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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주 토요일 특강 시간을 빼고는 오로지 연구만 한다.
친구도, 모임도 나를 찾지만 나는 가지 않는다.
조직을 꾸리는 것은 학자 몫이 아니다.
연구해서 책 한권이라도 더 내는 것이 내 몫이다.
오직 나만이 할 수 있는 것에 오늘도 나는 하루를 보낸다.
18세 되던 해. 한국전쟁 때다. 피란을 산중 사찰로 갔다. 그 인연으로 나는 법성(法星)이라는 이름을 얻어 불가에 귀의했다. 어린 나이에 고민했다. 출가자면 누구나 포교에 힘써야 한다고 생각했다. 포교가 아닌 의식에 치중한 당시 스님들을 도통 이해할 수 없었다. 특히 큰스님 한분을 두고 이리저리 모시는 행태는 옳게 보이지 않았다. 그래서 나는 결심했다. 법사가 돼 불법을 널리 알리겠노라고. 하지만 교리를 모르고는 수행할 수 없어 나는 강원을 주로 다니며 공부했다. 강원을 다니며 나는 유식을 공부하겠다고 서원했다.
출가자였던 나는 동국대 수학 시절 비구ㆍ대처 싸움을 피해 승복 아닌 양복을 입고 다녔고 그러다보니 자연스레 속퇴하게 됐지만 내 원은 변함이 없었다. 그 원은 대학원 전공으로 이어져 <아뢰야식 연구>를 주제로 국내 최초 유식학 학위를 받았다. 그리고는 박사, 교수 시절을 지나 희수(喜壽: 77살)가 된 지금도 연구를 그치지 않고 있다.
제자들에게 나는 곧잘 전공과 꿈을 묻는다. 전공이 뭐냐 물었을 때 우물쭈물 하는 학생들이 의외로 많다. 대학원 와서도 우왕좌왕하는 것은 절대 학자가 못된다. 학자라면 자기가 걸을 길을 알아야 한다. 또 그 길을 끝까지 가겠다는 각오가 있어야 한다.
내가 김동화 박사를 만난 것은 <불교학개론>을 통해서다. <불교학개론>을 읽으니 그 체계적인 구성과 내용들은 내 불교지식의 편린들을 차곡차곡 정리하는 듯 했다. 나는 ‘세상에 이런 불교가 있나’ 하는 환희에 가득 찼다. 그래서 읽고 또 읽어 모두 외웠다. 그렇게 책을 통해 그리던 분을 나는 3학년이 돼서야 강의를 통해 만났다. 김동화 박사를 보고 나는 바로 이 분을 스승으로 삼겠다고 결심했다.
박사과정 때다. 은사인 故 김동화 박사 옆에서 원고 교정 등을 도우며 공부했다. 김 박사를 모신 내 정성을 두고 주위에서는 나를 김동화 박사의 화신이라고 할 정도였다. 하지만 생계가 어려웠다. 당시 교법사 제도가 처음 생긴 터라 잠시 교법사를 해야겠다고 김동화 박사에게 양해를 구하고자 했다. 그런 나를 김동화 박사는 극구 만류했다. 그동안 의식주 해결하고 돌아와 공부하겠다는 사람이 많았지만 아무도 돌아오지 않더라는 것이 이유였다. 그러면서 말씀하시기를 “학자는 재물에 눈이 어두워서는 안된다. 배고플 때는 허리띠를 질끈 동여 매고 하라.” 그래서 나는 다른 아르바이트 없이 오로지 공부만 했다. 그런 내게 김 박사는 <유식학> 대강을 배려했고, 다음 학기 바로 정식 강사가 될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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故 황성기 박사 작고 후에는 <구사학> 강의도 맡게 됐다. 소승불교를 집성한 것이 <구사론>이다. 공부를 해보니 경전은 경전대로 진리를 머금고 있지만 논전은 시대에 맞춰 그 함의된 뜻을 재해석한 것이었다. 경전이 원리라면 그 원리를 이론화하고 체계화한 것이 논전이다. 경전마다 설법의 핵심은 마음이었다. 마음을 닦으려면 이론을 알아야 제대로 닦을 수 있다. 마음을 닦기 위한 마음의 설계도가 바로 유식이다. 선을 마음 수행이라 한다면 유식은 선수행을 위한 안내서다.
은사의 대를 이어 유식학을 더 크게 발전시키자는 생각에 밤잠 안자며 논문도 쓸 만큼 썼다. 그렇게 모인 논문은 발간된 논문집으로만 세권이고, 출간 준비 중인 것이 한권 더 있다.
흥미로운 사실은 구사와 유식을 공부하다 보니 그것이 모두 원효 대사가 통째로 정리했다는 것이다. 원효 대사는 <유가사지론> 등을 인용해 선사상을 총정리 했다. 내가 중국 ‘현장학회’에서도 발표했지만 원효의 선은 육조혜능의 선보다 20년이 앞선다. 교리적으로도 전혀 뒤지지 않는다. 조계종이 보우ㆍ지눌을 둔 논쟁 속에 중국 선종의 맥을 이었다고 하나, 나는 한국의 선은 원효의 선이라고 말한다. 선맥을 바로 세워야 민족자긍심이 찾아진다. 요즘 젊은 사람들은 불교를 배운다고 중국ㆍ일본을 찾는다. 하지만 견학 간다면 모를까 배우러 가는 것은 잘못이다. 또 한국불교가 세계화하기 위해선 철저한 교리로 무장돼야 한다. 하지만 사람들은 유식이 어렵고, 원효가 어렵다 한다.
이유가 무엇일까? 학문은 전체를 아울러야 한다. 저인망식으로 바닥까지 훑어야 완전한 공부가 된다. 하지만 연구 풍토는 이것저것 부분적으로 필요부분만 따다 보니 결국 공부가 어렵다는 말이 그치질 않는다. 젊은 시절 나는 원효의 번뇌론이 정리된 <이장>을 번역했다. 글자를 푸는 것에만 집착했던 나는 글로는 풀었을지언정 그 뜻을 전부 풀지는 못했다. 읽는 이마다 난해하다 했다. 번역한 내가 봐도 어려웠다. 진정한 번역은 철저히 공부해서 내가 이해하고 남도 이해할 수 있게 해야 한다. <유마경>에 “부처님은 언제나 같은 말로 설법하지만 중생들은 근기마다 달리 이해한다”(불이일언연설법佛以一言演設法 중생수류각득해衆生隨類各得解)했다. 제대로 된 공부는 이래야 한다. 예전에는 논문을 어렵게 썼다. 하지만 알면 알수록 쉽게 써졌다. 자기 자신부터 바로 알아야 쉬운 글, 대중적인 글이 나온다.
반야는 마음의 진여(眞如)다. 피안에 이르면 부처가 된다는 가르침이다. 이것을 세상에 알리는 것이 법보시다. 절 짓는 건축불사보다 보다 많은 이에게 불교를 제대로 알려 올바른 사람 만드는 것이 최고공덕이며, 이것이 보살이다. 소승은 자리행을 통해 성문연각에 이르지만, 대승보살은 이타행을 한다. 이타행을 않으면 성불할 수 없다. 이타행을 모르는 것은 불교를 모르는 것이다. 연기를 다른 말로 하면 공존과 공생이다.
유식은 업을 자기가 수용할 수 있는 불공업과 대중과 함께 짓는 공업으로 나눈다. 공업이 악이면 악한 세상이고, 선이면 좋은 세상이다. 공업을 선하게 해 좋은 세상을 만드는 것이 바로 이타행ㆍ보살행이다.
정년퇴직 후 10년이 지난 지금 나는 <반야심경>을 연구한다. 처음 <여성불교>에 1년반 연재하며 정리하다보니 자료가 무궁무진하게 나왔다. 그래서 <속장경> 속에 있는 반야경을 연구했다. 지금은 용수보살의 <대반야경>에서 채집된 <반야심경>을 정리하는 중이다. 한평생 학자로 살며 깨달은 것 중 하나가 학문의 현묘함이다. 책상에 앉아있을 수록 궁리할 것이 생기고, 파면 팔수록 계속해서 나온다. 이제 내게 남은 바램이 있다면 <반야심경> 정통 해설서를 남기고 싶다. 계속해서 원효의 저술을 정리할 것이다. 그러고도 시간이 남는다면 <불교학개론>을 쓰고 싶다.
오형근 교수는 1932년 출생해 유식학과 함께 평생을 살아왔다. 現 동국대 명예교수. 대승불교연구원 원장이다. 동국대 불교대학원 설립 주역이기도 한 그는 중국 사회과학원 등 한중불교 교류에 앞장서왔다. 한자경 교수(이화여대), 유진 스님(동국대), 수산 스님, 묘주 스님, 김사업 박사, 김치온 박사 등 다수가 논문지도를 받고 학계에서 활발히 활동 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