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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불교를 불교인지도 모르고 배웠다. 경남 하동에서 태어나 6.25 전쟁 때 전주로 피난을 갔다. 전주고에 다니던 나는 서정주 시인에게 국어를 배웠고, 미술가였던 나상만 선생에게 미술을 배웠다. 중학시절 읽었던 <슈바이처 전기>에서 큰 감명을 받았다. 어려운 사람을 돕고 싶은 마음뿐이었지만 당시는 ‘사회복지’라는 말도 학문도 없었다. 다만 어린 마음에 어려운 사람을 돕는데 철학과 자금이 필요하다 생각했다.
고교 2학년 때 하동 쌍계사에 출가하러 갔었다. 고등학교나 마치고 오라고 퇴짜 맞았다. 다시 학교로 왔지만 복학이 안됐다. 전국 유랑이나 하자는 마음으로 이리저리 발길 닿는 곳으로 떠돌아 다녔다. 대전역 앞에서만 거지들과 1달 반을 생활했다. 지금도 어릴 적 배운 학교공부는 기억나지 않아도 1년 동안 유랑생활을 통해 얻은 경험들은 생생하다.
고등학교로 돌아온 나는 신학과 유학, 불교학을 사이에 두고 고민 했다. 서양철학을 전공하던 선생 한분이 내게 불교학을 공부하라는 추천을 했다. 당시 동국대 불교학과는 후기였다. 재수를 할 형편도 못됐지만 나는 전기시험을 치루지 않았다. 그만큼 불교학과에 진학하겠다는 신념이 확고했다. 대학공부를 하며 노점상, 포장마차 닥치는 대로 다했다. 학부를 마치고 나니 대학원 공부가 필요했다. 석사를 마치니 중간에 그만 둘 수 없었다. 내친 김에 박사과정까지 마쳤다.
내 공부는 은사인 故 홍정식 교수가 없었다면 어려웠다. 홍 교수는 내 후견인이었다. 생활이 어려웠던 내게 아르바이트 자리는 물론 강의 자리까지 주선해 줬다. 지금도 그렇지만 당시도 불교학 졸업자는 갈 곳이 마땅치 않았다. 교법사 시험을 1등으로 통과한 나는 대동상고에 발령받았다. 박사과정을 대동상고에서 선생을 하며 보냈다.
<도선과 그의 비보사상>이라는 논문을 발표했다. 다들 중국도참설로 알고 있는 것이 밀교에서 유래한 것이라는 내 논문에 故 조명기 박사 등 교수들 칭찬이 자자했다. 그 논문 덕에 나는 교수가 됐다.
독서는 사람을 변화시킨다. 책을 계속 읽다보니 견해가 바뀌었다. 30대 출세의 발판이 됐던 도선국사에 관한 논문을 50대에 다시 썼다. 용감했던 30대에는 “도참, 음양오행 모두 아니다. 오로지 밀교”라고 썼지만 50대 내 논문은 “원류는 밀교지만 음양오행, 도참도 스며있다고 본다”로 바뀌었다. 강의도 그랬다. 젊은 시절의 강의는 이론과 주장만 강조하며 시비가 분명했다. 50대가 넘으니 자료와 견해를 소개하고 바르게 공부하는 방법을 가르쳐 주는 것으로 바뀌었다. 외부강의를 하면서는 남에게 박수 받을 방법만 연구했다. 어려운 사람 도우라는 뻔한 말들로 박수를 받았다. 세월이 흐르니 어느 순간 등줄기에 식은 땀이 흘렀다. 나는 그들을 기억 못해도 그들은 나를 알지 싶었다. 괴롭고 부끄러웠다. 그 이후부터 나는 지하철 걸인 하나 지나치지 않았다. 천원짜리를 꺼내 건넸다. 하지만 아주 천천히 건넸다. 나를 알아볼 사람은 어서 알아보라고.
지관 스님 총장 시절, 6.29 선언 등 민주화시위가 한창일 때 학생처장을 맡으며 어느 누구의 압력에도 굴하지 않고 소신 있게 처신했다. 소신으로 재단과 학교, 학생들에게 인정받다보니 정년까지 22년을 보직을 쉬지 않고 맡았다.
관리처장을 맡을 때다. 당시 난로 설치하고 철거하는데 석달씩 걸렸다. 직접 현장에 가봤더니 용역 직원들이 어려운 환경에서 힘들게 일하고 있었다. 정인악(불교대학원 동문회장)씨에게 200만원만 달라고 했다. 그 돈으로 엠버서더 호텔 부페를 대접했다. 남은 돈으로 청평야유회를 갔다. 내게 “처장님…, 아저씨…, 형님…” 하던 용역 직원들은 “처음으로 인간대접 받는다”고 했다. 이후 석달 걸리던 난로 설치와 철거는 10여일로 줄었다.
22년 보직을 이어 살면서 그래도 잘살았다고 생각할 때가 요즘이다. 퇴직 후에도 많은 사람들이 나를 찾는다. 사람을 인정하고 아껴야 한다. 사람 하나도 보듬지 못한 자가 어찌 수행하고 성불하겠는가. 특히 종교 하는 사람은 남에게 나서기에 앞서 내가 됐느냐의 자성이 필요하다. 들려주는 설법보다 보여주는 설법을 해야 한다. 된 만큼 말해야 하고 말한 만큼 되야 한다. 불교는 이론과 실천이 겸비돼야 한다. 일례로 성철 스님이 화두를 “몽중일여, 동정일여, 숙면일여 해야 한다”고 한 것을 경험 없는 자들은 단계로 착각한다. <능엄경>에 “이근 통달만 되면 육근이 통달한다”고 하지 않았나? 불교는 반드시 실천이 필요하다.
대동상고 교사 시절 학생을 모아 ‘선재회’를 꾸렸다. 중학생들 머리를 깎아주고, 공병을 모았다. 꽃을 떼다 광화문에서 팔며 돈을 모아 어려운 학생을 도왔다.
하루는 수도공고 교사인 큰 딸 혜림이가 돈이 없다며 집사람과 싸웠다. 무슨 일인가 물으니 점심을 굶는 학생, 수업료 못내는 학생 등 어려운 학생을 위해 월급을 모두 써서 자기 밥값도 없다고 했다. 자식 하나는 잘 키웠다고 생각했다. 그 날 우리집 냉장고에는 ‘혜림이 밥값’이라고 쓰인 봉투가 붙었다. 나는 담배를 끊어 담배살 돈을 봉투에 넣었다. 고스톱해서 딴 돈도 넣었다. 장모님도 보탰다. 집에서 모인 돈만으로 학생 5명에게 배움의 길을 열어줬다. 사회교육원장 때는 이송자 보살(탄허문화재단)이 도와 3명 학생과 새로 인연을 맺었다. 그렇게 도움 준 학생들 중 1등한 학생은 동국대 공대 진학했다. 동국대 경주캠퍼스에 진학한 학생도 있었다. 어려운 사람을 돕겠다는 어릴 적 못다한 꿈을 이수덕, 배관성 등 제자들과 여러 교수들이 도와줬기에 가능했다.
밀교는 불교의 꽃이고 해답이다. 현교(顯敎)로는 보살 7지까지 오를 수 있다. 보살8지부터 성불하기까지는 밀교(密敎) 수행법이 필요하다. 또 현생업은 현교로 소멸하지만, 전생업은 밀교만이 가능하다. 시골 장독을 보면 워낙 오래 묵혀둔지라 장독에 찌꺼기가 있다. 찌든 때는 아무리 해도 없어지지 않는다. 옅은 찌꺼기는 물로 헹궈도 없어진다. 중간 두께는 식초로 하면 없어진다. 하지만 바닥에 눌러앉은 것은 복껍질로만 가능하다. 복껍질에 해당하는 것이 바로 진언 수행이다.
부처님은 깨달음 이후 최초 설법에서 “네가 부처다. 이 세상이 불국토다”라고 했다. 이 말은 “있는 그대로가 부처”라는 말이다. 중생이 어리석어 계속 물었다. ‘어찌해야 부처가 됩니까’하는 물음에 ‘번뇌를 없애라’는 가르침이 생겼다. ‘어떻게 번뇌를 없애나요?’하는 물음에 수행법이 설해졌다. 밀교는 희론과 분별지를 떠나 선처럼 즉신성불을 강조한다.
살면서 죄를 많이 지었다. 불교를 알았기에 더 큰 악행과 악업의 유혹을 이겼다. 불교가 아니었다면 참회할 기회도 없었고, 양심의 가책도 느끼지 못했다. 어머니가 돌아가실까 전전긍긍하며 밤새 울었던 것도, 어려운 사람을 돕겠다며 시작한 것도 내가 남을 위해 불교공부 해온 이유였다.
이제는 더 이상 남이 아닌 나를 위해 불교공부를 하고 싶다. 오늘도 나는 관음정진을 하며 내 마음자리를 찾는다.
서윤길 교수는 1941년 하동 출생. 1968년 동국대 불교학과 졸업했다. 동 대학원에서 <고려시대의 밀교사상 연구>로 철학박사학위를 취득했다. 한국 밀교사상 분야의 독보적 존재로 많은 연구업적을 남겼다. 장익 교수(위덕대), 김영덕 교수(위덕대), 최성열 교수(조선대), 이정수 박사, 정성준 박사, 배관성 회장(거평프레야), 이수덕 사장(前 불교TV) 등이 논문지도를 받고 활발하게 활동 중이다. 주요 저서로 <고려밀교사상사연구>, <밀교개론>등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