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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음까지 보살펴야 복지죠"
복지현장을 달리는 사람들 ⑥월곡청소년센터 이남재 관장
월곡동 청소년들과 이웃들의 마음을 달래고자 노력하는 월곡청소년센터 이남재 관장.
서울의 마지막 달동네로 알려진 월곡동에는 살림살이가 어려운 사람들이 모여살고 있었다. 그러던 곳이 이제는 아파트촌으로 변모하고 있다. 새 건물을 짓느라 발파작업을 하는지 월곡동 땅은 한 시간에도 몇 차례나 ‘쿵’ 소리를 내며 울렁거린다.

이런 변화 속에서도 굳건히 자리를 지키고 있는 ‘빨간벽돌건물’ 월곡청소년센터. 또 이곳에 남아 있는 청소년들의 마음이 다치지 않게 열심히 궁리하는 이남재(46) 관장. 칼바람과 함께 불어닥친 월곡동 개발 바람에 센터도 그도 끄떡 않는 바람막이가 되고 있다.

“이곳 참 많이 변했죠. 길도 넓어졌고 좋은 건물도 들어섰죠. 하지만 여기 원래 주민들이 그 아파트에 들어갈 수 있느냐, 절대 아니죠.”

너무나 변해버린 월곡동을 보며 원래 살던 사람들이 어디로 갔을까 걱정부터 들었다. 이 관장은 “새 아파트 대신 옆 동네 장위동 사글셋방으로 대거 옮겨갔다”며 점점 내몰리고 있는 어려운 이웃들의 근황을 전했다.

월곡청소년센터는 말이 ‘청소년센터’지 지금껏 동네 사랑방 역할을 톡톡히 해왔다. 주말이 면 인근 어르신들에게 무료급식을 하고 밑반찬도 보내는 등 지역 사회 버팀목이 됐다.

이 관장은 1999년 12월 월곡청소년센터 관장직을 맡았다. 그는 어떻게 월곡동에 들어오게 됐을까. 이 관장은 인도철학과 82학번, 열혈 운동 청년이었다. 그가 생각하는 불교정신으로는 시대를 외면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그러다 1994년부터 조계종 총무원 기획실 종무원으로 근무했다. 또 갑자기 이 관장은 홀연히 일본으로 떠났다. 1997년부터 2년간 수학한 교토불교대학에서 ‘복지’에 눈을 번쩍 뜨게 됐단다.

“그냥 훌쩍 공부가 하고 싶었어요. 그래서 갔는데 일본 사찰복지를 보고 느낀게 많았습니다. 사찰이라면 어디나 복지시설을 운영하거나 지원하고 있으니까요.”

그렇게 돌아오자마자 동국대 행정대학원 사회복지학과에 진학했고 오늘에 이르렀다. 사실 이 관장은 다른 사람의 복지 보다는 자신의 건강 돌보기에 매진해야 하는 입장이다. 몇 해 전 면역력에 이상이 생겨 혈액암 판정을 받았던 그다. 이제는 건강이 좋아져서 일도, 참선 수행도 할 수 있게 됐지만 그 때는 정말 암담했다고 한다.

“병났을 땐 참 힘들었어요. 하지만 병과 싸우면서 저절로 ''보왕삼매론‘의 ’병고로써 약을 삼으라‘는 구절을 떠올리게 되더군요. 지금은 되려 병을 고마워하고 있는걸요.”

그렇게 ‘병 있음을 탓하지 않고’ 열심히 살고 있는 그는 지구촌공생회 사무국장까지 겸임하고 있다. 경북 문경에 거주하고 있는 식구들은 그에게 “다 그만두고 시골에서 건강 챙기는 일이나 하자”고 말하지만 아직 그에게는 불교복지의 큰 일들이 너무 많이 남아있다. 월곡청소년센터도 그렇고 지구촌공생회 우물사업도 그렇다.

이왕 선택한 복지의 길, 그는 ‘정신 복지’로 회향할 수 있도록 월곡동에 남고 싶다고 한다. 복지는 물질적으로 힘든 사람들을 정신적 영역까지 보살펴 주는 것이라 믿고 있기에.

“저는 말 한마디라도 따뜻하게 할 줄 아는 복지사로 남고 싶습니다. 불교의 정신 영역을 복지현장에 접목시키는 ‘정신복지’의 시작도 말 한마디 부터라 생각해요. 마음을 다잡고 편히 쉴 수 있도록 도와주는 것, 그것이 제가 하고 싶은 복지입니다.”
김강진 기자 | kangkang@buddhapia.com
2007-12-03 오전 10:17: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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