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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 복천사가 항일독립운동가 양정욱의 은신처이자 독립운동의 전초기지라는 주장으로 주목을 받았다.
10월 25일 ‘복천사의 역사와 문화’라는 제목으로 열린 경성대학교 한국학연구소의 2007년 추계학술세미나에서 경성대학교 강대민 교수는 양정욱의 항일운동과 그의 활동처였던 복천사의 역사적 의미를 재조명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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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 교수는 “독립운동가 양정욱은 학생신분으로 독립운동을 위한 반일활동으로 인해 체포되어 22세의 젊은 나이에 고문후유증으로 순국한 인물이다”며 “전승에 따르면 그의 활동지였던 복천사의 뒷산에는 독립투사들이 은신처로 사용한 암굴이 여러 개 있었고 복천암 스님들이 대각사로 내려와 태극기 그리는 법을 몰래 가르쳐 주며 독립 운동을 이끌던 주요 활동지”라고 설명했다.
양정욱은 부산제2상업학교 재학시기인 1928년, 학생의 신분으로 동지들을 규합하고 독서회 활동과 민족해방에 기반을 둔 애국활동을 벌인 독립운동가이다. 1920년대는 일제의 노선이 강경진압에서 문화통치의 형식으로 변화하면서 그는 민족문제에 큰 책임의식을 지니고 독서회라는 조직을 통해 민족해방운동에 앞장 선 것이다. 월간지를 발행하여 항일 투쟁을 전개한 흑조회를 이끌던 양정욱은 1929년 9월 24일 부산지방법원에서 징역 2년을 선고 받고 옥고를 치르던 중, 지독한 고문으로 인해 생명이 위독하여 병보석으로 가출옥하였으나 고문 후유증으로 인해 곧 병사 순국하였다. 그는 고문으로 손톱이 모두 다 빠졌다고 한다. 정부는 1995년 양정욱의 업적을 인정하여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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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천사 주지 경호 스님은 “복천사는 일제시기 제국주의 압제에 맞서 독립군을 양성하여 항거한 민족종교도량이였으며 조선 불화의 전통성을 고수하면서 근ㆍ현대의 불교화단에 의미 있는 영향을 끼친 불모(佛母) 완호 스님의 향기가 배어 있는 영남의 불화소이다”며 “이번 학술세미나를 통해 복천사의 유래와 문화를 계승하고 양정욱 선생의 일대기를 재조명하기를 원했다”고 밝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