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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해 스님과 함께 민족대표 33인을 구성하는 스님 중의 한명. 독립운동에 앞장섬은 물론 경허 스님 등과 함께 근대 선을 꽃피운 인물. 어지럽던 근대기를 당대의 선지식으로 살다간 용성 선사를 일컫는 말이다. 선사이면서도 법사와 관정사, 사업가로 전방위적인 불교운동을 전개했던 용성 스님을 율사로 재조명한 논문이 발표돼 눈길을 끈다.
율사 용성 스님을 통해 그의 심지계법이 분단된 땅을 정토로 바꾸고, 고통 받는 민족을 해탈의 길로 이끄는 길이라는 주장을 펼친 이는 대각사에서 열린 학술대회에서 ‘용성진종선사의 원돈율 사상과 선율겸행의 선풍’을 주제로 발표한 학담 스님(대각회 감사)이다.
스님은 “선이 율을 전한 것이지 율이 율을 전한 것이 아니다”라며 선과 율이 무관하지 않음을 강조했다. 현재 한국 불교의 폐단을 선을 모르고 율만을 논하는 일부 율사나 율행 없는 선을 조사선이라 착각하는 일부 선사들이라 지적한 스님은 용성 스님의 선율겸행(禪律兼行)ㆍ선율병운(禪律倂運)의 수행가풍을 그 해답으로 제시했다.
“용성 스님의 율은 <범망경>을 근간으로 한 대승심지계(大乘心地戒)로 출가승단의 사분율을 회통한 율이며 용성 스님의 전계는 선(禪)인 계를 전한 것”이라고 말한 스님은 중국 사분율종과는 다른 심지계법과 원돈율로 용성 스님의 계법을 정의했다. 즉 “용성 선사의 율은 지키고 깨뜨릴 것이 없는 마음을 바탕으로 하는 율로(心地戒體) 악을 그침 없이 그치고(攝律儀) 선을 행함 없이 행하는(攝善法) 법계의 무량한 공덕으로 중생을 널리 거두는(攝衆生) 율”이라는 것이다.
용성 스님의 계율은 다음의 이야기로 짐작된다.
용성 스님이 중국에 머물 당시 통주 화엄사에서 있었던 일이다. 선승이 용성 스님에게 비구계를 받은 곳을 물으며 “언제 우리 중국의 계가 조선에까지 들어갔는가?”라고 빈정대듯 물었다. 그때 울리는 범종소리에 용성 스님이 물었다. “저 소리는 그대의 것인가, 나의 것인가?” 이에 선승은 “그야 어찌 내 것, 그대의 것이 있을 수 있겠는가”라고 답했고 용성 스님은 계속해서 물었다. “하늘의 해와 달은 중국의 것인가, 조선의 것인가.” “어찌 해와 달이 중국 것과 조선 것이 있겠는가.” 그러자 용성 스님은 “그런데 어찌 불법도 그와 같음을 보지 못하는가, 불법이 어찌 어디에선 크고 어디에선 작겠는가”라고 일갈했다고 한다.
조선인이, 또 스님이 멸시 받았던 구한말 올바른 깨달음 하나로 ‘해동의 선지식’으로 추앙받던 그의 율을 학담 스님이 원돈율이라 표현한 것은 <범망경>의 심지계법과 사분율을 회통했다는 것이 이유다. “애석하게도 현재의 한국 불교 계단에는 상부율종과 남산율종이 얽혀있을 뿐 용성의 원돈율이 전해지지 않는다”고 말했다. 용성 스님에게 법을 받고 전계대화상으로서 계를 전한 대표적 율사로는 동산 율사, 고암 율사, 자운 율사가 있다. 하지만 “이들이 내린 금강계단의 계첩은 중국 고심여형 율사의 계맥으로 용성 스님의 율과는 다르다”는 것이 학담 스님의 견해다. 용성 스님의 원돈율만이 자장-진표-지공-나옹-환성-대은으로 이어지는 (한국 고유의) 심지계법이며, 한국 불교의 율은 중국 율종과 전승체계를 달리 한다는 것이다.
그러면서 스님은 현재 한국 불교 율맥을 중국율의 전승을 통한 비주체화되고 형식주의에 굳어진 계법으로 진단했다. “이 땅에서 1700년 면면히 구족계를 설한 것이 중국 율맥의 맨 끝 한자락을 쥐는 것에 지나지 않는다”라는 강한 표현도 했다. “계맥의 단절과 율학의 위기를 외치며 우리 율의 전승을 부정하고 외국에서 계를 받아오는 현실”에 대한 비판도 이어졌다. 스님은 무기력해지고 형식화된 계법 전승에 대한 대안으로 <범망경>의 심지계법을 제안했다. “용성 스님의 심지계법이 반야의 눈이 되고 보살의 역동적인 행이 될 것”이라고 역설한 스님은 새로운 전계운동을 주문했다. 결국 한국 불교 개혁의 열쇠는 부처님 말씀(범망경)에 있음을 새삼 강조한 발표였다.
‘불교 근대화의 노선과 용성의 대각교’를 발표한 김광식 교수(부천대)는 한국 불교근대화를 전통주의와 근대주의로 나누고 “용성 스님은 전통주의를 이념으로 했으나 대각교 운동은 근대주의의 형태로 표출됐다”고 역설했다. 전통과 근대의 구분에 대해 김 교수는 “용성 스님의 불법ㆍ계율ㆍ청규 등에 기인한 전통적 불교사상은 이념적 보수성향을 나타내고, 역경사업과 불교 자립을 위한 조합운영, 광산 경영 등에 나선 것은 진보성향의 표출”이라고 설명했다. 대각교 운동이 이념과 실천방법이 좋았음에도 불구하고 한계에 부딪혀 단절된 이유를 김 교수는 교단과의 관계, 내부 조직 취약과 계승자 부재로 지적해 대중들에게 조직의 구성과 인재불사의 중요함을 각인시켰다.
한편 함께 발표한 보광 스님(동국대)은 ‘대각사 창건 시점에 관한 제문제’를 통해 창건 100주년에 임박한 대각사의 창건시기를 되짚었다. 여러 가지 고증을 통해 보광 스님은 1916년 창건설에 무게를 두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