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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묵서지편’을 통한 일반의 주된 관심사는 <무구정광대다리니경>의 나이다. 그간 학계는 통일신라에 탑이 조성된 이래 단 한번도 중수되지 않았을 것이라 믿고 <무구정광대다라니경>의 조성연대를 통일신라로 인정했었다. 하지만 ‘묵서지편’을 통해 <무구정광대다라니경>이 통일신라의 것이 아닌 고려의 것이라는 주장이 제기되며 학계가 혼란에 빠지기도 했다.
10월 27일 ‘석가탑 발견 유물 조사 중간 보고에 따르면 이와 같은 혼란은 잠시 진정될 듯 하다. ‘묵서지편’ 해독에 실질적 역할을 한 이승재 교수(서울대 언어학과)는 ‘석가탑 묵서지편의 지편 조립과 이두 판독’이라는 주제 발표에서 ▲고려 정종 4년(1038) 중수기의 “전물부동(前物不動: 사리함 안에서 수습한 사리장엄구를 다시 안장하되 처음에 있던 그대로 안장했다)”는 기록, ▲‘묵서지편’이 발견 당시 사리함 밖 바닥에 위치했으나 <무구정경대다라니경>은 사리함 안 깊숙한 곳에서 발견됐다는 점, ▲<무구정광대다라니경>의 서지나 서체 등을 미뤄볼 때 신라시대의 것일 가능성이 높다는 의견을 내놓았다. 또 천혜봉 위원장(석가탑 묵서지편 조사위원회)는 중국 당나라 측천무후의 재위 기간(685~704)에만 사용된 측천무후자(字)가 보인다는 근거를 들어 통일신라의 것에 무게를 두었다. 박상국 문화재위원은 “<무구정광대다라니경>이 쓰인 종이가 일본의 전문가에 의해 신라시대의 것임을 확인 받은 사실을 볼 때 추담으로의 왜곡은 최소화해야 할 것”이라 했다.
이것과는 반대로 고려 정종 4년(1038) 작성 문서 중 ‘이 해 ○월 ○○일 대덕 숭영이 보협인다라니경을 (사리공에) 납(納)했으며 얼마 뒤 무구정광대다라니경 1권을 ○했다’라 적혀있는 것을 두고 문맥상 <무구정광대다라니경>을 ‘납’했을 수 있다는 견해도 있다. 만약 ‘납’했다면 고려 때 <무구정광대다라니경>을 넣었다는 이야기가 돼어 논란의 소지가 있다. 다만 고려 때 넣은 것이 고려시대 새로 만들어진 것인지, 신라시대의 것을 그대로 다시 넣은 것인지는 <무구정광대다라니경>만이 안다.
때문에 일각에서는 고고학 연구에 흔히 사용되는 <무구정광대다라니경>의 방사성탄소연대 조사를 실시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방사성탄소연대 측정에는 대개 숯이 사용된다. 때문에 현재 발굴 후 복원수리까지 마쳐진 상태에서 나무를 가공해 만들어진 종이를 조사하는 것은 정확한 연대 측정이 불가하다는 것이 전문가 의견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