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법전 스님은 <법안록>의 법안문익 선사(885-958, 당나라)가 던진 ‘배로 왔는가? 걸어왔는가?’라는 비유적인 질문을 통해 ‘공부 길’을 물은 그 의도를 제대로 알아차릴 때 해제기간의 만행이 참으로 의미가 살아나게 될 것이라고 말했다.
한편 조계종 전국선원수좌회가 전국 선원의 정진대중 현황을 정리한 <정해년 하안거선사방함록>에 의하면 전국 93개 선원(총림 5곳, 비구선원 54곳, 비구니선원 34곳)에서 정진대중 총 2221명(비구 1119명, 비구니 933명, 총림 169명)이 용맹정진한 것으로 집계됐다.
다음은 법어 전문.
조계종 종정예하 도림법전 대종사 하안거 해제법어
법안문익法眼文益선사에게 각覺 상좌 上座가 찾아왔습니다.
“배로 왔는가? 걸어왔는가?”
“배로 왔습니다.”
“배는 어디에 있는가?”
“배는 강에 있습니다.”
그리고는 물러가자 선사께서 곁에 있던 납자에게 물었습니다.
“각 상좌가 제대로 안목을 갖추었느냐? 갖추지 못했느냐? 네가 말해보거라.”
오늘은 하안거 한철 살림살이를 마지막으로 점검하는 해제날입니다. 이제 모두가 만행길을 나설 것입니다. 그리고 때로는 산길을 걸어서 선지식을 참방하기도 할 것입니다. 이 화두의 주인공인 법안문익 선사는 장경혜릉長慶慧稜문하에서 공부했으며 나한계침羅漢桂琛선사의 법을 이어받았습니다. 장경혜릉과 나한계침은 모두 설봉의존 선사의 제자입니다. 따라서 법안 역시 설봉가풍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해제는 그냥 해제가 아닙니다. 결제동안 공부했던 것을 해제 때는 제방의 선지식과 도반들을 두루 참방하면서 자기공부를 더욱 탁마하는 기간입니다. 멍청하게 다닌다면 가는 곳마다 곳곳에 있는 생치기에 걸려 자빠질 일 뿐입니다. 걸어왔는지 배를 타고 왔는지를 묻는 질문에 대한 낙처(落處)를 제대로 알아차리지 못하면 몽둥이 삼십 방 아니면 귀가 멀어질 만큼 꾸중하는 고함소리가 기다리고 있을 뿐입니다.
선지식의 물음은 ‘여기까지 어떻게 왔는가’ 하는 방법을 물은 것이 아닙니다. 질문 한마디 한마디가 공부 길을 묻는 것임을 알아차려야 합니다. 그 선지식은 속복의 거사차림일 수도 있고 재가보살의 모습일 수도 있습니다. 사실 본분자리에서 보면 배로 왔던지 걸어왔던지 그게 무슨 대수이겠습니다. 왔다는 사실이 중요한 것입니다. 분별적인 질문마저도 어떻게 보면 묻는 자의 분별의식일 뿐입니다. 그런데 거기에 말려드는 납자는 더 어리석은 일입니다. 선지식이 그걸 모르는 것이 아니라 방편으로 묻고 있는 것입니다. 방편이 방편인줄 모르고, 또 묻는 낙처를 제대로 모르면 선문답은 그야말로 우문우답이 되어버립니다. 어떻게 답하느냐에 따라서 우문은 현문이 됩니다. 또 우답은 현답이 됩니다. 우문우답을 현문현답으로 만들어내는 것이 제대로 된 공부인이라고 하겠습니다.
수불세수水不洗水하고
금불역금金不易金이로다
물로는 물을 씻지 못하고
금으로는 금을 바꾸지 못한다.
불기 2551(2007) 하안거 해제일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