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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봉은사는 추사의 명품 글씨 잉태시킨 탯자리”
유홍준 문화재청장, 봉은사서 판전 특강
유홍준 문화재청장이 9월 6일 서울 봉은사(주지 명진)에서 <추사 그리고 판전 이야기>를 주제로 공개특강을 열었다. 사진=박재완 기자

“판전(板殿)을 모르는 사람은 없지만, 추사의 말년 명품 글씨들을 잉태시킨 탯자리 봉은사에 대해 아는 사람은 많지 않습니다.”
저서 <완당평전>에서 ‘세상에는 추사를 모르는 사람도 없지만 아는 사람도 없다’고 했던 유홍준 문화재청장이 9월 6일 서울 봉은사(주지 명진)에서 ‘추사, 그리고 판전 이야기’를 주제로 공개특강을 열었다.

봉은사 경판전의 ‘판전’ 편액은 추사 김정희(1786~1856)의 마지막 글씨로, 추사는 이 글씨를 쓰고 3일 후 세상을 떠났다고 한다. ‘봉은사 김정희서 판전 현판’은 현재 서울시 유형문화재 제83호로 지정돼 있다.

최근 출간된 한승원의 소설 <추사>에서도 그려져 있듯, 말년의 추사는 봉은사에 기거하며 명작들을 잉태해냈다. ‘판전’은 그의 대표작 중 하나로 손꼽힐 정도로 작품성이 뛰어나다.

이러한 세간의 관심을 반영하듯, 6일 봉은사 보우당에는 오전 8시라는 이른 시각에도 불구하고 300여 명의 불자들이 자리를 메웠다. 또한 이날 오전 7시 모임을 가진 봉은사 공식자문기구 ‘봉은사와 세상을 생각하는 사람들의 모임-산사나무 아래서’ 회원들과 주지 명진 스님도 자리를 함께 해 강의를 경청했다.
이날 특강은 오전 8시라는 이른 시간에 진행됐음에도 300여 명의 불자들이 참석했다. 사진=박재완 기자

유 청장은 “단군 이래 우리나라 최고의 문화예술가를 꼽으라면 추사의 이름을 떠올리는 사람이 적지 않을 것”이라며 “하지만 그런 추사의 일생에 있어 봉은사가 차지하는 비중이 막중하다는 것을 아는 사람은 많지 않다”는 말로 강의를 시작했다. 추사의 작품 세계에서 ‘판전’이 차지하는 위치는 그야말로 확고부동한 것임에도 불구하고, 봉은사와 판전 그리고 추사의 관계에 대한 이해가 넓지 않다는 데 대한 아쉬움이 짙게 묻어났다. 유 청장은 추사와 봉은사의 인연을 얘기하기에 앞서 우선 추사의 생애를 살폈다.

추사는 당대의 명문 중 명문인 세도가 경주 김씨 월성위(영조의 사위)의 증손으로 태어났다. 약관 24세에 동지부사로 떠나는 아버지의 김노경의 자제군관(子弟軍官) 자격으로 연경(오늘날 북경)에 가서 당시 청나라 학예계의 석학이었던 완원(阮元), 옹방강(翁方綱)과 학연을 맺으며 이후 금석학과 경학 그리고 시문과 서예에서 그 명성을 국제적으로 드높였다.

하지만 정쟁으로 인해 제주도에서 9년간의 귀양살이를 해야 했다. 유배지에서 비참한 노년을 보내야 했던 추사는 그 아픔의 세월을 오히려 자신의 학문과 예술을 무르익는 계기로 삼아 ‘추사체는 제주도 귀양살이 이후에 완성되었다’는 평을 받고 있다.

63세 되던 해 겨울에 마침내 귀양살이를 청산했으나 다시 정쟁이 일어나 함경도 북청에 유배되어 1년간 귀양살이를 하게 된다. 67세에 유배에서 풀려난 늙고, 병든 추사는 과천의 과지초당에 머물며 여생을 마무리했다.

“추사 예술의 최고봉은 그의 생애 마지막 4년에 있었다고 할 수 있는데, 저는 이 시기를 <완당평전>에서 ‘과지초당과 봉은사를 오가며’라는 부제로 서술했습니다. 당시 추사는 봉은사에 별실을 마련해 머물며 옛날 못지않은 열정으로 학문과 예술에 대한 자신의 생각을 유장하게 펼쳐갑니다.”
봉은사 보우당에서 진행된 강의 후 유홍준 청장은 판전으로 자리를 옮겨 참가자들과 함께 추사체의 아름다움을 감상했다. 사진=박재완 기자

유 청장은 “생의 마지막 4년간 추사의 예술은 더욱 높은 경지에 올라, 굳이 잘 쓰려고 하지 않아도 명작을 낳는다는 입신(入神)의 경지, 잘 썼는지 못 썼는지조차 따질 수 없는 불계공졸(不計工拙)의 경에 이르게 됐다”고 평가했다.

추사는 벗 권돈인에게 보낸 편지에서 “장시간 쓴 병풍 글씨와 대련 작품이 쌓인 것을 보니 크고 작은 것이 수백 폭이었고, 또 편액(扁額)이 그만큼 되었습니다”라고 했을 정도로 봉은사에서 작품 활동에 매진했음을 알 수 있다.

“뭇 사람들의 감동을 자아내어 지금도 상찬해 마지않는 추사의 과천시절 작품들이란 실상 봉은사에서 쓴 것이 많습니다. 실제로 추사는 봉은사에 별실을 마련하고 상주하며 작품을 제작하며 말년을 마무리했습니다.”

하지만 추사가 작품만을 위해 봉은사에 온 것은 아니라고 유 청장은 강조했다.

“‘해동의 유마거사’라는 평을 받고 있는 추사는 학(學)으로서의 불교학, 선학의 대가였을 뿐 아니라 진정한 재가불자였습니다. 추사는 영기 스님이 편찬한 <화엄경 수소 연의본> 경판을 보관할 현판 글씨를 직접 썼습니다. 더욱이 각별한 애정이 있었는지 다른 현판 글씨 두 배는 되는 대자(大字)로 글자 하나 크기가 어린애 몸통만 했습니다. 현판 이름은 평범한 경판전이 아니라 ‘판전’이라고 줄여 그 의미의 함축성을 응집시켰습니다. 이것이 바로 봉은사의 유명한 ‘판전’입니다.”

추사는 현판 왼쪽에 낙관하기를 ‘칠십일과 병중작(七十一果 病中作)’이라고 해서 ‘71세 된 과천 사람이 병중에 썼다’는 점을 강조했다. 이처럼 ‘판전’은 우리나라의 서성(書聖) 추사 김정희의 절필(絶筆)이자, 수많은 추사의 작품 중 추사체의 본질을 가장 잘 반영하고 있는 작품 중 하나다.

“판전의 글씨를 보면 마치 어린애 글씨 같은 분위기가 있습니다. 본래 어린애의 글씨는 아무 꾸밈없는 그저 천진한 것인데, 추사가 추구한 이 천진무구함이란 ‘단련된 천진성’이라는데 중요한 미덕이 있습니다. 추사는 ‘나는 70평생 벼루 10개를 밑창 냈고 붓 일천 자루를 몽당붓으로 만들었다’고 말했습니다. 이러한 과정을 거치고 천연스럽게 나온 것이 추사체의 내공이고 ‘판전’ 글씨의 미학인 것입니다.”

1시간 30여 분 동안 강의를 진행한 유 청장은 이번엔 참석자들과 함께 봉은사 판전으로 자리를 옮겼다. 사진자료만으로는 느낄 수 없는 추사의 필체를 직접 감상하기 위해서다. 가을비가 흩날리는 가운데 판전 앞에 선 유 청장은 “유최진은 <초산잡저>에서 ‘글씨의 묘(妙)를 참으로 깨달은 서예가란 법도를 떠나지 않으면서 또한 법도에 구속받지 않는 법’이라고 했고, 청나라 서예이론가 양헌은 <평서결>에서 ‘진정한 입고출신(入古出新)의 개성적인 글씨, 이를 감당할 수 있는 서예가는 오직 완당 김정희 뿐이다’라고 했는데 ‘판전’ 글씨를 보면 이 말의 뜻을 바로 이해할 수 있을 것”이라고 설명했다. 이 자리에서 유 청장은 “문화재청장으로서 ‘판전’ 편액을 실물과 똑같이 재현해 낼 수 있도록 하겠다”는 뜻을 밝히기도 했다.

강의가 끝나고 참가자들은 집으로 돌아갔고, 추사의 글씨는 여전히 그 ‘당당한 천진성’을 간직한 채 판전을 지키고 있었다.

봉은사 공식자문기구 산사나무 아래서
봉은사의 공식자문기구인 봉은사와 세상을 생각하는 모임 <산사나무 아래서>는 매달 초 모임을 열고 있다. 사진은 9월 6일 열린 산사모임. 사진=박재완 기자

봉은사의 공식자문기구인 봉은사와 세상을 생각하는 모임 ‘산사나무 아래서’는 지난 5월 결성됐다. 박원순 변호사(희망제작소 상임이사)를 위원장으로, 부위원장인 손석춘(새로운 사회를 위한 연구원 원장) 이화영(자비신행회 상임이사)씨를 비롯해 정치, 언론, 학계, 시민사회단체 등 각계의 인사 25명이 참여하고 있다.

산사모임은 매월 한 차례 봉은사에서 회의를 열고 봉은사의 역할과 발전방향, 불교의 사회적 역할 등을 논의하고 있다. 산사모임 회원들은 다음 달 초 문경 봉암사에서 산사체험을 할 예정이며, 사찰의 사회적 역할을 주제로 한 세미나도 마련할 계획이다.
여수령 기자 | snoopy@buddhapia.com
2007-09-06 오후 4:4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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