합동수사본부는 2월 12일 재작년 창경궁에 불을 질렀던 채종기(70)씨가 숭례문 방화용의자로 검거해 범행 일체를 자백 받았다고 발표했다.
# 범행동기
합동수사본부에 따르면 경기도 일산에서 오랫동안 살아온 채씨는 자신의 토지가 신축 아파트 건축 부지로 수용되기 전까지만 해도 평범한 삶을 이어왔다.
채씨가 숭례문 방화를 저지르게 된 것은 1997~1998년 자신의 토지(약 99㎡)가 신축 아파트 건설 부지에 포함된 것이 발단이었다.
당시 모 건축회사는 아파트 신축을 위해 채씨 토지를 아파트 출입을 위한 도시계획도로로 수용하려 했다. 회사는 토지매입금으로 공시지가인 9600만원을 제시했지만 채씨는 4억원을 요구했다.
채씨는 요구가 받아들여지지 않자 건설사를 상대로 소송을 냈지만 패소했다. 여러 기관에 진정을 냈지만 소용없었다. 경찰은 채씨가 사회에 극단적 불만을 품게된 것이 이 시점이라고 말한다.
2006년 4월 채씨는 “일산 토지에 대한 보상을 제대로 받지 못해 사회에 불만이 있었다”며 창경궁에 방화했고 법원은 채씨가 피해 회복을 위해 600만원을 공탁한 점, 고령인 점, 특별한 전과가 없는 점 등을 감안해 집행유예 처분을 내렸다.
그러나 창경궁 방화로 법원이 부과한 1300만원의 추징금이 채씨를 경제적으로 압박했고 사회에 대한 적개심은 더욱 커져갔다.
# 범행 및 도피과정
채씨는 사회에 테러를 결심했고 종묘 등을 고민했으나 경비가 삼엄해서 포기했다. 열차 테러 등을 고민했지만 인명 살상을 방범이 제일 허술했던 숭례문을 택했다.
채씨는 2월 10일 오후 8시45분 준비된 사다리를 이용해 숭례문 서쪽 성벽을 넘어 들어갔다. 오후 8시 47분 경비업체의 적외선 감지기가 울렸다. 하지만 채씨가 2층 누각으로 유유히 올라가 바닥에 시너를 뿌리고 불을 지른 뒤 바로 빠져 나온 시간은 오후 8시 50분. 경비업체가 채씨를 막을 수는 없었다. 채씨가 숭례문 방화를 위해 준비한 도구는 접이식 사다리, 시너가 담긴 1.5ℓ짜리 페트병 3개, 라이터 1개가 전부였다.
시너에 붙인 불은 순간 불은 기둥을 타고 천장으로 번지기 시작했다. 기둥에 불이 붙은 걸 본 채씨는 들어왔던 길로 되돌아 나왔다. 숭례문을 빠져나온 채씨는 택시와 지하철, 버스를 갈아타고 일산의 아들 집에 도착했다. 그는 아들에게 범행 사실을 털어놨다. 그날 새벽 강화도 전처 집으로 돌아간 채씨는 옷도 갈아입지 않고 마을회관으로 나가 하루 종일 화투를 쳤다. 그는 2월 11일 오후 7시 40분쯤 경찰에 체포됐다.
범행 이후 만하루도 채 되지 않아 채씨는 검거됐지만 600여년 역사의 풍상 속에 꿋꿋이 버텨온 숭례문은 이미 시커먼 잿더미로 변한 후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