬성 차나무 사이에 심은 무릉가나무가 그늘과 영양분, 물을 공급해 준다. 키 큰 무릉가나무 때문인가 제법 운치가 있다. 파란 차밭 사이로 차를 따는 파밀 여인들의 모습이 멀리서 보는 그림처럼 가물거린다. 이곳에서 후나스 차가 생산된다는데 초입에 있던 차 공장은 한산해 보였다.

초기 영국인들이 만든 방갈로. 휴식을 위한 공간이면서 차밭을 관리하던 곳으로 전형적인 고지대 차밭이다.

최근 만들어진 캔디 지역의 어설픈 저지대 차밭과는 대조를 이루는 스리랑카의 대표적인 고지대 차산지인 후나스, 캔디, 누와라엘리야, 하뿌딸레, 수리야칸다는 어디서나 영국인들의 흔적이 남아 있다. 잘 관리된 차밭이 그렇고, 아무리 높은 곳에 위치한 차밭이라도 차를 운송하기 위한 도로가 있는 것이 특징이다. 어디를 보아도 허술한 구석이 없다.

결론적인 말이지만 스리랑카에 차를 옮겨 심은 것은 영국인들이었다. 그들은 많은 실험과 노력을 통해 스리랑카의 실론 차를 만들었으며, 홍차라는 색다르고도 새로운 차의 신기원을 열었다. 홍차는 영국인 일상생활에 더없이 좋은 변화와 풍요한 부를 가져왔다. ‘황금의 술’이란 홍차의 별호는 딤불라, 우와, 누와라엘리야 지방의 농장주들이 만들어낸 말이다. 그들에게 부를 안겨준 신비한 오렌지빛 차는 밭에서 나는 황금이었다.

홍차의 성공은 기실 1842년 커피산업이 몰락한 후 람보다 지역에 차나무 재배를 시도한 메슬리와 웸스의 실험정신이 실마리를 열었다. 이후 ‘차밭에서 직접 찻잔으로’라는 슬로건을 내 건 립톤 회사는 실론 차의 명성을 세계에 알렸으며, 립톤 티백을 만들어 홍차를 언제 어디에서든 편리하게 먹을 수 있는 대중 음료로 성장시켰다. 립톤이 이곳에 머무르며 차를 연구하고 사업을 구상하던 남부 구릉지대인 데니야야 고원 남쪽 1960m에 지금도 ‘립톤의 휴식처’라는 곳이 남아 있다.

이러한 홍차산업의 발달은 커피산업의 몰락 이후이다. 처음 스리랑카를 차지한 영국 사람들의 가장 큰 관심사는 커피재배였다. 스리랑카에서 커피가 재배되기 시작한 것은 1825년 조지버드라는 영국인의 감뽈라 농장이며 캔디와 누와라엘리야 사이에 있었다. 후일 커피의 대부분이 이 지역에서 재배되었고, 대단위 커피 농장도 이 지역을 중심으로 생겨났다. 특히 그로체스터의 유명한 바텐더 존 웨슬리와 그의 조수 화이트 필드가 커피를 대중음료의 반열에 올려놓은 이후, 유럽 사람들에게 커피는 황금을 안겨주는 보물처럼 인식되었다.

스리랑카의 6대 총독이던 에드워즈 번즈는 그의 부하 스키너 대령에게 캔디에서 누와라엘리야를 연결하는 도로 개설을 지시, 대량으로 생산된 커피를 운송할 도로를 만들게 했다. 이 길의 개통에는 수많은 스리랑카 사람들의 피와 땀, 그리고 고통이 만들어 낸 아픈 역사의 길이었지만 영국인들에게는 황금을 안겨 주는 길이기도 하였다. 늘 이러한 역사의 인과는 피할 수 없는 것인가. 이 길을 지나며 느낀 참담한 마음은 무엇 때문인가.

건조하기 위해 널어놓은 커피콩들. 커피는 한때 스리랑카의 보물이기도 했다.

한편 스리랑카에 커피 재배가 기후와 맞지 않다는 것을 주장한 것은 식물학자 투아이테스 박사였다. 그는 찰스 다윈과 절친한 친구로 5대 총독인 그레고리총독에게 붉은 버섯 균이 창궐할 것이며, 결국 버섯 균은 커피의 열매를 맺지 못하여 결과적으로 나무가 폐사되고 말 것이라고 경고했다. 그러나 당시의 사람들은 그 말에 귀를 기울이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오히려 유언비어를 유포하는 비판자라고 비난했다. 이 일이 있은 후 그는 커피 재배에 손을 떼고 식물원 일에 매진해 커피 대신 심을 수 있는 작물로 기나나무와 차나무를 권장했다. 얼마 후 그의 경고는 현실로 나타났고, 많은 커피 재배 농장은 몰락하고 말았다. 지금도 스리랑카 어디에서나 쉽게 커피나무를 볼 수 있는 것은 이런 역사적인 사연이 있기 때문이다. 실제로 스리랑카에서는 길가에 널어놓은 커피콩을 종종 볼 수 있다.
박동춘 동아시아차문화연구소장 |
2008-03-10 오전 9:04: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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