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기 2568. 10.25 (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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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묵서지편’으로 보는 천년의 세월
불국사 석가탑
세계 최고(最古) 목판인쇄물로 알려진 <무구정광대다라니경>과 함께 발견됐으나 40년간 베일에 가려졌던 ‘묵서지편(墨書紙片: 먹으로 쓴 종이뭉치)’의 비밀이 공개됐다.

지난 10월 27일 국립중앙박물관(관장 김홍남)에서 열린 ‘석가탑 발견 유물 조사 중간 보고’를 통해 세상에 소개된 ‘묵서지편’은 어떤 내용을 담고 있을까? 묵서지편을 통해 석가탑의 프로필을 재구성했다.

아사달과 아사녀의 애틋한 사랑의 전설을 품으며 세워진 무영탑. 김대성의 원력으로 8세기 중반 조성된 이래 정토구현을 염원했던 신라인의 이상과 석가여래의 설법이 상주함을 증명하며 서석탑의 이름이라 불린 채 불국사를 지켜왔다.

창건 이래 처음 유래 없던 고려 현종 15년(1024년) 경주 인근의 지진으로 석가탑은 1차 보수를 했다. 정월부터 중수에 필요한 물자와 인력을 준비했다. 여러 스님들이 쌀, 콩, 보리의 곡물류는 물론 철, 포, 비단 등을 공양했다. 관료인 안동대도호부사도 쌀을 보탰다. 서두른 덕분에 2월부터 탑을 해체하기 시작해 2월 18일에는 탑에 모셔진 사리를 수습하여 금당 뜰로 옮겨 모실 수 있었다.

사리가 옮겨진 뒤 중수에 박차를 가해 손상된 탑을 속히 보수하고 3월 14일 사리를 봉안하기에 앞서 사리를 안장하기 전 의식을 올린 뒤 안동대도호부사에게 경위 보고를 했다. 금동함, <무구정광대다라니경> 9편, 순금병, 금병을 싼 비단, <보협인다라니경>, 용뇌향 등 다양한 향과 소석탑 등 사리장엄구와 복장물을 챙겨 사리를 다시 탑 안에 모셨다. 사리가 모셔진 뒤 대덕 등이 안치 결과를 살폈다. 이와 사실에 대해 ‘불국사무구정광탑중수기’에 기록하고, 소요된 물자와 공양물 등에 대해서는 ‘불국사무구정광탑중수형지기’에 기록하여 함께 탑에 봉안했다.

고려 정종 4년(1036년) 또 다시 대지진이 석가탑을 흔들었다. 이번에는 더 크게 훼손되어 무너지려는 것을 대중들이 버팀목으로 대놓았다. 사부대중이 힘을 모아 석가탑을 중수했다. 2층 탑신석 등을 새로 하고 탑 안에 있던 것들은 모두 그대로 두되 은합만은 새로 제작해 다시 봉안했다. 공교롭게도 1038년 1차 중수를 마칠 무렵의 다시 찾아온 지진은 대중의 노력을 허사로 되돌리는 듯 했다. 이미 1차 중수를 마친 터라 더 이상의 나라의 지원도 없고, 단월도 없었다. 이에 대중은 미력삼회도량을 결성하여 재물을 모아 중수에 들어갔다. 석가탑을 바로 세워야한다는 신심과 원력으로 대중들은 다시 시주를 보탰다. 1차 중수 때처럼 곡식류와 삼베, 비단과 마 등이 시주됐다. 스님들의 속가에서도 도움을 줬다.

다시 2층 탑신을 해체해 사리를 꺼내 임시봉안소에 모시고 공양을 올렸다. 반막재(飯?齋)를 거듭 올리며 1층 옥개석, 탑신을 해체하고 기단부 갑석까지도 내려야했다. 하지만 겨울비에 공사는 중단되고 이 비는 나흘간 계속됐다. 날이 개자 다시 재를 올리고 탑을 조립하면서 이러한 사실을 ‘불국사서석탑중수기형지와 추기’와 ‘불국사탑중수보시명공중승소명기’에 각각 중수진행과정과 보시자들의 명단을 기록하여 함께 봉안했다.

그리고 세월이 흘렀다. 임진왜란 등 숱한 외세의 침입과 한국전쟁의 화마도 대중의 원력으로 조성ㆍ중수된 석가탑을 어찌할 수 없었다. 그러던 중.

1966년 석가탑 보수를 위해 탑을 해체하면서 귀한 유물들이 세상에 소개됐다. 사리를 봉안한 탑신부 2층에서 <무구정광대다라니경>과 함께 사리함 등이 나왔다. 사리함 주위로 동거울 등이 사리함 밖 바닥에서는 비단에 쌓여 뒤엉켜 붙은 종이뭉치가 발견됐다.

당시 기술로는 이 종이뭉치를 떼어낼 수 없어 이름만 ‘묵서지편’이라 붙인 채 탑에서 찾은 다른 유물들과 함께 국보 제126호로 일괄지정된 채 국립중앙박물관 수장고에 있어야 했다. 1997년부터 1998년까지 보존처리를 위한 상태조사를 하면서 뭉쳐있던 종이들은 110여편의 분량으로 분리될 수 있었다. 2005년 9월 묵서지편에서 ‘중수기(重修記)’라는 문자가 판독되면서 창건 이래 한번도 수리되지 않았을 것이라 여겨졌던 석가탑의 비밀이 밝혀지기 시작했다. 여러 차례에 걸친 보수사실이 짐작되면서 학계에는 <무구정광대다라니경>의 조성연대를 의심하는 주장도 제기됐다.

2007년 10월 27일 발견된 지 41년 만에 노명호 교수(서울대 국사학과)와 이승재 교수(서울대 언어학과)에 의해 묵서지편이 판독됨으로써 불교학, 사학, 국어학계 등은 한국 고대사 연구에 새로운 전기를 맞았다. 우리는 오늘 묵서지편의 열쇠를 쥐고 천년의 세월을 넘나들 수 있게 되었다.
조동섭 기자 | cetana@buddhapia.com
2007-11-06 오후 5:49: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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