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기 2568. 3.26 (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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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교는 행학. 아는 것에 그친 배움은 아무 소용없어”
나의 삶 나의 불교학 - 목정배 교수
목정배 교수
나는 지금도 매주 강의를 한다. 일ㆍ화ㆍ목 일주일에 세 번씩 (사)대한불교법사회(서울 신당동)에서 법회와 논강을 진행한다. <반야심경> <법구경> <선가귀감> <육조단경> <원각경> <기신론> 등 부처님 경·율과 논사의 논을 대조하는 방식이다. 요즘 일요법회는 <입보리행정>을, 화요강좌는 <선종영가집>을, 목요강좌는 <대반열반경>을 진행하고 있다. 이렇게 법사회에서 강의한 것만 20년 가까이 되다보니 강론한 책이 어느새 30여권이 넘었다. 강의를 주로 하다 보니 법사회 법당은 신도가 얼마 없다. 목요강좌가 50여명, 화요강좌가 20여명, 다섯명(나는 이들을 5비구라 부른다)으로 시작했던 일요법회는 현재 30여명이 됐다. 부처님 정법에 목말라하는 이들을 볼 때마다 나는 쉬지 않고 꾸준히 해야겠다고 다짐한다.

그런 다짐이 가피를 입은 것일까? 2006년 10월 11일 강의를 마치고 찾았던 고려대 병원에서 ‘만성격막하출혈’이라는 진단을 받았다. 몇 곳에서 검사를 더 받은 후 녹색병원에서 수술했는데 집도한 의사가 “이정도면 쓰러졌어야 하는데 이것은 기적이다. 이럴 수 없다”며 놀랐다. 10월 13일 수술 후 24일 퇴원해 어느 정도 회복되자마자 바로 인도성지 순례길에 올랐다. 인도 가서는 세가지를 배웠다. 첫째 인도를 가려면 큰 신심이 있어야 한다. 둘째 건강해야 한다. 셋째 시간과 심적 여유가 있어야 한다. 수술 보름 후 10박 11일간 찾은 인도에서 부처님 기운을 직접 받았는지 예전보다 더 건강해졌다. 그래서 다시 2007년 2월부터 강의를 시작해 오늘에 이르렀다. 종심(從心)을 넘은 지금도 내 강의는 양적으로도 젊었을 때와 변함이 없다.

나는 불교학을 하기 위해 교계 기자, 전국신도회, 동국대 조교, 강사를 두루 거쳤다. 1975년 동국대 불교대학 전임이 된 이후로는 줄곧 불교학을 가르쳤다. 2002년 교수직을 정년퇴직한 이후 2004년까지는 서울 불교대학원 총장을 역임했다. 올해 20주년이 되는 (사)대한불교법사회를 기념해서는 이사장을 맡고 있다. 2007년 8월에는 소일거리 삼던 글과 그림을 갖고 윤범모 교수(경원대) 등 주변 사람들이 성화해서 결국 10월에 전시회도 열었다. 제자 박범훈 중앙대 총장이 내 글에 곡을 붙인 ‘연꽃누리 가득히’, ‘천둥소리’ 등 찬불가는 지금도 불교TV에서 심심치 않게 들린다.

경남 사천에서 태어난 나는 6세 때 밀양에 잠시 머물다 초등학교 졸업 무렵 한국전쟁으로 부산으로 갔다. 부산에서 해동중과 해동고를 다녔는데 고2 때 통도사 극락암에서 경봉 스님을 만났다. 2~3개월 머물다보니 스님이 출가하라 했고, 출가 후 2월 보름 계를 받기로 예정됐었다. 그때 어린 마음에 고민하기를 ‘출가를 했으니 불살생ㆍ불투도ㆍ불사음ㆍ불망어ㆍ불음주 계를 지켜야 한다. 다른 것은 몰라도 심심하면 거짓말을 하는데 망어계를 어찌 지킬 것인가?’했다. 평소 스님들로부터 ‘거짓말하면 사천왕이 뒷통수를 때린다’는 말을 들은 기억에 안되겠다 싶어 도망쳤다.

절을 나왔으니 다시 학교를 다녀야 했다. 다니던 해동고 3학년으로 복학하려 하니 출가기간 동안 결석이 많아 곤란하다는 답변이 있었다. 그때 해동고는 학교법인 원효학원 소속이었는데 이사장이던 박대관 스님(당시 통도사 주지)이 “이 학생은 다른 곳도 아니고 절에서 공부하다 왔다”고 말해 복학이 허용됐다. 고등학교를 졸업하고는 동국대 불교학과에 입학했다.

사실 처음부터 동국대에 진학할 생각은 없었다. 당시 서울대에 원자물리학과가 개설됐고 조선대는 우수학생 유치를 위해 전액장학 광고를 하던 때였다. 수학과 물리, 철학을 잘했던 나는 물리공부를 위해 서울대와 조선대를 고민했었다. 그때 “마음을 연구하는 심성학이 물리학을 초월한다”는 조언이 있었다. 학비가 문제라면 종립고등학교를 마쳤으니 동국대에서 종비혜택을 받을 수 있다고도 했다. 결국 조선대의 전액장학과 서울대의 물리학을 초월한 학문을 겸할 수 있는 두 곳의 조건을 만족시키는 동국대 불교학과를 택했다.

입학해서는 종비장학과 학과우수장학 수혜를 같이 받았다. 학비가 면제됐을 뿐더러 현금까지 생기니 사람들과 어울리기 좋아했던 나는 그 돈을 술 마시는데 썼다. 쌍용빌딩 뒤 ‘양지집’에 매학기 장학금 8만4천원을 그곳에 맡겨뒀다. 누구든지 ‘목정배’ 이름을 대고 먹을 수 있도록 했다. 그러다보니 나중에는 거꾸로 외상이 8만4천원을 넘기도 했고, ‘날아가는 까마귀도 목정배 술 안 먹었으면 병신’이라는 우스개 소리도 있었다. ‘남들 시험 못 보게 술 먹이고 혼자 공부한다’는 엉뚱한 소리도 들어야 했다. 그때는 불교대 교재로 김동화 박사의 <불교학개론> 외 모두 강의노트 판서뿐이었다. 고등학교부터 일본책을 읽었던 나는 별다른 공부 없이 술 마시고 놀면서도 항상 시험을 잘 쳤으니 그런 말이 들릴 법도 했다.

당시 동국대는 석조관과 중강당 건물을 짓고 있었고 지금 만해광장 자리에 정각원 건물이 있었다. 총장이던 故 백성욱 박사는 월요문화강좌를 진행했는데 이것이 내게는 큰 도움이 됐다. 총장이 직접 철학적 의미를 갖고 시사성 있는 강좌를 진행한 곳은 동국대가 처음이었다. 이후로 연세대에서도 故 백낙중 총장이 백송강좌를 열었다.

지도교수 故 김잉섭 박사는 화엄ㆍ구사ㆍ유식ㆍ삼론 대학자였다. 친구 김인덕은 중관 연구를, 나는 유식을 전공해 1964년에 <근본 식 연구>를 주제로 석사학위를 받았다. 유식 전공자였던 내가 계율을 공부한 것은 운명적이다. 박사과정 중 강사활동을 하면서 교과개편에 참여했을 때다. 커리큘럼을 살펴보니 예전에는 박한영 스님이 ‘계율약전’이라는 과목으로 계율 과목이 있었는데 해방이후부터 줄곧 과목이 없었다. 그래서 일단 ‘계율학’이란 명칭으로 과목을 개설했는데 마땅히 강의할 사람이 없어 결국 내가 맡게 됐다. 갑자기 강의를 맡으니 막막했다. 하지만 당시 유식과 중론은 모두 도반들에게 강의가 배정됐고 전공자도 많았지만 계율 전공자는 없었다. 또 지관 스님, 인환 스님은 <사분율>을 중심으로 공부하니 나는 <범망경>을 갖고 보살계를 연구해야겠다고 결심했다. 그래서 원효ㆍ승장ㆍ의적ㆍ태현이 찬술한 <범망경> 주석서를 모두 섭렵하고 번역을 마쳤다. <의적의 보살계본소 연구>를 주제로 박사학위를 받은 나는 동기 중 제일 먼저 전임이 될 수 있었다.

전임이 되기까지 공부 과정이 순탄치만은 않았다. 2년 후배까지 모두 강의 배정을 받았지만 나만 못 받았던 시절도 있었다. 하지만 그 덕에 교계기자도 하며 안목을 넓히고 더 성장할 수 있었다. 1965년 석사를 마쳤을 때 청담 스님을 도선사에서 만났다. 청담 스님은 당신 명함에 ‘이 명함을 가져간 사람이 공부할 수 있도록 배려하라’고 써주며 이한상 사장(대한불교신문)을 찾으라 했다. 그 후로 나는 3년간 기자생활을 했다. 원래는 수요일 원고마감만 담당했지만 하루 출근하고 월급 받기가 미안해서 강의시간 말고는 신문사에 매일 출근했다.

1966년 10월 15일 밀양 표충사에서 효봉 스님이 열반하셨을 때 일이다. 당시 대한불교신문 기자였던 나는 좌탈입망한 효봉 스님을 취재하고, 스님의 법구를 서울로 모시는 영광을 누렸다. 당시 정화불사로 종단이 어지러운 때라 효봉 스님 장례는 종단장으로 치루기로 결정됐고 그러기 위해서는 준비가 필요했다. 좌탈입망한 법구를 모시기 위해 좌상형 곽을 준비했다. 운구는 이한상 사장(대한불교신문)의 랜드로버 차량을 이용했고 보성 스님(송광사 방장)과 내가 효봉 스님 법구를 좌우에 앉아 서울까지 모셨다. 수원에 이르자 서울에서 급히 연락이 오기를 이튿날 오전 8시에 한강대교를 건너라 해서 시간 맞춰 가니 한강대교에는 “나무아미타불”을 염송하는 신도들로 장엄했다.

목정배 교수가 현대불교신문 독자에게 전하는 작품
불교는 ‘행학(行學)’이다. 행하는 만큼 배워야 하고 배우는 만큼 행해야 한다. 많은 사람들이 새해면 ‘술ㆍ담배를 끊겠다’ 다짐하는데 나는 ‘돈연돈주(頓煙頓酒)’한지 오래다. 남들은 담배를 끊을 때 담배를 멀리하지만 나는 주머니에 넣고 다니면서 안했다. 요즘도 친구들이 앞에서 술을 마셔도 나는 안한다. 이미 안좋다 생각했는데 무엇 때문에 집착하는가. 일단 자기가 나쁘다는 것을 알고 끊기로 마음 먹었다면 실천해야 한다. 없기 때문에 안하는 것과 있는데도 안하는 것은 분명 다르다. 그래서 신도는 행(行). 법보는 학(學). 부처는 증(證)이다. 내게 남은 숙제가 있다. 더 큰 불교를 위해 삼귀의 대상을 불ㆍ법ㆍ행(마음자리)으로 바꾸고 싶다.

일부러 내게 강의배정을 않던 분은 물론 나는 모두 인연을 선하게 회향하고자 실천했다. 남이 내게 어떤 음해를 해도 부처님 법을 공부하는 사람이라면 마음에 담아두면 잘못 아닌가? 그것에 나를 구속하지 않아야 괴롭지 않다. 느낌 자체가 무상함을 알고 흘려야 한다. 무상, 무아하면 고는 있을 수 없다. 바로 열반적정이다. 내 강의를 기다리는 사람이 있어 나는 행복하다.

□ 목정배 교수는 1937년 경남 사천 출생. 동국대 불교학과 졸업. 철학박사. 동국대 불교대학장, 불교대학원장과 불교문화연구원장 등을 역임했다. 현재 사단법인 대한불교법사회 이사장이다. 논문은 <의적의 보살계본소 연구> 등이 있고, 저서로는 <삼국시대의 불교> <대승보살계 사상> <한국문화와 불교> 등이 있다. 제자로는 암도 스님, 재선 스님, 태진 스님(갑사 주지), 박범훈(중앙대 총장), 차차석(금강대 교수), 신성현(동국대 교수), 선주선(원광대 교수) 외 다수가 교계 내외에서 활발하게 활동 중이다.

(사)대한불교법사회: www.bupsa.or.kr (02)2254-1671
조동섭 기자 | cetana@buddhapia.com
2008-01-22 오전 11:14: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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