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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0년 11월 24일 대법원 인근에는 경찰의 바리케이트가 쳐지고 시위대의 구호 소리가 끊이지 않았다. ‘불교정화’ ‘불법에 대처승 없다’ 등의 피켓을 든 스님들과 ‘비구승이 빼앗은 사찰을 돌려 달라’고 외치는 스님들이 대법원 판결을 기다리며 서로 팽팽히 맞섰다.
경찰이 막아선 가운데 비장한 표정의 스님들이 작업복 차림에 모자를 눌러쓴 채 대법원 진입을 시도했다. 이들은 교단정화를 위한 순교단이었다. 경찰의 차단으로 인솔했던 숭산 스님과 다수의 스님들은 들어가지 못했지만 마지막까지 6명의 비구스님(문성준ㆍ유월탄ㆍ정성우ㆍ권진정ㆍ이도명ㆍ김도현)들은 혼신을 다해 결국 대법원에 들어갈 수 있었다.
해방 이후 불교계는 교단정화의 큰물줄기 속에 비구ㆍ대처로 분열돼 몸살을 앓았다. 비구ㆍ대처 양측의 사찰 소유권 및 점유권에 대한 것은 표면적 갈등이었고, 그 실상은 청정비구가 당시의 세간법으로 인정받느냐 그렇지 못하냐의 문제였다. 때문에 대법원 판결은 한국불교가 새 생명을 얻느냐, 금치산자가 되느냐의 기로였다.
대법원은 1955년 승려대회를 도출해 낸 대책위원 중 대처측 대표를 피고로 삼지 않았다 해도 문제되지 않는다는 내용으로 대처측 손을 들어줬다. 판결은 1955년 승려대회의 적법성 여부에 대한 심사 없이 당사자 적격 여부만이 심의된 채 청정비구의 정체성을 흔들었다. 대처측에 유리한 판결이 나자 대법원 안에 있던 6명의 비구들은 비장한 표정으로 오후 3시 경 2층 대법원장실로 달려갔다. 대법원장실에 이르렀으나 대법원장은 자리에 없었고 용건을 묻는 비서에게 스님들은 ‘불교를 위하여 순교하기 위해 왔다는 말을 대법원장에게 전해 달라’는 말을 남기고 일제히 칼로 자신의 복부를 갈랐다.
월탄 스님 등은 “불법에 대처승은 없는데 재판에서 세상법으로 그것이 인정받지 못했기 때문에 그를 호소하러 왔다”는 요지의 발언도 했다. 비서실장은 당황하여 기다려 달라했으나 이미 바닥에는 스님들의 피가 흥건히 고이고 있었다.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기다리던 대법원장이 아닌 경찰들이 들이 닥치며 스님들의 복부에 박힌 칼을 빼고 곤봉으로 마구 구타했다. 폭력으로 강제 진압된 6명의 스님들은 실신하여 들 것에 실려 나갔다.
6명 비구 스님들의 순교했다는 소식이 전해지면서 조계사에서 단식 중이던 400여명의 비구ㆍ비구니들이 일제히 대법원 건물로 들어갔다. 판사들은 뒷문으로 도망쳤고 대법원은 아수라장이 됐다. 출동한 경찰 기마대가 곤봉을 휘두르며 스님들을 강제 연행했다. 이 과정에서 스님 353명이 연행되고 24명이 구속됐다. 당시 언론들은 ‘대법원 난입사건’이라며 대서특필했다.
사건은 법원이 교단정화를 위한 순수한 애종심의 발로였다는 정상참작을 통해 가벼이 처리하면서 수습되었다. 초기에 폭도로 비구를 매도하던 언론도 난입사건의 전말을 상세히 보도하면서 크게 비판적이지 않게 되었다.
이것이 오늘날 한국불교를 지탱하는 조계종의 반석이 된 ''정화6비구'' 사건이다.
2007년 11월 3일 설악산 신흥사(주지 무산) 설법전에서는 당시 6비구로 제 2정화운동의 주역이었던 성준 선사 열반 30주기를 기념하는 추모학술세미나가 열렸다. ‘성준선사의 생애와 불교정화운동’을 주제로 열린 세미나에는 이강순(서강대 사학과 박사과정)씨가 ‘신흥사의 사격과 고암 대종사’을, 적멸 스님(동국대 박사)이 ‘성준선사의 생애와 사상’에 대해, 박부영(불교신문 편집국 부장)씨가 ‘대법원 육비구 할복 사건 전개과정과 의미’를, 김광식 교수(부천대)가 ‘제2정화운동과 영축회’라는 총 4편의 주제발표가 있었다.
적멸 스님은 발표문을 통해 성준 선사의 사상을 ‘엄격주의’와 ‘위법망구’로 정의했다. 적멸 스님은 성준 선사의 엄격주의에 대해 “성준 선사는 단 한번도 조석예불을 거른 적이 없었으며 시물을 아끼고 공과 사를 분명히 했다. 계율의 엄정에는 나와 남이 따로 없었다”며 성준 선사의 엄격주의는 율사였던 은사 고암 스님의 영향이 크다고 말했다.
또한 성준 선사가 일생의 신조로 삼은 “파사현정 위법망구(破邪顯正 爲法忘軀)”가 교단청정에 헌신한 그의 불석신명(不惜身命)한 삶으로 실천되었다는 사실을 통해 ‘위법망구’함을 보였다.
김광식 교수는 1967년 1월 20일 화계사에서 열린 영축회 창립 준비위원회를 위한 발기취지문이 성준 선사의 이름으로 나갔음과 이행원(숭산 스님)이 성준 선사에게 보낸 서신을 예로 성준 선사가 영축회의 주축이었음을 주장했다. 김 교수는 이어 영축회의 교단청정에의 개혁드라이브가 주체세력의 이완, 간부진 및 회원의 이탈, 현실과 이상 사이의 괴리 등으로 중단된 사실을 보이며 그 역사적 의의와 현실의 소통을 강조했다.
무엇보다 성준 선사 열반 30주기 추모학술세미나는 불교정화운동의 학술적 재조명이라는데 의의가 있다. 교계 안팎의 내우외환에 봉암사 법회 등 교단 내 자성청정의 목소리가 커지고 있는 요즘 “삼악도에 빠진 불교의 앞날을 걱정하며 순교한다”는 정화6비구의 정신이 어떻게 발로될 수 있을지, 청정교단에 쌓인 홍진(紅塵)을 날려버릴 조계종단 개혁풍의 세기가 주목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