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기 2568. 4.13 (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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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움의 중도 포기는 바다 한 가운데서 헤엄 멈추는 것
나의 삶 나의 불교학 - 이영자 교수
이영자 교수
나는 여유롭다. 하지만 연구를 쉬지는 않는다. 교수직은 은퇴가 있지만 학자는 은퇴가 없다. 눈이 보이지 않아 더 이상 책을 볼 수 없을 때까지 공부를 그치지 않는 것이 학자다.

내 삶은 내가 평생 일궈 온 학문과 다르지 않다. 불교학을 하며 매순간 즐거움을 느꼈고 그 희열은 자양분이 돼 나를 성장시켰다.

매일 아침 빵 두개를 구워 끼니를 때웠다. 두꺼운 대학노트와 책을 들고 다닌 것도 너무 힘들었다. 학비가 없어 눈물로 고민하던 밤도 많았다. 하지만 힘들고 지칠 때마다 나는 생각했다. ‘바다로 헤엄쳐 나왔는데 너무 힘들어 되돌아갈까 뒤를 돌아봐도 이미 떠나온 백사장은 보이질 않는다. 돌아가기엔 너무 늦었고 갈 곳도 없다. 가던 길을 계속 가야할 뿐.’ 이것이 학문의 길이다.

내 삶에, 내 공부에 어려움이 있을 때면 항시 도움이 따랐다. 돌이켜보면 모두 부처님 가피라고 밖에 달리 말할 수 없다. 우연히 찾은 도서관에서 <석가여래행적송> 등 논문작성에 필요한 고서를 만난 인연을 비롯해서 故 대법선 보살 등 많은 분들의 도움이 없었다면 오늘날 천태학자 이영자는 존재할 수 없었다.

내가 불교와 처음 인연 맺은 것은 수복 직후였다. 시내는 한국은행 등 몇 안되는 건물만이 남은 폐허 그 자체였다. 당시 불교는 소수에 한정된 가르침으로 정화운동 이후 세상에 알려지기 시작했을 때다. 그때 내 나이 21세로 당시 고려대 법학과에 합격은 했지만 부친 반대로 진학하지 못하고 방황할 때였다. 우연히 동아일보에서 당대의 석학을 모시고 대각사에서 시국 강연회를 한다는 광고를 봤다. 친구와 함께 강연회를 찾았다. 얼마나 사람이 많았던지 신발을 두 번이나 잃어버렸었다. 시국강연회 일정이 끝나자 참석자들을 주축으로 <금강경> 강의 모임이 생겼다. 나는 학교에서 얼핏 들은 원효의 <금강삼매경론>이 생각나 호기심에 강의를 들었다. <금강경> 강의를 처음 듣고 상당히 멋지다는 생각과 함께 감동이 밀려왔다.

전쟁 후라 국내 여건이 학자를 양성할 형편은 못됐다. 광덕 스님과 대법선 보살 등이 젊은 사람들을 이끌며 ‘대각회’를 결성했다. 젊은 사람이 귀해 내게 재무 소임을 맡기며 계속 나오라 했지만 당시 나는 다른 학교에 다니고 있어 법회에는 자주 참석하지 못했다. 대법선 보살은 관세음보살과 같은 크나큰 자비와 포용력으로 나를 친딸처럼 따뜻하게 대해줬다. 대법선 보살은 법무장관 등을 지낸 故 황선덕 박사 부인이다. 개신교를 믿다 불교로 개종했는데 많은 사람들이 대법선 보살에게 감화 받고 불자가 됐었다.

<금강경> 법문은 내게 큰 감동이었다. 경전에 갇힌 것이 아닌 마음을 넘나드는 법문이었다. 이때 배운 사구게 한구절 한구절은 내 가슴에 남아 평생 진리의 등대가 됐다.

특히 ‘범소유상 개시허망(凡所有相 皆是虛妄)’은 당시 폐허였던 서울 시내 모습 때문인지 내 어린 마음에 깊이 각인 됐다. 이어지는 ‘약견제상비상 즉견여래(若見諸相非相 卽見如來)’ 구절에 나는 ‘여래’가 무엇인지 당시로는 알지 못했다. 하지만 ‘약견제상비상 즉견여래’ 구절에 나는 평생을 여기에 바쳐도 되겠다고 다짐했다.

법문만 듣고 배워서는 무언가 부족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구슬이 서말이라도 꿰어야 보배’라는 말처럼 귀동냥으로 들은 부처님 법문을 갖고 무언가 이루고 싶다는 열망이 생겼다. 그러던 차에 나는 대법선 보살 권유로 동국대 불교학과에 진학했다. 백성욱 박사 총장 시절로 불교진흥장학금이 있어 전액 장학을 받을 수 있었다. 그런데 등록 후 5.16 혁명이 일어나 장학 수혜를 받을 수 없었고 많은 사람들이 장학수혜가 안되자 진학을 포기했다. 한국은행 외국부에 근무하던 나는 학비를 내더라도 다니고 싶어 자비로 등록했다. 당시 삼장법사라 불릴 만큼 해박했던 故 이종익 박사(현 동국대 인도철학과 이지수 교수 부친)의 <화엄경> <원각경> 등을 들었다. 학교 다니다보니 공부 욕심이 더해져 둘 중에 하나를 선택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때 직장은 공부를 하면서도 다닐 수도 있었지만 故 김잉섭 박사가 수업시간 중 했던 “불교 공부는 장판 때가 묻도록 해야 한다”는 말에 한국은행을 퇴직했다. 주변에서 좋은 직장을 그만뒀다고 난리가 났었다. 하지만 공부를 마음껏 할 수 있다는 생각에 마냥 기뻤다.

공부에 대한 내 열정이 어느 정도였냐면 김잉섭 박사 <삼론학 개론> 강의 때 다 가도 나는 혼자 남아 필기했다. 남들은 어렵다는 것이 나는 너무 재미있었고 멋있었다. 또 故 조명기 박사 <천태학> 강의는 워낙 말투가 느리기도 했지만 데모 등으로 휴강이 잦아 화엄ㆍ아함ㆍ방등ㆍ반야ㆍ법화열반시의 오시(五時)만으로 한학기 내내 이어졌지만 들으며 환희심까지 느꼈던 것을 보면 나는 천태와 깊은 인연이 있었던 것 같다.

유럽 유학 후 귀국했던 故 이기영 박사의 강의를 듣다 이 박사의 권유로 석사과정에 진학 했다. 당시 가세가 기울던 때라 아침이면 빵 두 쪽을 구워 갖고 다니며 공부했다. 이기영 박사가 불교문화연구원 간사로 있을 때 나는 조교로 살며 <천태사상의 교판에 관한 연구>를 주제로 석사학위를 받았다.

내 논문을 두고 조명기 박사, 김동화 박사 등의 칭찬이 자자했다. 나는 석사 후 연구조교가 돼 교통비만 받고 다니면서도 계속 공부에 매진했다. 공부가 단지 좋았다. 마침 일본 동경에 있다 방학을 맞아 귀국한 김지겸을 통해 일본 유학을 결심했다.

일본 학풍은 일단 학문이 체계화되면 선학들이 연구한 것이라 존중돼 감히 비판할 수 없었다. 하지만 내 논문은 천태사상을 역사성 없다고 비판하면서도 긍정적으로 결말을 맺었고 이런 점들이 천태종 승려로 <마하지관> 등을 저술했던 내 은사에게 주목받았다. 나중에 알게됐지만 내 은사는 남학생을 원했다고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가 그의 제자가 될 수 있었던 것은 당신 딸이 동경대를 나온 재원이었기에 가능했던 것 같다.

비자 발급 문제로 일본 유학길에 오르는데 3년이 걸렸다. 하지만 유학생활은 금전적인 부담이 컸다. 일본도 2차대전 후 복구시기라 장학금 제도가 빈약했다. 나는 조선장학회에서 일부 도움을 받았지만 학비 등을 충당하기에는 턱없이 부족했다. 그때 조명기 총장이 환희성 보살(관훈클럽 회장)을 소개해 장학금을 받게 해줬다.

세키구찌(關口眞大) 박사 집에 초대받았을 때 일이다. 지금 생각하면 우스울 따름이지만 김 한 톳을 신문지로 둘둘 말아 선물로 들고 갔다. 3층 건물로 된 집은 1층과 2층은 살림을 했고 3층은 서재였다. 박사 모친이 다도를 공부했던 분이라 그때 처음으로 다도를 접했다. 3층 서재는 메이지시대부터 3대에 걸쳐 꾸민 서재로 처음 본 순간 어마어마한 분량의 책들에 눌려 충격 받았다. 학교 뿐 아니라 집에서도 항상 책을 가까이 할 수 있게 조성된 환경이 너무 부러웠다. 당시 이기영 박사 조언으로 카운슬링을 배우고 있었다. 많은 사람들을 사귀며 즐겁게 일본 생활을 했다. 일본에서의 경험은 내게 ‘문화쇼크’였다.

일본에서 한국어 과외를 하며 적지 않은 돈을 모았다. 귀국 후 은사를 초청했을 때 박사학위 논문을 쓰라는 권유를 받았다. 하지만 400자 원고지를 직접 필사하며 두꺼운 분량을 채울 만큼 내게는 체력이 없어 엄두가 나지 않았다.

도서목록도 변변치 않았던 시절, 동국대 도서관은 방학을 맞아 서고 책들을 밖에 말리고 있었다. 호기심에 책들을 둘러보던 나는 <선학입문> <석가여래행적송> 등을 발견했다. 논문 주제로 고민하던 것들이라 환희심에 가득했다. 어렵게 책을 빌렸다. 복사기가 흔하지 않았던 때라 그 길로 바로 프라자 호텔 앞까지 달려가 당시 1부 50원씩 주고 복사를 했다. 고서를 복사까지 하니 거무스름한 것이 더 멋있었다. 도서관에서 우연히 발견한 책들로 나는 논문을 쓰기로 결심했다.

두번째 우연은 천책의 <호산록>을 찾은 것이다. 나는 이종익 박사에게서 “송광사에서 본 듯하다”는 말만을 듣고 찾아가 송광사 책들을 뒤졌다. 그러다 <죽미기>라는 해남 대흥사 기록서 뒷부분에 합철된 것을 발견했다. 이때 얼마나 기뻤는지 나는 환호성을 질렀다. 하지만 기쁨도 잠시 초서로 돼있어 읽을 수가 없었다. 혼자서 파고 또 팠다. 그렇게 공부하기를 70년대 초부터 82년 11월 <한국천태사상 연구>를 주제로 박사학위를 받기까지 꼬박 10년 걸렸다.

내 이런 이야기를 들으면 남들은 공부 하는데 운이 따라줘야 한다고 말한다. 실제 내가 공부하며 살아온 길은 매 순간마다 로또 당첨 같은 행운으로 가득하다. 하지만 연기법을 안다면 세상에 공짜는 없고 저절로 이뤄지는 것은 없다. 꿈이 있다면 서원하고 정진하라. 뜻이 있는 곳에 길은 있다.

이영자 교수는 1936년 강릉 출생. 평생 천태사상 연구의 외길을 걸어온 우리나라 최초 여성 불교학자다. 1965년 동국대 대학원에서 <천태대사의 교판에 관한 연구>로 석사학위를 받았고, 일본 다이쇼(大正) 대학에서 82년 <한국천태사상 연구>로 박사학위를 받았다.
불교여성학 개척자기도 한 이 교수는 저서로 <불교와 여성> <천태불교학> 등이 있다. 은퇴 후에도 법화학림(서울 장충동 소재)에서 왕성한 연구 활동을 펼치며 ‘법화학 천태학 연구회’ 초대회장을 맡고 있다. 지창규 교수(동국대), 최기표 교수(금강대), 오지현 박사, 김은희 박사 등이 논문지도를 받고 천태학 연구에 매진 중이다.
조동섭 기자 | cetana@buddhapia.com
2008-01-22 오전 11:39: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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