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기 2568. 10.25 (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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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란분절' 조상 천도의 날 풍년기원 잔칫날
노성환 교수의 우란분절 이야기 1
우란분절은 조상의 극락왕생을 기원하며 살아있는 생명의 평안을 기원하는 날이다. 사진은 예수재 장면. <현대불교자료사진>

우리가 우란분절, 백중이라고 부르는 음력 7월15일은 우리민족에게는 어떤 의미의 명절이었을까? 이를 알기 위해서는 일차적으로 그 명칭을 살펴볼 필요가 있다. 우리 조상들은 7월15일을 백중(百中)을 비롯해 백종(百種), 백종, 백종(魄縱), 백중(白衆), 중원(中元). 우란분재(盂蘭盆齋) 등 아주 많은 이름들을 붙여서 불렀다. 그 어원에 대해서는 명확하지 않으나 그 뜻에 대해서는 다음과 같이 해석들을 하고 있다. 즉, 백종(白種)은 우란분재에서 백가지 음식과 과일을 차려 재를 올리는데서 생겼다 하고, 백종(魄縱)은 이 날 절에서 죽은 사람들의 영혼을 위하여 설법 축원한 공덕으로 여러 사람들이 고해에서 벗어나 극락을 얻어서 마음 놓고 자유롭게 놀게 되었다는 뜻에서 생겨났고, 그리고 백중(白衆)은 승려들이 하안거 기간에 지은 죄과를 들어서 여러 대중에게 고백한다는 뜻에서 나왔으며, 백종은 농부들이 이 날이면 여름 농사를 다 마치고 발에 묻은 흙과 때를 깨끗이 씻어 발뒤꿈치가 하얗게 된다는 뜻에서 생겨났으며, 중원은 도교에서 유래된 말이라고 한다. 이처럼 명칭만 보더라도 7월 15일은 단순히 불교적인 행사만 있는 날이 아니라 많은 의미가 깃든 날임을 알 수 있다.

이러한 백중을 민속학적인 입장에서 바라보았을 때 다음과 같은 세 가지 의미가 있다. 그 첫째는 불교의 우란분회로서의 백중이다. 불교사원에서 이 날에 행사를 크게 벌이는 이유는 조상의 영혼을 위로하기 위해서이다. 그러한 데는 <대목건련경>과 <우란분경>에 근거를 두기 때문이다. 이들 경전은 조금씩 내용이 다르나 모두 부처님의 제자 목련을 주인공으로 하고 있고, 그가 지옥에 떨어져 고통을 받고 있는 어머니를 구하기 위해 7월15일 우란분절에 대중 또는 스님들에게 공양을 올린 공덕으로 어머니를 지옥의 고통에서 벗어나게 했다는 내용을 담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경전에 의거하여 우란분회가 실시된다는 것이다.

우란분회가 고대로부터 행하여졌겠지만 기록상으로 나타나는 것은 고려시대 때부터다. <고려사>에 의하면 왕이 장령전 또는 봉원전, 내전 등에서 우란분재를 베풀었다 하고, 또 왕이 공주와 함께 신효사, 광명사 등지에 가서 우란분회를 행하였다는 기록이 심심찮게 보인다. 목은 이색이 지은 아침 비(朝雨)라는 시에도 “우란분회를 절마다 열었는데, 시주들이 무리를 이루고 웃고 떠드느라 시끄럽다”는 내용이 있다. 이처럼 고려시대에는 대부분의 절에서 우란분회를 대대적으로 행하였음을 엿볼 수 있다.

그리고 조선시대의 문헌인<열양세시기>에 의하면 "어떤 이가 말하기를 신라와 고려시대에는 불교를 숭상하였으므로 우란분의 공양을 모방하는 유속을 따라 중원일에는 백 가지의 꽃과 과일을 부처님께 공양하며 복을 빌었으므로 여기서부터 곧 백종이라는 말이 생겼다고 한다"고 하면서 “승가에서는 이 날 재를 올려 조상의 영혼을 위로한다"고 설명하고 있다. 그리고 같은 시대의 <동국세시기>에도 백종은 “고려 때 불교를 숭상하여 이 날이면 우란분회를 베풀었다”고 언급하고 있다. 이처럼 백중은 불교의 힘으로 조상을 천도하는 날이었다.

둘째는 농경의례로서의 백중이다. 이 시기는 밭작물의 수확이 끝나고, 논(벼) 작물의 풍요를 기원하는 시기이다. 그러므로 그것을 가져다 준 농신에 대한 감사를 드리며, 일손을 놓고 하루를 신나게 노는 날이었다. 그 예로 과거 농촌에서는 백중일 전후해서 시장이 섰는데, 이를 ‘백종장’이라고 했다. 이 때는 여러 가지 놀이와 노름, 그리고 흥행이 벌어지는 난장이 서는 때이다. 또 여러 곳에서 씨름판이 벌어지거나 흥행단이 모여들기도 한다. 이 백종장이 서면 주인들은 머슴들에게 새 옷 한 벌과 장에 나가 먹고 쓰고 즐길 돈을 주니 이를 ‘백중돈’이라 한다. 이 ‘백중돈’은 농촌에서 머슴에게만 주는 것이 아니라 집안의 장정과 아이들에게도 준다. 그러면 이들은 모두 새 옷을 입고 신나게 장터로 나가 물건도 사고 먹고 마시고 구경하며 하루를 즐기게 된다. 또 농사를 잘 지은 머슴을 소에 태우거나 가마에 태운 후 위로하고 흥겹게 놀기도 한다고 한다. 이처럼 백중은 농부들과 머슴들의 명일이었으므로 이를 ‘머슴날’이라고 했다. 이처럼 백중은 농경의례에 있어서도 매우 중요한 날이었다.

셋째는 망혼일로서의 백중이다. 요즘은 거의 사라지고 없지만, 과거에는 백중날 조상제사를 지내는 곳이 많았다. 여기에 대한 기록은 일찍부터 나타나는데, 서애 유성룡의 ‘7월 15일은 촌민들이 부모를 위한 초혼제를 지내는 날’이라는 긴 제목의 시에 “보리밥 한 그릇과 채소 한 접시로 강가에서 혼을 불러 제사를 지내네, 가을 하늘은 막막하고 가을 해는 어두우니, 혼이 오는지 안 오는지 알 수가 없네. 사람이 이 지경에 이르면 가슴 메일 일인데, 강물은 동으로 흘러 그칠 때가 없네”라는 내용이 그 좋은 예이다. 이처럼 백중은 돌아가신 조상에게 제사지내는 날이었다. 그러나 여기에서 간과할 수 없는 사실은 유성룡의 시점이 촌민들과 거리를 두고 있다는 점이다. 즉, 7월 15일은 촌민들이 초혼제를 지내는 날이지 자신들과 같은 양반계층의 행사가 아니라는 인식을 엿볼 수 있는 것이다.

그러한 것은 조선후기 이안눌의 문장에서도 나타난다. 그의 문집에 7월 15일을 기해 지은 글 가운데 “시전에 채소와 과일이 많은 것을 보니, 도성사람들 도처에서 망혼에게 제사 지내겠네”하고서는 “우리나라 풍속에 중원을 망혼일이라 부른다. 여염 백성들은 이날 달밤에 채소, 과일, 술, 밥 등을 차려놓고 돌아가신 어버이 혼을 불러 제사를 지낸다”고 설명하는 내용이 있다. 여기에서도 일반 서민의 여염집에서 제사를 지내는 것이지 지배계층인 양반들은 그 날 지내지 않는다는 인식은 앞에서 본 유성룡의 예와 같다. 다시 말하여 조선시대의 백중날 조상제사는 양반들 보다는 서민들의 것이었던 것 같다.

최남선은 일찍이 우리의 백중이 불교뿐만 아니라 도교적인 요소도 골고루 받았다고 지적한 바 있으나 실은 그 속에서 도교적인 요소를 좀처럼 찾을 수 없다. 그렇다고 해서 중원에 대한 지식이 전혀 없었던 것은 아니다. <동국세시기>에 중국의 중원을 <형초세시기>의 기록에 근거하여 “승니, 도사, 속인들이 모두 분(盆)을 만들어 절에다 바친다고 했다”고 소개하고 있고, 또 1920년대 신문에서는 중원을 “중국 도관에는 인간속재일이라”고 설명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도교적인 중원의 풍속이 보이지 않는다는 것은 그것이 한국의 민속사회에 제대로 정착을 하지 못한 것이라고 보아도 무방할 것이다.

이상에서 보는 바와 같이 한국의 음력 7월 15일은 불교의 영향으로 절에서 우란분회를 개최하여 지옥에 떨어진 조상을 천도하는 날인 동시에 밭작물의 수확에 감사하고 벼의 풍요를 기원하며 농부들이 한바탕 신나게 노는 날이었다. 그리고 서민들에게 있어서는 죽은 조상을 불러 제사를 지내는 망혼일이기도 했다. 그러나 오늘날에는 그러한 요소들이 퇴색되어 불자들만이 절에 가서 조상을 위해 재를 올리는 날, 우란분절로 기려지는 것이다.

노성환 교수는?
-울산대 일본어일본학과 교수.
-계명대(학사), 한국외대(석사), 일본 오사카대(박사)에서 수학.
-미국 메릴랜드대학 방문교수, 일본 국제일본문화연구센터 객원연구원 역임.
-주된 연구분야는 신화와 민속을 통한 한일비교문화론. 전공은 비교민속학.
-저서 <일본속의 한국> <한일왕권신화> <젓가락사이로 본 일본문화> 등.
노성환 교수(울산대) |
2007-08-21 오후 3:04: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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