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기 2568. 10.25 (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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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별기고] 숭례문의 주검을 바라보며
“실정과 학문적 오류에 대한 하늘의 응징”
숭례문 화재의 현장을 바라보는 국민의 마음은 참담하기 이를 데 없다. 매일 일간지들은 몇 페이지 씩 대서특필하고 있다. 화재가 일어났던 날 나는 이침 일찍 통도사로 향하고 있었다. 괘불을 조사하기 위해서였다. 그 날 저녁 TV 뉴스에서 30여분에 걸친 자세한 보도를 접했다. ‘나라의 대문’이 무너지는 장면은 나라가 무너지고 하늘이 무너지는, 불길한 예감마저 들었다. 전국이 초상난 집처럼 적막감이 흐르는 듯했다. 나는 세 가지 면에서 이 국가적 비극을 살펴보고자 한다.

모든 것의 원인을 거슬러 올라가 보면, 우선 방화범 개인의 국가에 대한 원한에서 비롯되었음을 알 수 있다. 즉 2002년 경기도 고양시 일산에 있는 자기의 토지가 재개발되는 과정에서 충분한 보상을 받지 못해 분노를 이기지 못하여 불을 질렀다고 한다. 토지와 단독주택에 상응하는 4억의 보상금이 1억에 그치자 수차례 탄원했고 행정심판을 청구했어도 패소했다. 아마도 그 후 그는 집이라도 장만했는지 70세 된 노인이 끼니를 어떻게 꾸려가고 있는지 아무도 관심 이 없는 듯하다. 결국 모든 것이 정부의 실정에 말미암은 것임을 알 수 있다. 우리나라는 지금 사찰 주변은 말할 것도 없고 온 국토가 공사판으로 자연이 극도로 훼손되고 있다. 무자비한 약육강식의 세태에서 약자의 억울함이 얼마나 많을 것이며 호소할 데 없는 그들의 원한이 얼마나 클 것인가. 불교는 모든 중생이 평등하다는 진리를 가르치고 있음을 명심해야 한다.

또 하나는 문화유산에 대한 애정이 없다는 것이다. 문화예술 관련 부서에 종사하는 사람들은 개인적 이익과 권력에 관심이 있을 뿐 문화유산에 대한 애정이 없다. 문화유산을 올바로 연구하고 이해하고 대중에게도 전달한다면 모두가 문화유산에 대하여 애정을 갖게 되며, 따라서 올바로 관리하려는 의무감을 자연히 갖게 될 것이다. 대학에서 학생들에게 올바로 가르치는 곳이 별로 없으니 악순환은 계속 될 뿐이다. 숭례문의 경우, 신문지상에 언급되는 것은 막연한 애탄뿐이다. 어느 학자 한 사람 이 숭례문의 예술적 가치를 말하는 것을 보지 못했다. 그저 궁궐 건축의 하나로 가장 오래된 조선초기의 건축물이라느니 웅건한 건축이라느니 하는 내용뿐이다. ‘문(門)’이란 중요한 상징을 띤다. 사찰의 ‘일주문(一柱門)’, ‘사천왕문(四天王門)’, ‘불이문(不二門)’ 등을 거치는 것은, 절대적 진리인 법계라는 세계로 들어가기 위하여 일종의 통과의례 절차를 겪는 과정이다. 우리는 그 문을 통과하면서 영화(靈化)되는 자신을 발견한다. 우리는 그렇지 않고는 절대적 진리의 세계에 결코 들어 갈 수 없다. 그와 마찬가지로 숭례문은 우리나라의 궁성에 들어가는 정문(正門)이며 대문(大門)이라는 상징성을 띤다. 즉 하늘의 아들이란 천자(天子)의 위상을 지닌 세속적인 절대적 존재가 거주하는 세계이기 때문이다. 이러한 상징을 모르니 애정이 생길 리 없다.

셋째로, 우리나라의 건축은 이번 화재로 얼마나 다른 나라에 없는 건축적 요소들을 구비하고 있는지 알 수 있는 계기가 되었다. 우리의 건축은 지붕에 용의 얼굴을 장착했다. 또 기와에는 연꽃을 장식했다. 그리고 공포(栱包)는 신령스러운 기운을 형상화한 모양인 영기문(靈氣文)을 띠고 있다. 용과 연꽃은 모두 물을 상징하고 있으며 공포도 물에서 일어나는 신령스러운 기운이어서, 우리 조상들이 삼국시대 이래 얼마나 화마(火魔)를 무서워했는지 알 수 있다. 서울 한복판에서 현대장비를 모두 동원하여도 불을 끄지 못한 것을 보면, 예부터 우리의 건축에는 다른 나라와 달리 그 화마를 방지하려는 간절한 염원이 깃들어 있음을 알 수 있다. 그래서 온갖 상징을 띤 조형들로 심혈을 기울여 건축을 최고의 예술품으로 승화시키려 했는지 오히려 증명되고 있지 않은가. 우리가 우리의 건축에서 용을 일본인들이 가르친 대로 귀면(鬼面)이라 부르고, 연꽃을 단지 장식이라 인식하고, 공포를 공허하게도 번잡한 소의 혀 바닥이라 부른다면, 우리 문화유산에 대한 자긍심을 가질 수 없다.

이번 화재는 정부의 실정과 학문적 오류 등 총체적인 정체성의 상실에서 일어난, 하늘의 응징이라 할 수 있다.
강우방 일향 한국미술사연구원장 |
2008-02-20 오후 1:22: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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