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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08년 11월 창간된 잡지 <소년>에 발표된 최남선의 ‘해에게서 소년에게’는 한국 신체시의 효시임과 동시에, 한국 현대문학의 시작이었다. 100주년이 되는 2008년 한국 문단이 떠들썩한 가운데, 한국 현대소설과 불교의 관계를 다룬 논문이 있어 눈길을 끈다.
2월 20일 선학원에서 열린 한국불교선리연구원(원장 법진)의 제4차 월례발표회에서 장영우 교수(동국대 문예창작)는 ‘현대소설과 불교’를 주제로 발표했다. 장 교수는 불교가 국교로 추앙되던 신라, 고려 시대는 물론 배척받던 조선시대에도 문학에 동량이었지만, 근현대에 이르러 불교문학이 다양한 유형 중 하나로 분류됨과 동시에 양적으로도 위축됐다고 평가했다. 그는 현대시보다 현대소설에서 불교문학의 입지가 더욱 좁아졌다고 진단했다.
한국 현대소설의 문제점을 찾아 해결방안을 찾고자 한 장영우 교수는 이광수, 김동리, 김성동 등의 작품에 담긴 불교적 세계관과 상상력에 주목했다. 장 교수는 “불교와 연기론과 윤회설이 한국문학의 저변을 이루고 있음에도 주제론이나 제제론에 그칠 뿐, 불교의 독특한 사유체계나 상상력을 문학기법과 연관해 입론화하려는 체계적 노력이 보이지 않는다”고 평가했다. “연기와 윤회, 무상과 공을 주제로 한 작품을 불교문학이라고 분류하면서도 정작 불교의 가르침인 ‘나는 누구인가’라는 근본문제를 추구하는 작품을 서구적 분류방식에 따라 성장소설로 이해한다”는 점도 지적됐다.
장 교수의 날카로운 비평은 이광수의 ‘원효대사’, 김동리의 ‘등신불’, 김성동의 ‘만다라’ 등에 대한 직접적인 분석으로 이어졌다. 그는 “이광수의 ‘원효대사’가 불교에 대한 깊이 있는 표현 없이 이광수 자신의 사상을 전달하기 위한 방편이었다”고 평했다. 작품의 “고(苦)도 공(空)이요, 락(樂)도 공(空)”이란 표현을 들어 “왜 고가 공이며, 락이 공인지에 대한 설명 없이 독자의 직관에만 기대는 단순한 동어반복적 진술에 지나지 않았다”고 말했다.
불교소설의 대표작으로 이해되는 김동리의 ‘등신불’을 두고 장 교수는 “만적선사의 소신공양을 액자 속 이야기의 핵심사건으로 설정해, 소신공양이라는 가장 처절하고 감동적이며 인간적인 성불의 한 유형을 문학적으로 형상화했다”고 하면서도 “정통 불교보다 무속에 습합된 기복불교의 성향을 보이고 있다”는 비판도 했다.
승려 출신 작가 김성동의 ‘만다라’에 대해 “기존 불교소설의 수준을 단숨에 뛰어넘은 문제작”이라고 평한 장 교수는 “제재, 주제 뿐 아니라 문체와 구성 등 소설의 기법적 측면에서도 우수하다”고 말했다. 승려였던 작가의 체험이 바탕된 핍진성과 진정성을 담보로 한 작품이라는 점을 높이 평가한 그는 “상구보리에만 집착하고 중생 제도에 대해서는 침묵한 점은 아쉽다”면서도 ‘만다라’를 김성동의 작품 중 수작으로 꼽았다.
장 교수가 주장하는 불교소설은 어떤 것일까? 그는 “불교소설은 불교적 세계관과 상상력이 작품의 내적 구성원리로 수용되야 한다”고 말한다. “진정한 불교소설은 제재나 등장인물의 신분 등과 무관하게 불교적 진리와 가치관을 추구하는 내용의 작품이어야 한다”고 역설하면서 황석영의 ‘삼포가는 길’과 정채봉의 ‘오세암’을 예로 들었다.
‘삼포가는 길’은 열여덟살에 사창가로 팔려온 백화의 이야기로 그녀의 순수한 본성과 참된 사랑의 의미를 전달하는 작품이다. ‘5세 동자의 오도’라는 불교설화를 창작동화로 재구성한 ‘오세암’은 다섯 살 난 어린아이가 순수한 염원으로 관세음보살을 염송해 부처가 되었다는 이야기다.
장 교수는 좋은 불교소설을 위해 “작가와 독자는 소재주의의 유혹에서 벗어나야 하고, 문단과 불교계에는 불교적 세계관과 상상력의 확장과 불교문학의 외연과 내포를 확장하는 노력을 계속해야 한다”고 주문했다. 장영우 교수의 발표는 그가 불교소설 대중화를 위해 제안한 “불교설화를 현대소설로 재창작하는 작업”과 “참된 자아를 찾는 성장소설과 편력담에서 불교소설의 새로운 가능성을 발견하는 일”을 과연 누가 할 것인가에 대한 과제를 남겼다.
한편 ‘세종조의 불교정책’을 발표한 이종우(한국학중앙연구원 종교학과 박사수료)씨는 세종조에 실시된 불교정책을 ‘불교통제정책’과 ‘불교용인정책’으로 구분해 “당시 억불만이 있었던 것이 아니라 불교를 이용하기도 했고, 억불책을 펴지 못한 경우도 있다”는 주장을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