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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0년 10월 27일 조계종스님 등 153명을 강제연행하고 전국 사찰 및 암자 5731곳을 일제 수색했던 ‘10.27 법난’은 전두환 대통령이 전후과정을 보고받았을 가능성이 높고 신군부세력과 갈등관계인 월주 조계종 총무원장스님에 대한 부정적인 평가에서 비롯됐다.”
국방부 과거사진상규명위원회(과거사위)는 10월 25일 국방부 브리핑룸에서 기자간담회를 통해 10.27법난에 대한 조사결과를 발표했다.
과거사위에 따르면 “이번 조사의 성과는 불교계 정화 수사계획(45계획) 원본과 실무대책반이 작성한 문서를 발견했다는 것”이라며 “국민 및 대다수 불교신자들은 과장 왜곡된 중간수사결과 발표를 사실로 받아들여 그 이후 지속적으로 불교계를 비리의 온상으로 인식하게 되었고 심각한 명예를 실추시켰다”고 설명했다.
△월주 총무원장 부정적인 평가에서 법난 비롯돼=과거사위는 10.27 법난사건이 신군부세력에 비우호적인 조계종 월주 총무원장에 대한 신군부와 문공부의 부정적인 평가에서 시작된 것으로 보인다고 말했다.
1980년 2월 문공부는 1977년 6월부터 79년 10월까지 조계종 내의 종권 다툼에 대해 세 차례에 걸쳐 수습 중재활동을 전개했으나, 월주 스님을 중심으로 한 개운사측 스님들이 사회민주화세력과 연합해 저항불교로 변화될 것을 우려해 강한 경계심을 갖고 있었던 것으로 판단한다고 밝혔다.
특히 1980년 2월29일 개최된 제17차 계엄위원회 회의에서 문공부 차관은 “불교계의 수습 분위기가 성숙되도록 측면에서 지원하되 결정적인 시기에 거중 조정역할을 전개해 분규를 타결해야 한다”고 건의하기도 했다.
이런 당국의 우려와는 달리 불교계는 같은 해 3월 30일 조계종 내의 양대 분규세력 대표자들이 종단불화사태 종식에 대한 합의서약을 이끌어내고 4월 26일 제6대 중앙종회에서 월주 스님을 총무원장으로 선출했다.
하지만 월주 스님을 경계한 문공부는 매달 1000만원씩 조계종 총무원에 지급하던 불교진흥원 지원금을 월주 스님 총무원장 취임 이후부터 중단했다. 또한 불교재산관리법에 따라 문공부에 등록해야 하는 대표등록도 장기간 지연시켜 종단 내부 수습노력을 방해했다.
문공부는 월주 스님의 대표등록 지연사유로 ‘종정 미추대’를 내세웠으나 과거사위는 월주 스님에 대한 신원조회까지 마친 상태에서 장관 지시로 보류된 사실을 확인했다.
이러한 원인으로 과거사위는 월주 총무원장이 신군부가 요구한 전두환 장군 지지 표명과 문공부의 자율정화 지침을 거부했고, 불교재산관리법 등의 개정을 요구하는 등 국보위를 중심으로 한 신군부와 갈등관계가 심화된 것 때문이라고 설명했다.
△합동수사단, 1980년 9월부터 사회정화 차원서 종교계 수사 준비 착수=국가보위비상대책위원회(국보위)는 1980년 6월경 ‘3단계 사회정화계획’을 추진했으며 종교계는 3단계인 10월부터 숙정을 계획했다는 사실이 확인됐다. 또한 진정 및 투서횟수나 그 내용과는 관계없이 사회정화 차원에서 종교계 중 하나인 불교계를 수사한다는 시나리오를 갖고 있었던 것으로 판단했다.
1980년 9월 10일 작성된 월주 스님에 대한 동향관찰 보고 자료에 따르면 ‘9.10 국보위 사회분과위에서 월주 스님을 비롯한 불교계 폭력배 40여명을 숙정하고자 이들에 대한 갖가지 비리자료를 수집중’이라고 적혀있어 9월 이전에 국보위의 수사지시가 있었음이 확인됐다.
국보위로부터 지시받은 합동수사단은 공권력을 동원해 10.27 수사를 개시했을 때 발생하게 될 불교계의 종무 마비 사태를 대비해 실무대책반을 구성, 3단계의 수습대책 방안을 마련했다. 실무대책반은 반장 전창렬을 중심으로 보안사 양근하 소령, 다수의 군법사, 문공부 종무 1과장 등으로 구성됐다. 또한 실무대책반의 운영비는 불교진흥원에서 지원 받았으며, 활동기간은 1981년부터 1월 계엄 해제 시까지 였으며, 실무대책반은 정화중흥회 활동의 전반에 걸쳐 직간접적인 간여를 하는 등 상당한 영향력을 행사한 것으로 조사결과 드러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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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주 스님, 총무원장 사퇴 강요당해=10월 27일 새벽부터 연행대상 69명 가운데 45명이 체포돼 서울 보안사 서빙고분실과 각 지역보안부대에서 조사를 받으며 혐의 인정을 강요받았다. 이어 당시 맡고있던 직책의 사직도 종용한 것으로 확인됐다.
서빙고분실로 연행된 월주 스님은 자신에 대한 투서 내용을 근거로 취조를 당했으나 담당수사관은 허위투서라고 보고했다. 그러나 합수단은 월주 스님에게 총무원장 사퇴서를 강제로 받았다.
월주 스님을 투서한 4명이 무고혐의로 형사처벌됐는데도 합수단이 투서 내용을 검증하지도 않고 사퇴서를 강제로 받은 것은 국보위의 지시로 무리하게 수사에 나선 결과라고 과거사위는 설명했다.
△전두환씨 법난 전후사정 보고받았을 가능성 높아=전두환 前 대통령은 1989년 12월31일 국회 5공 청문회 증언에서 10.27 법난 사건에 대해 “잘 모르고 있었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1980년 12월11일 박기종 당시 정화중흥회의 의장 등 승려 8명을 청와대로 초청해 문답형식의 대화를 나눈 면담자료는 전 대통령의 주장이 거짓이었음을 증명하고 있다고 과거사위는 설명했다.
전 대통령은 면담 당시 “참선하는 절에 깡패들이 서식하고, 내가 잘 아는 서돈각 박사가 종단 분규로 욕을 보았다”는 등 기존 종단 분규를 비난한 발언 등으로 미뤄 당시 전 대통령은 법난의 전후과정을 보고 받은 것으로 과거사위는 최종 판단했다.
여기에 1980년 12월 11일 ‘불교 재산처리문제’라는 청와대 보고자료에 의하면 ‘화쟁교원 104억원은 본인 희망에 의거 불교진흥원에 귀속시킬 예정이며 학교재단 등 무등록 사찰 90억원과 개인소유 동산 및 현금 환수액 1억원은 조계종에 귀속시킬 것’이라는 문구가 적혀 있는 사실도 전 대통령의 사전 인지 가능성을 뒷받침해 주는 사실로 과거사위는 발표했다.
△스님들 강제연행 및 고문 자행=수사기관에 연행된 스님들은 무릎을 꿇게 한 상태에서 각목을 집어넣고 무릎 누르기, 새끼손가락에 볼펜을 끼워놓은 상태에서 조이기, 잠 안재우기, 코와 입에 고춧가루와 빙초산 섞은 물 붓기, 물고문, 전기고문 등 온갖 가혹행위가 자행됐다. 손에 납덩이를 올려놓고 전기를 통하게 하는 전기고문, 군홧발로 밟고 소총 개머리판으로 때리기, 폭언 등도 비일비재했던 것으로 확인됐다.
과거사위는 가장 성직자로서 참기 힘든 수치심은 승복을 벗긴 후 군복으로 갈아입힌 후 고문을 자행한 것이라고 조사 결과를 설명했다.
특히 낙산사 주지였던 원철 스님은 강릉 보안부대로 연행돼 강도 높은 조사를 받는 과정에서 지병이 악화돼 사망한 것으로 나타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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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날 조사결과 발표를 현장에서 들은 당시 상원사 주지 삼보 스님은 구타와 물고문을 당한 당시의 상황을 흥분된 어조로 설명하며 “오늘 조사결과는 미흡한 면이 많다. 발표로 그치는 것이 아니라 법난에 대한 국가적 차원의 피해보상과 명예회복이 동시에 이뤄져야 한다.”며 “정부 차원에서 조계종단과 피해자들에게 공식 사과를 표명해야 한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한편 과거사위는 “이번 발표를 계기로 정부는 불교계 및 국민들에게 국가의 잘못을 진정으로 사과해 국민 화합시대를 열어나가기를 권고 한다”며 “정부당국은 피해 및 명예 회복 방안에 대해서 조계종단 측과 협의해 필요한 조치를 취해나갈 것을 제안 한다”고 밝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