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해년 하안거 결제법어
영축총림 방장 원명지종 대종사
오늘이 해제일이라 하는데 어느 때 결제를 했기에 오늘 해제라 합니까? 이 자리에 모인 대중들은 한결같이 은산철벽을 타파해서 부처가 되려고 모였습니다.
바로 이 자리는 선불장(選佛場)입니다.
날짜로 해제, 결제라는 것이 아니라 각자의 부처를 보기 위해 입정(入定)하는 것이 결제요 부처를 보고서 출정(出定)하는 것이 해제입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공부가 미진한 사람은 은산철벽이 나타날 때까지 쉬어서는 안 됩니다. 그 철벽을 타파하려는 사람이 그 한계에 도달하지 않고서 어찌 타파할 수 있겠습니까?
한걸음도 나아 갈 수도 물러설 수도 없는 그 상황에 이르렀을 때 어떻게 해야 되겠습니까? 이때 장부의 기개가 필요한 것입니다.
용맹심을 내어서 물러서지 말아야지요.
이 자리의 대중들은 능히 그때를 당해서 과감히 한걸음 내 딛을 수 있는 대장부라고 자부합니다. 고인이 분명히 말씀하셨습니다.
백척간두불동인(百尺竿頭不動人)
수연득입미위진(雖然得入未爲眞)
백척간두진일보(百尺竿頭進一步)
십방세계시전신(十方世界是全身)
백척이나 되는 장대 끝에서도 움직이지 않는 사람은 비록 들어오긴 했으나 아직 참 경지는 못되도다.
백척의 장대끝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가야만 시방세계가 온몸이로다.
이 말은 들어오기 어려운 경지에 이르렀더라도 그 경계에서 벗어나지 못하면 생사 해탈이라 할 수 없다는 말입니다.
까마득한 절벽 끝에서 움직이지 않는 것도 쉬운 일이 아닙니다.
그렇다고 마냥 거기에 머물러만 있다면 생사 해탈과는 요원한 것입니다.
이 집안의 공부는 생사해탈에 있습니다. 불조에 죄를 짓지 않고 부모에 죄를 짓지 않고 자신에게 죄를 짓지 않는 길은 생사해탈에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매순간 마다 공부에 매진해야지 다음으로 미루면 후회만 따르는 법입니다.
사우명시견미타(死牛鳴時見彌陀)라는 말이 있습니다.
빈둥빈둥 놀다가 죽어서 소가 된 뒤에 피눈물을 흘리면서 후회 한다는 말입니다. 소가 되어서야 공부하지 않은 것을 후회하면서 아미타불을 불러 보려 하지만 할 수 있겠습니까? 속으로 아무리 아미타불 아미타불 할런지는 모르지만 나오는 소리는 음메 음메 소리 밖에 나지 않습니다.
자아 어떻게 해야 되겠습니까?
오늘 스스로가 제대로 해제를 한다고 봅니까? 지금 이 자리에서 다시 큰 용맹심을 발해서 한 걸음 내딛어야 합니다.
소가 되어서 울면서 후회해도 아무런 소용이 없습니다.
그렇다면 대 용맹심으로 참 불사인 각전(覺殿)을 지어야지요. 각자의 마음 밭에 한그루 무영수(無影樹)를 심어서 생사를 벗어나는 불사를 지어야 합니다.
기둥을 세우고 기와를 올려서 짓는 불사는 비바람을 피할 수는 있어도 무명의 생사 바람은 막지 못합니다.
욕오색공위불사(欲悟色空爲佛事)
고재방수재승가(故載芳樹在僧家)
세간변시무상게(細看便是無上偈)
방변풍개지혜화(方便風開智慧花)
색과 공의 이치를 깨달아 불사를 짓기 위해 짐 짓 나무 한그루를 이 집에 심었도다.
자세히 들어 보면 깨달음의 노래 소리가 들리리니 정진의 바람 불어 오면 지혜의 꽃이 활짝 피어나리라.
역대 조사가 보여 준 불사가 무엇인지 오늘 대중들은 잘 헤아려 보아야 할 것입니다.
알겠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