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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리핀 피나투보 화산지대 봉사 현장을 찾아서
작은 정성이 큰 기쁨으로…전기ㆍ수도세까지 아껴가며 보시행

지난 10월 1일 새벽 4시 필리핀 수도 마닐라 시내에서 출발, 10여 시간을 자동차로 달려 도착한 피나투보산 아래 마을 바랑가이. 기계 문명을 일부러 외면이라도 한 듯한 바랑가이는 이국의 정취가 물씬 풍기는 낭만적인 마을이 아닌 세상과 외떨어진 산 밑에 대충 꾸려진 농촌이었다.

전력시설이 아예 없어 해가 뜨는 낮 이외에는 사람을 거의 식별 할 수 없기 때문에 필리핀 경주불국사 포교원(주지 법관) 봉사팀 10여명은 서둘러 낮에 이 마을에 도착했다. 의료 혜택은 고사하고 먹을 것과 입을 것이 마땅치 않은 이 곳 주민들에게 보시행을 펼치기 위해서다.

국민의 70% 이상이 가난에 허덕이는 이 나라에서 하필 이들은 왜 이 곳을 택했을까? 우선 궁금했다. 이유는 이랬다. 1991년 6월 피나투보 화산이 폭발해 산의 절반이 날아갔다. 50억톤에 달하는 용암이 흘러내려 이 일대를 폐허로 만들었다. 이 화산 폭발로 4만호의 가옥이 잿더미로 변했다. 30만명의 이재민이 발생했고, 9000여명의 숨졌다.


그로부터 15년이 지난 지금, 이재민들은 산 아래 풀이 나는 곳을 찾아 움막을 짓고 마을을 형성하며 근근히 살아간다. 필리핀에서 가장 빈민층들이 모여 사는 곳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래서 봉사팀들은 1달에 1~2회씩 이 곳을 찾는다. 마을은 산을 중심으로 10여 곳 이상이 형성돼 있다. 요즘은 비가 많이 오는 우기라 계곡을 건너가야 되는 마을은 물이 많이 불어나 찾아갈 엄두도 못낸다.

이날 봉사팀은 며칠 전 불어 닥친 태풍 때문에 길이 없어져 도로 사정이 그나마 좋은 바랑가이 마을을 행선지로 정했다. 도로 사정이 좋다지만 마을 아래까지만 차가 갈 뿐 그 곳에서 20여분 산길을 걸어 올라가야 마을이 나왔다.

봉사팀이 마을에 도착하자 이들을 기억하는 듯 반가운 표정을 지으며 마을 어린이와 청년 몇 명이 달려오더니 차에 있던 구호품들을 산 위 마을로 나르기 시작했다.

잠시 후 마을 중앙에 봉사캠프를 차린 봉사팀 앞에 여기저기 산 아래 흩어져 있던 마을 주민 100여명이 순식간에 환호성을 지르며 몰려들었다. 외부에서 누가 찾아오면 이들 나름대로 비상 연락망이 있다고 했다.

봉사팀은 크게 의료팀과 이미용팀으로 나눠졌다. 의료팀은 김진식(51·케손 그린치과) 원장과 하환(52·알라방 고려한의원) 원장이 주로 맡는다. 또한 이미용팀은 윤윤선(38·마카티 아라레스토랑) 사장과 박숙(38·비치여행사) 사장이 가위를 잡고 주로 아이들의 머리를 잘라준다.


봉사팀들이 각자 맡은 봉사를 시작하자마자 웬 20대 아줌마가 뛰어와 연실 머리를 조아리며 “마라밍 살라 맛 뽀(Maraming salamat po-매우 감사합니다)”를 외친다. 그녀의 이름은 걸리(24)인데 자신의 딸 다닐라(3)가 지난달 뎅기(말라리아의 일종)에 걸려 사경을 헤매는 것을 하환 원장이 침을 놔 준 뒤 온 몸에 열이 가라 앉아 목숨을 구할 수 있었다는 것이다. 눈물을 글썽이며 무척 감사해 했다. 생활이 어려워 아파도 참고 살아야 했던 현지인들에게 봉사팀의 진료 활동은 매우 값진 것임을 알 수 있었다.

봉사를 시작한지 3년동안 한번도 빠진적이 없다는 김진식 원장은 “짧은 시간내 치료할 수 있는 사람들이 많지 않기 때문에 충치를 뽑아주는 단순한 치료 밖에 할 수 없어 미안하고 아쉬운 마음이 많이 든다”면서 “이렇게나마 응급처치를 해주지만 아픈 것이 나았다고 좋아해 하는 모습을 보면 힘이 솟구치며 환희심을 느낀다”고 보람 있어 했다. 하환 원장은 한의사인 두 아들과 함께 번갈아 가며 가족이 봉사에 참가해 주위 사람들로 부터 칭찬이 자자하다.

처음에는 ''한방침''이 뭔지 몰라 생소해 했던 마을 주민들이 간단한 침시술로 아픈 곳이 낫자 이제는 한의사인 이들 세 부자만 오면 아픈 곳을 가리키며 서로 먼저 봐달라고 아우성이다. 하지만 침술로 치료가 안되는 중병도 많다며 안타까운 심정을 토로한다.

의료 봉사가 펼쳐지는 옆에선 윤윤선, 박숙 보살이 아이들의 머리를 깎아주고 있었다. 아이들에게 이발은 별로 인기가 없어 보였다. 줄을 서는 아이들이 손에 꼽을 정도였다. 윤 보살은 “아이들이 머리 깎는 것을 싫어해 머리를 다 자르고 나면 빵을 하나씩 주는 등 호객(?) 행위를 해서 이발을 해주고 있다”며 “이런 마을에는 물이 귀해 아이들이 머리를 자주 안감기 때문에 머리마저 자르지 않으면 아이들에게 이기 생겨 건강에 좋지 않다”고 설명한다.


무엇보다도 마을 사람들에게 가장 인기가 있는 시간은 식량과 의류 및 구호 물품을 나눠 주는 것이었다. 이날 보시 물품은 쌀 10가마, 옷 5박스, 빵 200봉지, 라면 5박스, 과자 2박스, 과일 2상자 등이 마을 주민들 손에 쥐어졌다. 이영실(50) 보살과 홍성길(51) 거사가 법관 스님을 도와 주민들에게 똑같이 나눠 주었다.

홍성길 거사는 “봉사를 마치고 집으로 돌아갈 때면 남에게 주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내가 무엇인가 큰 기쁨과 행복을 한아름 받아들고 가는 것 같습니다. 그 맛 때문에 힘들지만 매달 이 봉사행이 기다려집니다”고 소감을 피력했다.

옆에서 물품을 받아든 마을 이장 제임슨(65)은 “만성 질병에 속수무책이었어요. 돈이 없어 치료도 못하고, 먹을 것이 없어 산에서 나는 풀을 삶아 먹고 사는데 가끔씩 봉사팀들이 와서 너무 좋아요. 이제는 멀리서 차 소리만 들려도 봉사팀인줄 착각이 들 정도로 기다려집니다”고 감격해 했다.

낮 12시부터 시작된 봉사는 오후 6시 땅거미가 질 무렵에서야 끝이 났다. 반나절 밖에 안되는 비록 짧은 시간이지만 봉사팀들이 이들에게 주고 가는 것은 단순히 치료와 부족한 물품이 아니었다. 그것은 부처님 가르침 중 가장 중요한 자비의 정신이었다.

이영실 보살은 “이 곳 교민신도들은 경제 사정이 좋지 않은 분들이 많아 후원이 풍부하지 못합니다. 그래서 주지 스님을 비롯해 우리 봉사 단원들은 절에 전기세와 수도세 등을 아껴가며 보시 물품을 마련하지요”라며 “우리가 조금 더 안 먹고 안써 절약하면 좀 더 많은 이들에게 혜택이 돌아 갈 수 있다고 생각해 혼연일체가 돼서 긴축재정을 펼칩니다”고 말했다.


피나투보 봉사를 마치고 돌아오는 차 속에서 이 말을 듣자마자 경우는 다르지만 영화 한 편이 떠올랐다. 2차 세계대전 당시 사업가인 쉰들러가 독일군 장교에게 수용소에서 빼내는 사람 숫자대로 뇌물을 주며 1100명의 유태인을 구해낸다는 내용이다. 그 때 쉰들러는 이렇게 혼자 속삭인다. “내가 차고 있는 이 금반지와 자동차 하나를 팔았더라면 몇 명을 더 구할 수 있었을 텐데”라고.


필리핀 경주불국사 포교원 주지 법관 스님

“피나투보 주민들에게 가장 필요한 것은 빵과 옷이지만, 장기적으로 볼 땐 교육을 시키는 것입니다. 위생 및 의료 상식에 대한 교육, 글을 가르치는 것도 장기적으로는 해야 할 일이지요.”

포교원 개원 이듬해인 2001년부터 피나투보 자원 봉사에 나선 필리핀 경주불국사 포교원 주지 법관 스님은 당장 쌀을 주는 것도 중요하지만 농사짓는 방법을 가르쳐주는 것이 더 효율적이라고 생각한다. 즉 교육이다.

봉사행을 펼치는 스님에겐 한 가지 원칙이 있다. 봉사하면서 절대 불교를 믿으라고 이들에게 강요하지 않는 것이다.

“우리 봉사팀은 순수하게 봉사가 좋아서 시작한 이들입니다. 그래서 김진식 원장님은 불자지만 가끔씩 교회 봉사 현장에도 가지요. 최근 한국의 모 교회서 아프카니스탄에 가 선교 목적으로 봉사활동을 하다 문제가 된 것을 본 적이 있습니다. 이것을 보면서 봉사 할 때는 순수한 마음이 더 먼저여야 한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어려운 이들에게 가장 절실한 것은 빵과 옷이지 종교가 아닙니다. 목숨부터 살리고 봐야 하지 않습니까?”며 봉사의 참 정신을 강조했다.

한편 법관 스님은 2006년 조계종 해외포교상을 받기도 했으며, 올해에는 라모스 前 필리핀 대통령과 함께 구찌 평화상도 수상했다. 또한 경주불국사 필리핀 포교원의 봉사활동은 필리핀 민영방송인 ‘스튜디오 23TV’ 채널에서 다큐멘터리로 소개되기도 했다.
필리핀 피나투보=김주일 기자 | jikim@buddhapia.com
2007-10-22 오후 6:29: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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