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옥천 대성사(주지 혜철)가 청주교도소 수용자 200여명을 대상으로 한해를 마감하는 법회를 12월 18일 봉행했다.
대성사 주지 혜철 스님은 “2007년을 어떻게 살았는지 반성하는 시간이 돼야한다”고 지적한 뒤 “새해를 맞아 불자다운 삶을 살라”고 법문했다.
이날 법회에서 수용자들은 한해를 뒤돌아보고 그동안 배운 찬불가를 부르며 부처님께 음성공양을 올리고 “2008년은 하심하고 부처님 닮은 불자가 되겠다”고 발원했다.
한편 대전교정청(청장 한철호)은 2007년 교정직원 교정위원 경비교도대원 교정수기를 공모하고 입상작품을 발표했다. 직원 최우수상 이태위(천안개방교도소) 우수상 전승희(청주여자교도소), 교정위원 교정수기 최우수상에 청주여자교도소 조성근 전도사(백석교회), 우수상에 공주교도소 법안 스님(안심정사 주지)에게 상장과 상금을 전달했다.
다음은 법안 스님 수기 전문.
관세음보살님이 만약에 수용자에게 오신다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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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월유수라고 했던가? 교도소 앞의 은행나무가 벌써 20회에 가깝게 옷을 갈아입었다. 신록인가 하면 어느새 노란 은행나무길이 가장 아름다운 자태를 자랑한다. 삼십대의 탱글탱글하던 얼굴은 어느 새 주름살이가고, 근시안용 안경대신 돋보기가 얼굴을 장식하고 있으니 말이다. 1991년 처음 교도소 법회와 정신교육에 나오기 시작하였으니 벌써 20년이 가까워온다. 그 때가 30대 초반이었는데 벌써 지천명의 나이가 되어 버렸다. 결코 짧지 않은 세월 속에서 보람이 있었던 적도 많았고, 안타까운 적도 많이 있었다. 어느새 귀밑머리가 희게 변해간다.
짧지 않은 세월이었지만 방학 동안을 제외하고는 매월 꼬박꼬박 법회를 봉행하고 있다. 외국에 나가지 않는 한 법회에 별로 빠진 기억이 없다. 나를 기다리는 수용자 법우들과, 나를 후원해주는 공덕회원들을 기다리는 법우들이 많기 때문이다. 매월 가장 기다려지는 시간 가운데 하나이기도 한다. 그 동안 몇 가지 기억에 남는 일이 있었다. 처음에는 내가 재소자들을 위하여 법회를 봉행하고, 재소자들을 위하여 봉사한다고 생각했던 적이 있었다. 그러나 20년이 가까워지는 요즘에는 그 생각이 많이 바뀌었다. 후원회원들도 한결같이 하는 이야기가 바로 그것인데, 우리가 수용자들을 돕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그들로부터 더욱 많은 것을 배우고, 그들로부터 얻는 것이 훨씬 많다는 사실이다. 맞는 말씀이다. 법회를 시작하고 5년쯤 되던 해의 일로 기억된다. 법회를 마치고 자매자들과 합동접견을 하기도 하고, 특별 면담신청을 받아 나름대로 대화를 하곤 하였던 때였다. 그러나 이런저런 이유로 내가 교도소 교화에 회의를 느끼고 있던 때이기도 하였다. 과연 교도소 법회를 지속할 것인가 말 것인가 고민하던 중에 특별면담 신청을 받아서 함께 자리에 앉게 되었다. 특별면담을 신청한 수용자는 당시 33세의 범띠 청년으로 살인으로 복역하고 있던 터였다. 외모도 좀 무섭게 생겼고, 얼굴에도 칼자국이 있는 약간은 험상궂은 모습이었다. 그는 첫마디가 ‘저는 떡신도입니다.’ 였다. 떡신도란 스님들이 교도소에 올 때 떡을 잘 해오기 때문에 그 떡을 먹으려는 목적으로 법회에 나오는 사람들을 일컫는 말이란다. 한참을 웃고 나서 ‘떡이 인연이 되었어도 좋은 인연임에는 틀림없다.’는 이야기로 받고 나서 대화를 나누기 시작하였다. 대화를 하다 보니 외모보다 훨씬 순수하고 여린 마음의 소유자였다. 그래서 대화란 필요한 것임을 실감할 수 있었던 기회였다. 떡을 먹으려고 참석했던 법회에서 법문을 듣다보니 비로소 자신이 잘못 살아온 것을 깨닫게 되었고, 평생을 통하여 참회하면서 하고 싶은 기도 제목과 기도 방법을 알려달라는 것이었다. 특히 20대에 자기의 칼에 죽음을 당한 상대방을 위하여 기도하고 싶다는 것이었다. 자신은 조직폭력배의 하수인으로서 명령에 의하여 살인을 저지르고 무기징역수로 복역하고 있지만 법문을 들으면서 자신이 한 행동에 대하여 비로소 참회하게 되었고, 자신의 칼에 죽은 원혼에게 참회하면서 극락왕생을 빌겠노라는 것이었다. 그 면담을 마치고나서 나도 방황하던 마음을 털어버리고 새롭게 결심을 하게 되었다. 조급한 마음으로 보다 많은 이들을 완벽하게 교화하겠다는 생각이 바뀌고 장기적 전략으로 바뀌게 되었으니 말이다. 5년만에 만난 수용자였으니 앞으로 내가 50년을 교도소를 드나들면 적어도 10명은 만날 수 있을 것 같은 그런 수용자였다. 지금까지 가장 기억에 남는 수용자 가운데 하나이다. 그 후에도 많은 이들을 만났다. 그 가운데 불교반장이었던 하법우를 비롯한 반장들 몇 명도 기억에 남는다. 어려운 가운데 자매결연으로 받은 영치금을 모았다가 자신보다 더 어려운 이들을 위하여 양말과 겨울 내복을 사주는 그런 분이었다. 자신도 어렵기가 이루 말할 수 없는 장기수로서 의지할 것이라곤 한 달에 한번 들여 주는 영치금 만원이 가진 것의 전부임에도 불구하고 그 소중한 것을 포기하고 남을 위하여 쓴다는 것이 어찌 쉽겠는가? 중생의 소원에 따라 천 곳에서 기도하여 구하면 천 곳에서 모두 감응하시는 관세음보살님이 만약에 수용자들을 교화하기 위하여 오신다면 어떤 모습으로 오실까 생각을 해보았다. 우리처럼 출가승의 모습으로 오실까? 아니면 교도관이나 관계자들로 오실까? 아니면 수용자의 모습으로 오실까? 때때로는 여러 가지 모습으로 오시겠지만 그 가운데에서도 틀림없이 수용자의 모습으로 오실 것이고, 그 모습이 바로 자신의 그 작지만 전부인 소유물도 포기하는 그 하반장의 모습으로 오지 않으실까? 출소한 법우들이 다시 다른 교도소에서 편지 올 때가 가장 마음이 아플 때라고 생각한다. 교도소에서 오라는 초청장이 없을진데 그 업의 고리를 끊지 못하고 다시 교도소에 들어가서 편지를 보내는 법우들을 보면 너무나 마음이 아프다. 그래서 고민 끝에 보다 근본적인 도움을 줄 방법이 없을까 고민하다가 봉행하게 된 것이 ‘수용자와 교도소 교화 원만성취를 위한 합동 영산대재’이다. 하나같이 순박하고 내성적인 성격의 소유자들인 수용자들의 무엇이 잘못되어서 계속 교도소에 드나들까? 나는 운명론자는 아니지만 사주팔자를 분석한다. 운명이라는 것을 보다 논리적으로 접근할 수 있는 방법은 없을까? 그걸 고민하다보니 상담심리학과 사주를 공부하게 되었고, 희한한 것을 알게 되었다. 바로 수용자들에게 공통적으로 나오는 것이 형살(刑煞)이라는 것이었다. 이 형살이란 명리학에서 관재구설로 형을 받거나 수술하거나 교통사고 등을 유발하는 그런 흉살이다. 수많은 임상실험을 하여보니 천도재가 형살을 풀어내는데 효과가 있음을 알 수 있었다. 그래서 지난 3년간 매년 5-6월에 무형문화재 제50호 영산재 이수자 스님들을 초청하여 합동 천도재를 올려드리는 것이다. 지옥의 문전에서 선정에 드셔서 지옥중생을 구제하시는 지장보살님이 오신다면 어떤 모습으로 오실까? 나는 최근에도 수용자 한 사람에게서 지장보살님의 마음을 읽을 수 있었다. 지장보살님은 지옥중생을 구제하기로 원을 세우신 분이다. 일천제보살이라고 하여 성불-부처님이 되시는 것-을 포기한 그런 분이다. 모든 불자들의 마지막 소원인 성불을 포기한다는 것이 쉽지 않지만 지장보살님만은 그 마지막 소원을 포기하고 중생이 모두 다 깨달음을 얻고 난 뒤, 지옥이 텅 비지 않으면 결코 성불하지 않겠다고 맹세한 그런 분이다. 이런 분의 마음을 수용자에게서 보았고, 그 아름다운 마음을 느낄 수 있어서 무척이나 행복했다. 사람이 살다보면 우선순위를 정하게 된다. 세상사가 복잡다단하다고는 하지만 크게 구별하면 네 가지 정도로 요약이 된다고 한다. 첫째, 급하면서 중요한 일이며, 둘째, 급하긴 하나 중요하지 않은 일이고, 셋째는 급하지는 않지만 중요한 일이 있고, 넷째는 급하지도 중요하지도 않는 일이 있다고 한다. 대부분의 범부중생들은 급하지도 중요하지도 않은 일이나 중요하지는 않지만 급한 일에 매달려 인생을 소모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소중한 인생을 낭비한다는 것이다. 범부중생은 어디까지나 이기심에 의하여 살기 때문에 전적으로 남을 위해서만 살 수는 없다. 그렇더라도 우리가 태어난 목적은 자신과 남을 모두 위하는 길이라고 할 수 있다. 성현들은 오직 남만을 위하여 사시지만 우리들은 그분들의 경지까지는 이를 수 없다. 그렇더라도 그 마음까지 포기해서는 안된다. 도가(道家)의 한 도인이 공자가 탄 수레 옆을 지나가면서 노래를 불렀다고 한다. 내용은 ‘공자여 쓸데없는 짓 하지 말고 발 씻고 편히 살아라, 세상은 당신이 생각하는 것처럼 그렇게 쉽게 좋아지지 않는다.’ 뭐 이런 뜻이라고 한다. 이 말을 전해들은 공자님도 한 말씀하셨으니, ‘그렇다. 나도 안다. 세상이 온전해지지 않는다는 것은 나도 안다. 그렇지만 어떻게 인간으로서 노력까지 포기하겠는가?’라는 말씀이다. 우리는 이 땅이 갑자기 천상세계가 되거나 극락세계가 될 것이라고 믿는 이는 없을 것이다. 왜냐하면 그것은 모든 범부중생 하나하나가 성인 현자가 될 때만 가능한 것이기 때문에 불가능한 것이다. 그렇더라도 어떻게 인간으로서 그 노력까지 포기하겠는가? 지난 달 법회에 갔을 때였다. 갑자기 불교반을 4년 8개월이나 이끌어왔던 법우가 반장직을 내놓는다는 것이었다. 봉사활동을 너무나 잘하면서 법회를 이끌어왔기 때문에 의외였다. 내용인 즉은 자신의 기득권을 포기하는 것이었다. 쉽지 않은, 작지만 결코 작지 않은 특권을 포기함이란 사회생활에서도 쉽지 않을뿐더러, 가진 자들에게는 더욱 어려운 길인데, 자신에게 그 소중한 기회를 남을 위해서 포기하는 모습을 보니 망치로 뒤통수를 맞은 기분이었다. 그렇다. 지장보살님이 교도소에 오셔서 수용자들을 교화하려고 하신다면 역시 수용자의 모습으로 오실 것임에 틀림없다. 그 마음이 바로 지장보살님의 마음이다. 남들이 다 구제되고 나서야 비로소 자신도 구원받겠다는 지장보살님의 서원을 나는 그 법우에게서 보았다. 세상은 혼탁하고 서로 믿기 어렵고 힘들기는 하지만 그래도 살맛이 나는 것은 이런 사람들이 곳곳에 있다는 사실이다. 어려움 속에서도 나눌 줄 알고, 남을 도울 줄 아는 그런 이들이 있음으로 우리는 이 세상에서 희망을 가질 수 있고, 더 나은 세상을 만들기 위해서 노력할 수 있을 것이다. 그동안 많은 수용자와 교직원들을 만나면서 무척 기쁘고 보람 있었던 것은 바로 이런 만남이 있기 때문이다. 요즘의 관심사는 어떻게 하면 보다 흥미도 있으면서 효과적인 법회를 이끌까였다. 끊임없이 고민하다보니 요즘 법회에 활용하는 노래방법회이다. 마음이 무거운 이들이라서 분위기마저 항상 우중충한 상태이니 무엇인가 방법을 써서 탈피하여보고자 연구한 것이 바로 노래방법회이다. 수용자들이 좀 더 마음을 밝게 바뀔 수 있도록 하기 위하여 노래를 선정함에 있어서 밝고 맑고 아름다우면서 미래지향적인 노래로 곡목을 선정하여 함께 부르기도 하고 상품을 걸어놓고 함께한 법우들에게 음성공양을 하도록 권유한다. 부르고는 싶지만 용기가 없어서 노래를 하지 못하는 법우들에게 적당한 내용을 들어서 용기를 내어서 노래를 하도록 유도하는 것도 나의 임무 가운데 하나이다. 그러다 보니 호응도가 아주 좋다. 자신의 음성을 통하여 남을 위하여 봉사하는 마음도 기르고, 용기도 내어보고, 그야말로 일석다조이다. 수용자 교화를 하면서 자랑을 할 것이 나에게는 많이 있다. 내가 그 동안 수용자들 교화를 하고 나서부터 1천여 세대가 되는 신도들 가정에서 형살이 소멸되는 것이었다. 후원자들에게는 그 흔한 교통사고나 대수술, 관재구설로 고통 받은 이가 하나도 없었다는 사실이다. 또한 관재구설로 고통을 받는 이들이 우리 절에 와서 기도하면 쉽게 진실이 밝혀져서 결과가 좋다고들 소문이 자자하다. 물론 여기에는 이유가 있다. 신도들 한 분 한 분이 소중하게 도와주는 후원금으로 매월 수용자들을 위하여 떡을 준비하고, 과일과 음료수를 준비하여 대중공양을 한 공덕이라고 나는 확신한다. 후원회원들도 하나 같이 하는 일이 잘되니 어찌 자신도 좋고 남도 좋은 일이 아닌가? 세상은 힘에 의하여 움직여 간다. 만유인력의 법칙이 아니겠는가? 그 힘이 물리적인 힘이든, 경제적인 힘이든, 지혜의 힘이든, 권력의 힘이든 간에 어떤 힘이든 그 힘이 강한 편으로 이끌리게 된다. 우리 운명을 이끄는 힘은 두 가지이다. 복력과 업보력이다. 무거운 쪽으로 기우는 것과 같이 그 강한 힘에 의하여 이끌려가는 것은 정한 이치이다. 괴로움에 몸부림 치면서 울면서 살 일이 아니다. 복의 힘이 강하면 복된 쪽으로 이끌려가서 복된 삶을 살게 될 것이고, 악업과보에 의하여 끌려가면 고통과 슬픔과 어려움을 겪어가면서 살아가야 한다. 아주 단순하지만 그것이 진리이다. 그렇다면 이 험난한 인생이라는 전장터에서 어떻게 사는 것이 진정 잘 사는 것일까? 바로 복을 짓는 삶이다. 복도 짓는 사람이 잘 짓게 되고, 악업도 짓기가 습관이 되면 쉬워지는 것이다. 수용자들 가운데에서 그 아름다운 마음을 보면서 내가 몸과 마음이 건전하게 움직이는 한은 나 자신을 위해서, 수용자들을 위해서 법회활동을 할 것이다. 그리고 나를 후원해주는 많은 후원자들이 더욱 복된 삶이 되도록 복 지을 기회를 제공할 것이다. 복도 아무나 짓는 것은 아니다. 자신의 소유물을 포기할 수 있는 용기가 필요하고, 그리고 지속적으로 그 포기한 마음을 유지할 수 있어야 한다. 거기에다 자신도 좋아지고 남도 좋아진다는 확신을 바탕으로 지혜가 있어야 비로소 가능한 일이 아닐까? 건강은 최고의 선물이다. 만족은 최고의 재산이다. 신뢰는 최고의 채권이다. 최상의 행복은 열반이다.(법구경) 법안 스님은 찰학박사, , 논산 안심정사 주지, 서울 백상선원 원장, BBS불교방송 포교자문위원, 논산 안심정사에서 폐관수행중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