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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마강에 위치한 백제시대 목탑지에서 사리기가 봉안된 사리장엄구가 발굴되었다.
김용민 소장(문화재청 국립부여문화재연구소)은 10월 24일 왕흥사지 제8차 발굴조사에 대한 발굴조사 자문위원회 및 현장학습의 날 행사를 통해 “이번 발굴로 사리기의 봉안수법과 목탑 심초부 조성에 대한 새로운 기법이 확인됐다”며 “사리장엄구를 비롯해 사리함에서 왕흥사 창건(577년)과 관련된 명문기록이 확인됐고, 사리구를 포함한 백제시대의 귀금속 및 장신구 등 다량의 진단구가 출토됨으로써 당시 공예기술의 우수성을 확인할 수 있었다”며 발굴의 의의를 전했다.
사리함(높이10.3㎝)은 장방형 심초석(100×110㎝) 남쪽 끝단에 16×12×16㎝의 크기로 마련된 사리공 내부에 단면 사다리꼴의 화강암 뚜껑에 덮여 봉안돼 있었다. 재질은 청동으로 원통형 동체에 보주형 손잡이가 부착된 볼록한 뚜껑을 덮었다. 함 내부에는 다시 은제사리병(외병)을 봉안했고 이 은제 사리병 안에 다시 금제사리병(내병)이 봉안돼 있었다. 실제 사리는 별도로 확인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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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문은 사리함 동체부에 5자6행의 음각체로 <정유년 2월 십오일 백제왕 창이 죽은 왕자를 위하여 절을 세우고 본래 사리 두매를 묻었을 때 신의 조화로 셋이 되었다.(丁酉年二月/十五日百濟/王昌爲亡王/子立刹本舍/利二枚葬時/神化爲三)>고 적혀있는데 이 기록을 통해 그동안 <삼국사기>에 기록된 600년(법왕2년)에 축조되고 634년(무왕35년)에 낙성되었다는 왕흥사의 실제 축조연대가 577년(위덕왕24년)이라는 것과 위덕왕이 597년(위덕왕44년) 일본에 사신으로 보낸 아좌(阿佐)태자 외에 또 다른 왕자를 두었다는 역사적 사실이 확인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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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편 사리함이 봉안됐던 목탑지는 중층기단의 형태로 하층기단 기준으로 남북·동서길이 14m의 정방형 규모이다. 중심부에 장방형 심초석(100×110㎝)이 안치돼 있는데 심초부의 조성수법은 그 동안 알려졌던 심초에 심주를 바로 올리는 수법과는 다른 방법으로 백제시대 목탑 축조방법을 연구하는데 중요한 단서다. 이번 발굴로 백제 문화의 우수성이 다시금 세상에 알려지게 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