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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종 1450~1469년(20세)
재위 1년2개월, 1468.9(19세)~1469.11(20세)
형 만한 아우가 없다. 아비만한 자식도 없다. 부는 대물림될 수 있지만 건강은 대물림되지 않는다. 세조의 아픔은 자식복 없음이다. 온갖 공을 들인 맏아들 의경세자 20세 요절, 부랴부랴 둘째 놈을 여덟 살에 세자로 책봉했다. 그러나 그는 즉위 14개월만에 20세로 역시 요절했다. 아비의 펄펄한 정기를 잇지 못하고. 못난 놈들. 창릉에는 세조의 비통이 자욱하게 서려 있다.
모든 생명은 안락을 바라는데/ 폭력으로 이를 해치는 자는/ 자신의 안락을 구할지라도/ 뒷세상의 안락을 얻지 못한다. <법구경, 131> 허공중에서도 바다 가운데서도/ 혹은 산속의 동굴에 들어갈지라도/ 악업의 갚음에서 벗어날/ 그런 세계는 어디에도 없다. <법구경, 127>
요절한 임금은 업적을 남길 틈이 없다. 몇 개의 기록만 남겼을 뿐이다. 예종은 두 명의 부인(장순왕후 한씨, 안순왕후 한씨)에게서 2남1녀를 낳았다. 예종의 나이 12세 때 장순왕후가 첫 아들 인성대군을 낳았다. 장순왕후는 대군을 낳고 건강이 악화되어 17세로 요절했다. 조선 역대 제왕 중 가장 어린 나이에 아들을 낳은 이가 예종이다. 그러나 그렇게 낳은 인성대군은 4세 때 죽었다. 참을 수 없는 존재의 박복함이여!
왕릉에 불이 나면 어떻게 될까? 예종의 창릉은 화재의 기록도 갖고 있다. 왕릉은 산세가 좋고 주변에 수목이 울창하다. 부드러운 잔디 이불이 풍성하다. 산불나기 좋은 여건이다. 민가에 불이 나거나 일반 백성의 무덤에 불이 나도 큰일이거늘, 왕릉에 불이 나면 나라의 변고라 하여 왕은 정사를 폐하고 사흘간 소복을 입고 참회한다.
인조 3년 2월 28일 창릉에 불이 나자 인조는 조회를 폐하고 백관과 함께 3일간 소복을 입었다(인조실록 권8). 이듬해 1월 26일 또 불이 나자 임금과 백관은 다시 소복을 입었다(인조실록 권11). 고종 33년(1896) 4월 23일 능상에 화재가 발생하다(고종실록 권34). 기이한 기록이다. 화기가 센 것만은 틀림없다. 능에 불이 나면 책임을 물어 능을 지키는 수복(관리)의 목을 베거나 중벌로 다스린다.
‘남아 20에 나라를 평정하지 못하면 어찌 대장부라고 할 수 있으랴’라는 시를 남긴 남이 장군의 옥사가 일어난 것이 예종 때다. 남이는 태종의 외손자로, 세조 시대 최대 위기를 몰고 온 이시애의 난(1467년)을 평정하여 적개공신 1등에 책록 되고, 서북면의 여진족을 토벌하는 등 무공을 세운 무인이다. 세조의 총애를 받아 27세에 오위도총부 도총관과 공조판서를 겸하다가 병권의 수장인 병조판서에 발탁되었으나 세조가 죽고 예종이 즉위하자 그의 승승장구에 제동이 걸린다.
1468년 세조가 죽자 한명회, 신숙주, 강희맹 등 훈구대신들의 노골적인 견제를 받는다. 그들은 남이가 병조판서를 수행할 그릇이 못된다고 비판하자 예종은 남이를 병조판서에서 해임시키고 왕궁을 호위하는 금군의 수장인 겸사복장에 임명한다. 일종의 좌천이다.
예종은 애초부터 남이를 좋아하지 않았다. 남이는 성격이 강직하고 무예에 뛰어나 세조의 총애를 받은 반면, 예종은 유약하고 결단력이 부족하여 세조의 신뢰가 두텁지 않았다. 그래서 예종은 당숙뻘인 남이를 못마땅하게 여기던 차에 훈구대신들이 비판하고 나서자 즉시 병조판서직에서 해임시켜 버렸다.
남이가 겸사복장으로 궐내에서 숙직을 하던 중 혜성이 나타나자, ‘허허! 혜성이 나타남은 묵은 것을 몰아내고 새로운 것을 받아들일 징조로다’라고 중얼거렸다. 이것이 그를 죽음으로 몰고 간 결정적 화근이다. 병조참지 유자광이 이 말을 엿듣고 남이가 역모를 꾀한다고 왕에게 고변했다. 역모자로 전락한 남이는 즉시 의금부로 잡혀가 문초를 받는다. 강도 높은 문초와 관련 증언으로 ‘남이의 역모사건’은 윤곽이 드러난다. 사건에 관련된 자는 남이를 위시하여 강 순, 조경치, 변영수, 변자의, 문효량, 고복로, 오치권, 박자하 등으로 모두 처형되었다.
이 사건은 임진왜란 이전까지는 역모사건으로 인식되었으나 그 이후 일부 야사에는 유자광의 모함으로 날조된 옥사라고 규정하고 남이를 누명으로 억울하게 죽은 젊은 영웅으로 기술하고 있다(연려실기술). 용맹스럽고 드라마틱한 인물이기에 남이가 신통력을 발휘하는 설화들이 많이 남아 있다. 때문에, 남이장군신을 떠받드는 무속 신앙이 지금도 많다.
몇 개의 기록만 남기고 예종은 20세에 승하했다. 사인에 대한 기록은 없으나 조선의 왕들은 과반수가 독살되었다는 설도 있다. 권좌는 건강을 유지하고 천수를 누리기에는 불편하고 부적합하다. 그가 원비 장순왕후에게서 얻은 첫아들 인성대군은 네 살에 죽었고, 계비 안순왕후가 낳은 둘째 아들 제안대군은 예종 승하 당시 네 살에 불과해 왕위에 오르지 못했지만 천수를 누렸다. 다음 왕위는 결정권자인 정희왕후에 의해 의경세자의 둘째 아들 성종에게 돌아갔다. 예종은 계비와 함께 창릉에 누워 있다.
***서오릉(西五陵)***
‘서쪽에 다섯 개의 능이 있다’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서오릉에는 5릉(경릉 창릉, 익릉, 명릉, 홍릉), 2원(순창원, 수경원), 1묘(대빈묘)가 있다. 동구릉 다음으로 큰 규모의 조선 왕실 가족묘다. 경릉은 덕종과 소혜왕후 한씨(인수대비), 창릉은 예종과 계비 인순왕후 한씨, 익릉은 숙종의 원비 인경왕후 김씨, 명릉은 숙종과 계비 인현왕후 민씨와 제2계비 인원왕후 김씨, 홍릉은 영조의 원비 정성왕후 서씨의 묘다. 순창원은 명종의 맏아들 순회세자와 부인 윤씨, 수경원에는 사도세자의 어머니 선희궁 영빈 이씨, 대빈묘에는 경종의 어머니 희빈 장씨가 묻혀 있다. 사적 제198호. 경기도 고양시 덕양구 용두동 산 30-1번지. 면적 829,792㎡(553,512평)
***창릉(昌陵)은***
8대 예종과 계비 안순왕후 한씨의 능이다. 서오릉 능역 안에 있다. 예종은 세조와 정희왕후의 둘째 아들로 형인 의경세자가 요절하는 바람에 19세에 세조의 뒤를 이어 왕위에 올랐다. 14개월의 짧은 재위 기간 동안 남이(南怡)의 옥사 등 정치적 격동을 겪었다. 효성이 지극하여 세조가 승하하자 건강을 해칠 정도로 비통해했다. 세조 때부터 시작한 경국대전을 완성했으나 반포하지 못하고 1469년 승하했다.
안순왕후 한씨는 청주부원군 한백륜의 딸이다. 1460년 한명회의 딸이었던 세자빈 한씨(장순왕후)가 병사하자 1462년 예종과 가례를 올려 세자빈에 책봉되었다. 1468년 예종이 즉위하자 왕비에 책봉되었으나, 이듬해 예종이 병사해 1471년 인혜대비에 봉해졌다. 1497년(연산군3년)에 명의대비로 개봉되고 그 이듬해 승하했다. 원비 장순왕후 한씨는 경기도 파주시 조리면, 공순영릉이라 불리는 능역 안, 공릉에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