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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5년 4월, 낙산사에 뜻하지 않은 산불이 닥쳤다. 관음성지이자 천년고찰인 낙산사의 원통보전은 검게 그을린 칠층석탑만을 남겨둔 채 흔적도 없이 사라졌고, 보물 제479호 낙산사 동종 역시 종루와 함께 녹아 없어졌다. 그나마 주지 정념 스님이 황급히 옮긴 건칠관세음보살좌상(보물 제1362호)만이 화를 면했고, 끝내 화마로부터 성보를 지켜내지 못한 스님들과 신도들은 거대한 불길 앞에서 눈물을 삼켜야 했다.
하지만 잿더미가 된 도량을 보며 낙산사 주지 정념 스님을 비롯한 불자들은 이를 전화위복의 기회로 삼기로 다짐했다. 철저한 고증을 거쳐 불이 나기 이전의 상태가 아닌, 통일신라시대 의상 대사가 창건할 당시 모습으로 낙산사를 복원하기로 한 것이다. 어느덧 2년 6개월이란 세월이 흘렀고 세인들의 기억 속에서 낙산사가 잊혀져 가고 있을 즈음, 낙산사가 원통보전과 동종 복원을 마치고 11월 16일 낙성식과 범종 타종식을 봉행한다는 반가운 소식이 들려왔다. 낙성식을 일주일 여 앞둔 7일, 낙산사 현장을 찾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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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주문에 들어서니 마음이 바빠졌다. 원통보전을 빨리 보고 싶었다. 현장을 향해 걷는 동안 머릿속에서는 아직도 원통보전이 화마에 휩싸여 불타고 있었다. 멀리 원통보전의 기와가 보이기 시작했다. 거세던 불길은 온데간데없이 사라졌고 세월 속으로 사라졌던 원통보전이 마술처럼 나타났다. 복원 현장을 보지 못한 사람에게는 ‘마술 같은’ 일이지만, 지난 2년간 현장을 지키며 살아온 스님과 불자들에겐 간절한 원력의 결실일 것이다.
현장은 아직 여기저기 중장비 차량이 서 있고 건축자재가 놓여 있어 어수선했다. 고개를 돌리니 절집엔 어울리지 않는 포크레인 너머로 새로 지은 종루가 보이고 눈물처럼 사라졌던 동종이 새 집에 걸려 있었다.
낙성식 준비로 분주한 임시 종무소를 찾았다. 총무 소임을 맡고 있는 법인 스님은 “공사는 현재 70% 정도 완료됐다. 마무리 공사가 아직 남아 있긴 하지만 원통보전을 비롯해 중요한 공사는 거의 끝난 셈이다. 어려움이 많이 있긴 했지만 공사가 원만히 진행되고 있어서 다행이라고 생각한다”며 간단히 소회를 밝혔다. 낙산사 복원공사는 2009년이 되어야 완전히 끝날 것이라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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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물인 건칠관세음보살좌상이 봉안되어 있던 원통보전은 발굴조사를 통해 드러난 옛 절터를 바탕으로 불에 탄 것과는 다른, 조선 초기의 건축 양식으로 복원됐다. 복원 과정에서 주지 정념 스님은 원통보전의 설계도 등이 들어 있는 타임캡슐을 땅 속에 묻었다. 기둥은 양양군에서 생산된 최고 품질의 적송을 썼다. 지역 문화재로 지정된 원통보전 담장과 주변도 공사를 시작한지 약 1년 만에 모두 말끔하게 제 모습을 찾았다.
동종(銅鐘)은 사진과 탁본 등을 이용해 원형대로 복원했으며 타종을 위한 범종이 따로 제작됐다. 동종이 안치될 종루는 십자 모양의 팔작지붕과 누각으로 지어졌으며 소실됐던 홍예문, 요사채 등도 대부분 복원됐고 일부 전각만 남아있다.
화재로 인해 사라졌던 소나무 숲은 1500여 그루의 소나무를 새로 심어 낙산사의 풍광으로서의 면모를 갖춰가고 있었다. 주지 소임을 맡은 지 보름 만에 엄청난 일을 겪어야 했던 정념 스님은 “이번 낙산사 복원은 단순히 불타 없어진 것들을 다시 만들어 세우는 일이 아니라 창건 당시의 모습을 최대한 복원함으로써 그야말로 천년고찰의 옛 모습을 찾는데 의의가 있다”고 복원의 의미를 설명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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낙산사는 의상 대사가 창건한 이래 유달리 화재로 인한 아픔을 많이 겪었던 절이다. 같은 터에서 숱한 세월이 사라졌고 또 세워지고 있다. 새로 세워진 원통보전에서 천년의 세월을 볼 수는 없었다. 하지만 천 년 전에도 이곳은 낙산사였고 지금도 이곳은 낙산사다. 관세음보살을 친견하고 싶었던 의상 대사의 간절한 원력을 품은 관음도량 낙산사. 이제 모두의 원력으로 다시 천년세월을 품기 시작했다.
한편 문화재청은 최근 낙산사 홍련암과 의상대 일원에 대해 명승 지정을 예고했다. 이에 낙산사와 양양군은 경내 전체를 명승으로 지정해 달라고 요구했다. 낙산사 측은 “낙산사를 배제하고 의상대와 홍련암이 있는 해안 절경만을 분리 지정할 경우 관동 8경의 하나로 전해지는 낙산사 명칭을 부여받을 수 없다”는 의견서를 문화재청에 제출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