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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금이 없어 대학원 진학을 못하고 학원강사를 했다. 직장생활하면서도 영어ㆍ일어만은 놓지 않았다. 학부시절 미국 유학이 가고 싶어 영어를 공부했다. 김동화 박사 연구실에 빼곡한 일어책을 보며 일어를 배우기 시작했다. 동국대가 일본 고마자와 대학에 보낼 유학생을 구할 때, 일어를 잘했던 나는 일본 유학을 가게 됐다. 37세에 떠난 유학생활은 내 인생을 송두리째 바꿨다. 시골 초등교사였던 이평래를 불교학자로 키운 것은 기회를 내 것으로 만들었기 때문이다. 외국어 준비가 없었다면 오늘날 이평래는 없었다.
1940년 전북 임실에서 농부의 아들로 태어난 나는 넉넉지 못한 형편에 전주사범학교로 진학했다. 당시 전주북중 동기들은 전주고를 거쳐 서울 명문대로 진학하는 것이 보통이었지만 나만 전주고가 아닌 사범학교로 갔다. <철학개론> 수업을 듣던 중 실존철학을 배웠다. 전후 1950년대는 실존철학이 유행하던 시기였다. ‘불안을 어떻게 해소할 것인가?’하는 의문에 선생님은 이미 불교에서 다뤄진 것이라 했다. 참선 1주일만 하면 모두 해결될 문제라 했다. 어린 시절 불교에 대한 내 관심은 그렇게 시작됐다. 관심은 전주고 친구들과 함께한 불교 동아리 ‘룸비니’ 활동으로 이어졌다.
초등교사 시절이다. 서울 명문대로 진학한 친구들이 내게 상경을 권유했다. 서울에 올라오면 과외하며 돈 벌어 대학 다닐 수 있다는 것이 이유였다. 대학공부가 하고 싶어 20대 초반에 교사직을 버리고 상경했다. 학생들을 명문 중학으로 많이 진학시키면서 나는 ‘쪽집게선생’으로 유명했다. 입주과외 덕에 하숙비, 학비, 용돈 모두 해결됐다. 막연하게 동경했던 불교를 체계적으로 배워 ‘불안’에 대한 의문을 본질적으로 해결하고 싶었다. 동국대 불교학과에 입학했다. 학부를 마치고는 형편이 어려워져 대학원에 진학할 수 없었다. 직장생활을 8년여 했을 때다.
1976년. 내 나이 37세. 집사람과 아들, 딸을 데리고 유학길에 올랐다. 집사람은 직장생활 하며 가장이 돼 애들을 키우고 살림을 꾸렸다. 나는 운 좋게도 네 개의 장학금을 받았다. 교환학생으로 받는 것 외에 전주사범학교를 나온 일본인 선배들이 장학금을 줬다. 재일 조선인들이 출연한 조선장학금을 받았고, 로터리 클럽에서 주는 장학금도 받았다. 덕분에 나는 공부에 매진해 도서관에서 살다시피 했다. 남보다 늦게 유학길에 오른 내게 주어진 시간은 짧았다. 오직 제대로 불교학을 배우겠다는 일념은 내 나이 불혹(40살)과 같았다. 하지만 나이 든 내가 젊은 친구들보다 시간을 길게 쓰는 방법은 노력하는 것뿐 이었다. 그런 나를 두고 당시 친구들은 “이평래를 찾으려면 도서관으로 가라”는 말도 했다. “유학생 중 이평래가 가장 먼저 학위 받을 것이다”는 말도 있었다. 내가 열심히 공부한다는 소문들 때문이었을까? 박사학위도 받지 않았는데 충남대에서 내게 교수채용 제의가 들어왔다. 나는 학위를 마치고 가고 싶었다. 하지만 은사 다카사키 지키도(高崎直道) 교수는 흔치않은 기회라며 귀국 후 논문을 쓰라고 권유했다.
1982년 충남대 교수임용까지 6년 유학생활을 했다. 그동안 단 한번도 한국을 찾지 않았다. 동국대 출신이지만 동국대 교수들과 특이한 연이 없었다. 실력만 갖추면 된다고 생각했다.일본에 와서 보니 학부 때부터 어학기초가 탄탄히 다져있었다. 초기불교 연구자들은 빨리어를, 대승불교 연구자들은 산스크리트어를 했고, 선학 연구자들은 한문경전에 숙달돼 있었다. 모두 소설처럼 경전을 읽을 수 있었다. 동국대에서 영어ㆍ일어만 했던 나는 그들처럼 할 수 없었다. 다행히 한문경전 해석만은 뒤지지 않았다. 인도 뿌나대에 유학해 영어, 티벳어, 산스크리트어에 유창했던 은사는 ‘<보성론> 중심의 여래장사상’을 전공했지만, 나는 ‘<대승기신론> 중심의 여래장사상’을 전공했다.
나는 여래장을 전공하기 위해 도서관 자료목록을 일일이 검색했다. 그렇게 찾은 자료를 복사해 ‘여래장 관련 논문 컬렉션’을 만들었다. 모아진 논문 편수만 700여편이다. 다카사키 교수가 여래장사상 관련 자료는 당신보다 내게 더 많이 있다고 할 정도였다. 인도학불교학회에 발표할 원고를 들고 찾아간 내게 은사는 토시 하나하나를 수정해줬다. 하지만 내용은 손대지 않았다. “토시는 문법이나 내용은 사상”이라고 했다. 외국인으로서 문법이 틀리는 것은 당연한 것이라 했다. 하지만 내용을 수정하는 것은 당신 사상을 내게 발표시키는 것이라며 경계했다. 간혹 틀린 부분이 있으면 토론을 통해 스스로 수정하게 하는 것이 내 은사의 교육법이었다.
내게는 은사가 한분 더 있다. 당시 도쿄대 교수신분으로 고마자와대에 출강하던 다카사키 교수는 규정상 지도교수로 모실 수 없었다. 그래서 미즈노 코겐(水野弘元)교수가 지도교수다. 불교는 종교성과 철학성이 공생하는 노력이 필요하다. 이런 노력을 누구보다 잘 실천한 분이 미즈노 코겐 교수였다. 미즈노 교수는 새벽 4시에 일어나 2시간씩 참선을 했고, 6시부터는 1시간동안 공원을 걸었다. 104살에 작고하신 그 분은 100살까지 논문을 집필했다. 이분의 삶은 종교성과 철학성이 공존한 참된 불교학을 자체였다. 문화는 모방이라 했던가? 내 생활은 수행과 학문이 둘이 아니었던 미즈노 교수의 영향이 크다.
200가지 이상의 요가동작을 하는 나는 불교 핵심에 요가가 있다고 본다. 참선은 요가의 부분이다. 1989년 인도 네루대에 가서 요가 전적을 두루 보니 요가는 과학이었다. 합리적ㆍ도덕적ㆍ종교적이었다.
아침이면 나는 절을 한다. 전신운동이면서 호흡과 마음을 통일하는 절은 단순 예배가 아닌 선이다. 나는 일어설 때 숨을 들이 쉰다. 엎드리면서는 “옴~”하면서 숨이 다할 때까지 몸속의 공기를 다 내보낸다. 출장가도 할 정도로 일상이 된지 오래다. (숨을) 내보낸 만큼 (신선한 공기를) 채울 수 있다.
요즘 나는 불교사에 심취해 있다. 세계사상사와 문화사 종교사 등도 두루 살핀다. 세계사를 겸해야 인류 문화의 큰 틀에서 불교가 보인다. 객관적으로 불교가 연구된다. 다양한 학문과 언어로 보고 듣고 표현하는 자세가 불교를 세계화시킨다. 토인비는 “20세기 최고의 사건은 불교가 서양에 발을 들인 것”이라 했다. 세계 속 불교는 바로 불교의 세계화를 뜻한다. 이것이 불국토 아닌가?
나는 불교학을 순교학이라 부른다. 하지만 배출된 불교학 박사가 국내에서 3백명, 해외출신 2백명이다. 이들은 전공을 활용해 생활할 기반이 없다. 순교정신을 갖고 인내하지 않으면 불교학을 할 수 없다. 출가ㆍ재가 힘을 합해 배출된 학자가 적재적소에 활용될 인프라를 갖추는 것 또한 인재불사다. 불교학이 더 이상 순교학이 아닐 그 날을 나는 꿈꾼다.
이평래 교수는 1940년 전북 임실 출생. 충남대 철학과 명예교수다. 일본 고마자와 대학에서 다카사키 지키도(高崎直道) 교수에게 여래장불교를 배웠다. 2008년 한국불교학결집대회 대회장이다. 한국불교학회를 사단법인화 해 학회 운영의 새 지평을 열었다. 학자적 양심에서 공부하겠다는 제자들을 동국대나 유학 가라고 권유한 탓에 박사 제자가 없다. 인도 델리대에서 공부한 아들 이용주 박사(불교사상연구원 책임연구원)가 대를 이어 불교학을 연구한다. 정신과 의학박사인 며느리와 심리학을 전공한 딸과 함께 정신세계를 연구하는 일가를 이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